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43:53

곡나진수



谷那晋首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백제인물.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2. 생애

663년 음력 9월 24일, 곡나진수는 좌평 부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억례복류 및 백제 유민들과 함께 저례성(弖禮城)[1]에 이른 후 다음날 일본으로 향했다고 한다. 백제부흥운동 당시 관직은 달솔(達率)이었다.

671년 정월, 망명한 백제 인사들에게 관직이 수여되었는데 곡나진수는 대산하(大山下) 벼슬을 받았다. 일본서기 기사에 의하면 목소귀자, 억례복류와 함께 병법에 밝았다(閑兵法)라는 주석이 붙어있다.

3. 기타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지명으로 곡나(谷那)[2]가 등장하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욕내군(欲乃郡: 현 전라남도 곡성군)과 같은 지명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곡나진수가 지금의 곡성 지역 출신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같은 곡나씨에 속한 인물로는 724년 5월 13일에 일본 조정으로부터 나니와노 무라지(難波連)라는 성을 사여받은 도래인 곡나경수(谷那庚受)가 있다.
[1] 훈독은 '테레사시'이며, 현재 위치는 백제 때 달나(達拏) 또는 월나(月奈)라고 불렸던 전라남도 영암군으로 비정된다. 영암군이 아니더라도 일본으로 향하는 길목이라 기록된 점을 고려하면 서남해안 어딘가의 지명이었을 것이다.[2] 진구 황후 52년(372년?) 9월 10일 기사에는 칠지도가 백제의 곡나철산(谷那鐵山)에서 얻은 철로 만들어졌다고 적혀 있으며, 오진 덴노 8년(397년?) 3월 기사에는 왜국이 빼앗은 백제의 영토로 침미다례, 지침 등과 함께 곡나(谷那)가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