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1-10 23:27:04

공치봉

파일:공치봉.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사원(士元) / 오은(梧隱)
본관 곡부 공씨
출생 1832년 12월 12일
전라도 순창군 금동방 방금리
(현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방성리)[1]
사망 1910년 9월 23일
전라북도 순창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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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공치봉은 1832년 12월 12일 전라도 순창군 금동방 방금리(현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방성리)에서 공자의 73세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순창군 일대의 명망 있는 유학자로, 평생 벼슬하지 않고 자택에 은거했다. 그러던 1910년 8월 한일병합 소식을 접하자, 그는 울며 개탄했다.
"다행히 예의의 나라에 태어나 공자의 도리를 배웠는데 이제 나라가 깨어지고 임금이 없어지니 어디로 돌아 갈 것인가. 황천의 백골이 될지언정 섬 오랑캐의 백성이 되지 않겠노라."

그는 9월 18일 부모의 기일(忌日)을 맞아 고유(告由)하고 제사를 지낸 후, 물과 곡식을 입에 넣지 않다가 9월 22일에 사망했다. 향년 79세. 각지의 유생 50명이 그의 충절을 기려 '오은실기(梧隱實紀)'를 집필했지만 원본은 소실되고 필사본만 남아있다.

그가 죽은 후 일제 경찰은 그의 묘조차 쓰지 못하게 했고, 아들이 묘를 만들자 경찰서로 끌고 가 유치장에 가두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탄압이 심하자 집안 살림도 기울어졌고 자손들은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공치봉과 관련된 기록들이 후손들에게 고이 간직되어왔으나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때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의 독립운동 공적은 오랫동안 자료 부족을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다. 공치봉의 증손자 공헌식 옹은 광주지방보훈청에 신청서를 내고 각종 서류 미비와 자료 부족으로 보훈청에 수차례 들락거려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1년에 비로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 곡부 공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