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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관(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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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철도청 차장
김영관
金榮觀|Kim Yeong-gwan
파일:10_img1.jpg
출생 1924년 9월 15일 ([age(1924-09-15)]세)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영송리[1]
재임기간 제16대 철도청 차장
1981년 1월 ~ 1982년 9월
제12대 사단법인 한국광복군동지회장
2011년 6월 ~ 2015년 5월
제15대 사단법인 한국광복군동지회장
2019년 7월 ~ 현재
학력 육군사관학교 (명예 학사)
임관 육군종합학교 (26기)
직업 군인[2][3], 독립운동가, 철도청 차장
최종 계급 대위 (대한민국 육군)
상훈 화랑무공훈장 수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1. 개요2. 일생3.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김영관 지사.jpg
대한민국군인, 독립유공자. 철도청 차장을 역임한 철도공무원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받았다.

현재 만 [age(1924-09-15)]세로, 단 2명뿐인 광복군 출신 생존 독립유공자 중 한 명이다.[4] 광복군 관련 행사를 포함한 여러 보훈 행사에 자주 참석하기에 인터넷 기사들을 통해서도 소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 일생

1924년 9월 15일 경기도 포천군(現 포천시) 영중면 영송리에서 태어났다.

포천 영평공립보통학교(現 영평초등학교) 5학년 재학 시절, 조선인 친구로부터 충칭시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으며, 선린상업학교 졸업을 앞두고 일제의 징병을 피하기 위하여 경성사범학교(現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입학한 지 5개월 만인 1944년 어째서인지 일본 제국 육군의 징병통지서를 받게 되어 주변에서 유일하게[5] 징병 대상이 되어버렸고, 1944년 9월 징병되었다. 일본 제국 육군 입대 후 함경남도 함흥부(現 함흥시)에서 1달간 신병교육훈련을 받고 중화민국 절강성 동양현(東陽縣)[6]에 주둔 중인 일본 제국 육군 제43부대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이미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만큼 중국에 배치된 것을 기회로 삼아 뜻을 함께한 동료들과 함께 1944년 11월(혹은 12월) 3일에 일본군 부대에서 탈영하였고, 국민혁명군 제3전구 충의구국군의 총지휘부를 거쳐, 3달 정도 고생 끝에 1945년 2월 한국광복군에 정식으로 입대했다. 이후 국민혁명군 제3전구 관내 강서성 상요현(上饒縣) 하구진(河口鎭)[7]에 있던 제1지대 제2구대 및 징모 제3분처에서 8.15 광복 때까지 국민혁명군 유격대와 합동으로 정보 선전 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 제국 육군 포로를 심문해 일선 및 후방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공작에 활용했다. 또한 일본 제국 육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는 등 항일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46년 3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고,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해 소위로 임관한 후 공병 장교로 참전했다. 전공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휴전 후 대위로 예편하였다.

1957년부터 철도청에서 근무하며 1981년 차장을 역임해 1982년 퇴직하였다. 퇴직 후 1986년 까지 홍익회장을 맡았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한국광복군 활동 당시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사단법인 한국광복군동지회[9]의 제12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다시 제15대 회장을 맡아 활동한다.

3. 기타

  •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마지막 광복군'이라 소개하는 경우가 많아 정말 마지막 생존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2024년 6월 5일 기준으로 생존 중인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는 국내외에 총 2명이다.[10]
  • 2016년 8월 12일 청와대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 행사에서 독립유공자 대표로 모두발언을 하였는데, 이때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출범했다면서 이 날을 건국절로 제정하자는 일부의 주장은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라며 건국절 제정론을 비판했다. 이는 2015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건국 67주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기도 했다. 광복군 김영관 선생, 靑 오찬에서 "8.15 건국절 주장은 역사외면"
  • 현재도 광복절 행사 등 정부 주도의 보훈 행사에 꾸준히 초청받아 대우를 받는 중이다. 2018년 3월 6일 육군사관학교 74기 졸업 및 임관식에서는 육사 명예졸업증서를 받으신 바 있는데, 이날 대통령의 연설 중에 "국군의 뿌리는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그 뿌리는 매우 깊고 단단하다."라는 내용이 있어 더 남다른 행사가 되었다.
  • 2021년 8월 15일,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식에 참석하여 독립지사 대표로 분향하였다.


[1] #[2] 한국 광복군, 국군[3] 구 일본군은 징병 후 탈출하였기에 제외[4] 나머지 1명은 오성규[5] 경성사범학교 내에서 유일했는지, 고향에서 유일했는지는 불분명. 모 언론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전자, 모 블로거의 인터뷰에 따르면 후자.[6]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진화시 둥양시.[7]중화인민공화국 장시성 상라오시 옌산현(鉛山縣) 허커우진(河口鎭).[8] 맨 앞쪽(사진상 왼쪽 아래)가 김영관 지사. 위 사진은 휴전협정이 진행 중이던 1953년의 사진으로, 안타깝게도 광복군 복무 당시에는 어려운 여건이었던만큼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9] 실제 광복군 출신의 독립유공자 분들이 주축을 이루는 조직으로, 전우회로서의 역할도 한다. 현재는 '사단법인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로 법인명칭 변경했다.[10] 출처는 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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