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8:59:51

곽선호

파일:곽선호.jpg
성명 곽선호(郭善浩)
생몰 1896년 10월 17일 ~ ?
출생지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곽선호는 1896년 10월 17일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6월 6일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에서 이웃에 살던 종형제 곽익호의 집에서 한국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독립청년단의 지회를 결성하고 손재흥(孫再興)·김청풍(金淸風) 등 다수의 동지들을 가담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독립청년단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1.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부할 것
2.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조선인 경찰관리와 밀정을 살해할 것
3. 한국인으로서 요구되는 독립운동 자금의 제공을 거부 또는 독립운동자를 관(官)에 밀고한 자는 살해할 것
4. 한국 내의 독립운동 상황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고할 것
5.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송부해온 독립운동 선동 인쇄물을 일반 한국인에게 배포하여 그 사상을 선전할 것

독칩청년단 봉산지회 단장으로는 손재흥, 부단장엔 이정률, 총무에 김청풍, 김태용, 서기에 변인봉 김치은이 맡았으며, 교통원에는 곽선호, 곽익호, 권국빈이 맡았다. 곽선호는 이후로 손봉국, 변도준 등을 독립청년단에 가입시키는 등 동지 규합에 노력했으며, 김청풍으로부터 <독립신문>을 받아 배포했다. 이후 일제 당국이 수사에 착수하자, 그는 곽익호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려 했지만 1920년 11월 4일 사리원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후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분국으로 송치된 그는 12월 2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예심을 받았고, 1921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미결 통산 120 산입)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2년 7월 20일 형 집행 만기로 석방되었다. 1934년 칙령 제20호 제1조에 의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부터 복권되었으며,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불확실하다.[1]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곽선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18일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