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곡성평화의소녀상 | |
<colbgcolor=#A4856F> 최초 건립 | <colbgcolor=#fff,#1f2023>2016년 10월 7일 |
전라남도 곡성군 레저문화센터 | |
건립 주체 | 곡성군평화의소녀상 건립추진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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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곡성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예술 조형물(동상)이다.2. 배경
곡성교육희망연대 위원장이던 박웅두는 2015년 죽곡농민도서관에서 주최한 '농민인문학' 강좌에서 곡성의 근현대사와 관련한 강의를 하게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해방이후 현대화 시기까지 곡성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 일본군에 의해 섬진강가에서 불태워져 죽은 동학농민군 이야기, 한말 의병운동과 관련된 동악산에 얽힌 이야기, 한국전쟁을 전후로 일어난 민간인 피해사건 등 잊혀져가는 역사에 대한 관심을 나누는 자리였다. 이때 한 학생이 곡성에도 '위안부'피해자가 있는지 물었고, 한 번 같이 찾아 보자는 이야기로 강의는 마무리 되었으나 곡성에 평화의소녀상 건립을 추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3. 추진위
상임대표 당시 곡성 노인회장 유종표추진위원장 박웅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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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설치과정
4.1. 모금
소녀상을 건립하고 이후 후속 사업까지 진행하는 데 예상되는 약 4,500만원이 광범위한 모금사업을 통해 마련돼야 했다. 추진위는 전액 군민들의 모금을 통해 확보하기로 하고 지역 내 기관 사회단체를 찾아다니며 사업의 취지를 설명하고 모금을 부탁했다. 또한 관내 학교에 협조공문을 보내고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요청했다.첫 단체모금은 옥과중학교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모아온 성금에서 시작됐다. 옥과중학교의 모금소식이 전해지자 관내 학교의 모금활동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그 결과 관내 모든 학교에서 모금이 이뤄졌으며 특히 한울고등학교에서는 학교 내 모금 뿐 아니라 각종 행사를 자체 기획하고 거리 모금을 병행하는 열성을 보여 주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소녀상 건립 소식을 접한 분들께서 건립기금을 보내주셨고 재경곡성향우회, 재광곡성향우회와 같은 출향 인사들께서도 기꺼이 성금을 보내 주셨다.
하지만 모금운동의 백미는 바로 각 읍면 노인회에 있었다. 상임대표인 유종표 당시 노인회장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11개 읍면 모든 노인회에서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각 읍면 노인회장님들께서는 마을별로 조직화되어 있는 노인회를 통해 모금을 조직하고 읍면 기관 단체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그 결과 인구 1,500명의 작은 면인 목사동면에서 615만원을 모금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 주었다. 곡성노인회의 이러한 노력은 모금운동에 일대 활력을 불어넣어 순식간에 지역으로 확산돼 그간 주저하던 사람들과 조직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군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조기에 모금 목표액을 달성하였으며 최단기간에 모금액 6,700만원, 목표대비 150% 달성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가져왔다.
4.2. 소녀상의 형상
건립분과에서는 소녀상을 어떤 모습으로 할 것인지 논의하고 준비했다.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앉은 자세의 소녀상으로 할지 지역의 정서와 염원을 담아낸 새로운 모습의 소녀상을 자체 제작할지 추진위가 담고자 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작품 공모에 들어갔다. 광주전남에서 활동하는 두 명의 작가가 시안을 제출했고, 추진위에서는 별도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을 제작한 작가에게도 연락하여 작품에 응모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일본대사관 앞 작품을 기본으로 하는 김서경 작가와 끌려가는 소녀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광주지역 작가의 시안이 공동으로 추천됐다. 두 작품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추진위원회 내부에서 팽팽하게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작품 선정을 위해 참여단체 대표들과 집행책임자들 전체가 모여 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하고 제출된 디자인 시안을 바탕으로 설명을 듣고 최종 투표를 진행했다. 그러나 1안과 2안이 동일한 득표를 얻어 결정을 할 수가 없게 되자 회의 진행을 위해 의견을 표시하지 않은 집행위원장의 마지막 한 표에 따라 2안이 결정되었다. [1]
4.3. 설치장소
소녀상을 어디에 설치할 것인지는 건립 추진위 결성때부터 큰 고민 중 하나였으나,[2] 군민들이 자연스럽게 만나볼 수 있으며 관리의 안전성을 고려하여 처음 제시한 곡선군청 느티나무 고목 앞은 곡성군청측에서 난색을 표하며 반려되었다.[3] 이에 대해 건립 전반에 책임을 지며 행정과 소통해 오던 집행위원장 박웅두는 상임대표와 상의 아래 전격적으로 레저문화센터 앞을 군청에 역 제안했다.다행히 관련 실과 책임자들의 논의와 군수의 전향적인 판단이 뒷받침 돼 현 위치인 곡성 레저문화센터 앞에 소녀상을 건립하게 되었다.
5. 강제징용 피해기록
곡성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계기로 곡성지역 내 일제강점기 생존피해자를 찾아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당초 추진위에서 설정한 세가지 사업 추진 방향에 포함되어서 사업 시작부터 일제강점기 생존 피해자를 찾는 일을 함께 진행했다.모든 선전물에 생존 피해자나 가족을 찾는 광고를 내는 한편 노인회를 통해 마을별로 사례를 수집해 나갔다.
이 와중에 추진위원회 발족식 현수막을 보신 어르신이 찾아오셔서 곡성에도 '일제강점기피해자전국유족연합회 곡성지부'가 있으며 지금까지 국가를 상대로 소송 중에 있음을 알렸다. 그 명단에 곡성에서 회원으로 가입한 분이 125명 정도였는데 징용이나 징병 당한 장소, 이름, 주소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4]
그러나 유족연합회 곡성지부에서는 현재 생존하고 계시는 분들의 현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추진위는 군청 행정과에 협조 요청을 하였다. 당시 정부차원의 조사와 보상이 이뤄졌고 전남도의 경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지원조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청에서 개인정보 제공은 본인의 동의 없이 이뤄질 수 없다며 공개를 거부했다.
얼마 후 오곡면 한 선배가 당신의 아버님이 강제동원 피해자라고 알려주었다. 추진위는 그의 도움을 받아 오경섭 어르신을 찾아뵙고 태평양전쟁에 강제 동원돼 생사를 넘나들었던 과거사를 발굴 녹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달면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강제동원 피해자라는 연락을 받고 할머니를 만나 당시 상황을 듣고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으나 가족들의 반대와 할머니의 건강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파악하지 못하였다.
6. 설치 후 & 의의
곡성평화의소녀상은 행정이나 기관의 지원 없이 오롯이 군민의 힘과 지혜로 세운 소녀상이였기에 그 의미가 더 배가 됐다는 평이다.설치 후 오가는 주민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데, 여름이면 누군가 따가운 햇볕을 가릴 수 있는 모자를 씌워 놓고 겨울이면 모자와 목도리가 둘러져 있으며 양말도 신겨 있다. 가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찾아와 물끄러미 소녀상을 쳐다보거나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오랜 친구처럼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계시는 모습도 보인다.
사업이 모두 끝나고 '곡성평화의소녀상 건립 군민추진위원회'는 공식 해산했다.[5]
[1] 당시 집행위원장 박웅두는 지역마다 건립주체와 의미가 다른 평화의 소녀상이 꼭 똑같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심스럽게 의사를 밝혔고 모두가 결과를 흔쾌히 수용하여 일정에 맞춰 제작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2] 이미 건립한 지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설치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배가 될 수 있다.[3] 곡성군은 현재 신청사를 짓고 있으니 이때 군청앞으로 결정되지 않은 것은 다행일 수 있다.[4] 그 명단에는 위원회의 집행위원장이 한 마을에 살며 가끔 농사일을 거들어 드린 동네 영감님도 올라가 있어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 주변에 훨씬 가까이 있으며, 그들의 고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느꼈다고 한다.[5] 모두가 기뻐하고 감격해 하는 해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