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3 21:10:06

국문

1. 鞠問/鞫問2. 國文

1. 鞠問/鞫問

파일:해품133.jpg

국왕의 명으로 역모나 강상범죄등의 중죄인을 직접 심문하는 것으로 사극에서 많이 보는 국청에서 꽁꽁 묶어두고 를 심문, 자백 받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국문이 많이 일어났는데 직접 잡아다가 국문하는걸 나국이라 하였다. 다른말로 추국(推鞠/推鞫)이라 하기도 했다. 국왕이 직접 국문하면 친국(親鞠/親鞫)이라 불렀다. 의금부(義禁府)·사헌부(司憲府)·형조(刑曹) 등이 대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 심문현대의 기준처럼 그냥 물어보는게 아니고 당연히 가혹한 혹형과 고문이 동반되었다. 옛날에는 죄인의 자백을 받아내는 걸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죄가 있든 없든 일단 고문을 했고 거기서 진실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고문에 굴복하여 억지 자백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걸 막기 위해 고문 횟수와 형장의 규격도 일일이 정할만큼 세심했으나 결국 고통을 준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1][2]

때로는 국문을 하면서 가혹한 고문과 곤장으로 인해 심문인들이 죽거나 혹은 풀려나도 장독이 올라 후유증으로 죽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죄인을 무자비하게 두드려 패는것은 아니었다. 취조를 거듭해서 죄가 명백함에도 자백을 하지 않는다 판단했을때 형신을 가하기 시작하여 그 횟수를 늘리는 등 국법에 따라 국문 절차를 진행하였다. 흔히 사극에서처럼 낙형과 압슬, 주리가 남발되는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모죄의 경우 국왕의 꼭지가 돌대로 돌아 국법 따위 휴지 조각이 되어 오히려 사극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참혹함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갑자사화기축옥사 등이 그 대표적 예시다.[3][4]

물론 국문은 어디까지나 자백을 받기 위한 것이지 사람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고문을 할 필요가 없다면[5] 그냥 심문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태종에게 숙청당한 민씨 형제들 모두 국문을 당했지만 민무구, 민무질은 그냥 심문 후 귀양을 갔고, 민무휼민무회압슬등 가혹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 시기를 다룬 사극에서 민무구, 민무질은 고문 안 당하고 바로 귀양을 가고, 민무휼 민무회는 고문 당하는 것으로 나오는 이유다.

여담으로, 역대 조선 국왕 중 최다 친국 기록을 가진 왕은 광해군이다. 조선왕조실록 웹사이트에서 "친국하다"라고만 검색해도 광해군만 총 217건이 나온다. 오죽하면 1614년 장령 배대유가 왕이 지나친 양의 친국을 비판한 적이 있다.#

2. 國文

그 나라의 글자나 그 글자로 쓰여진 글. 한국에서는 보통 한글이나 한글로 쓰인 한국어 글을 의미한다.

구한말 시기에는 한글 자체를 직접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였다.


[1] 하지만 어느 문화권이든지 (전근대적일지라도) 법체계와 사회제도가 잘 구축되어있다면 용의자가 고문으로 거짓진술을 하지 않을 고문량을 체계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옛날사람들도 멍청이는 아니라, 고문을 심하게 하면 엉뚱한 거짓진술이 나올 수 있다는걸 당연히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범의 진술취득에는 상당히 높은 효과를 보였다. 사실 고문으로 인한 거짓자백이 나온다는 것부터가 고문의 효과가 지나치게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짓자백은 고문으로 인한 고통보다, 없는 죄라도 자백해서 그 벌을 받는게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2] 또한 추국 중 고문 그 자체가 야만적이라는 측면보다는, '범인이 아닐수도 있는 용의자에게 가하는 잘못된 제재'라는 측면과, 죄형법정주의에 의거해 '사법재판으로 죄가 확정되지 않은 자에게 먼저 가해지는 벌칙'이라는 측면이 잘못된 것이다. 일례로 비슷하게 전근대적이라는 비판을 듣는 태형싱가포르 등지에서 오늘날까지도 시행되고 있다. 이는 태형이 이미 죄가 확정된 사람에게, 매뉴얼에 맞춰 최대한 공정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고문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3] 갑자사화의 잔혹함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수준이고 기축옥사때는 국법으로 금하던 어린이와 노인에 대한 고문까지도 있었다. 그것도 압슬과 곤장이 가해졌다. 역모죄는 국법에 구애받지 않는다선조의 뜻이었다.[4] 이런 경우에는 애초 진범이 누군지 중요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저 역모를 핑계로 정적들을 줄줄이 엮어서 제거하는데 방점이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강상인.[5] 죄인이 고문도 하기 전에 술술 분다거나, 죄인이 숨기고 있는 정보를 캐내기 보다는 죄인 본인의 의견을 듣기 위해 국문을 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