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도 마제티의 감독직 및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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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10대, 17대, 22대 |
AS 로마 주장 | ||||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1934~1939) | 귀도 마제티 (1939~1943) | 아메데오 아마데이 (1943~1948) |
귀도 마제티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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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도 마제티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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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前 축구감독 | ||
이름 | 귀도 마제티 Guido Masetti | |
출생 | <colbgcolor=#fff,#191919>1907년 11월 22일 이탈리아 왕국 베로나 | |
사망 | 1993년 11월 26일 (향년 86세) 이탈리아 로마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80cm | 체중 80kg | |
직업 | 축구선수(골키퍼 / 은퇴) 축구감독 | |
소속 | 선수 | 엘라스 베로나 FC (1929~1930) AS 로마 (1930~1943) |
감독 | AS 로마 (1942~1943 / 플레잉 코치) AS 로마 (1943~1945) AS 비테베세 (1945~1946) AS 구비오 (1946~1947) 리미니 칼초 (1948~1950) AS 로마 (1950~1951) US 치타 디 팔레르모 (1952) AC 레지아나 1919 (1952~1953) AC 피사 1909 (1954) BPD 콜레페로 (1955~1956) AS 로마 (1956~1957) SS 로물레아 (1958~1960) | |
국가대표 | 2경기 (이탈리아 / 1936~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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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1. 클럽
귀도 마제티는 자신의 고향인 베로나를 연고지로 하는 엘라스 베로나 FC에서 처음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하프백으로 시작했지만 골키퍼로 포지션을 바꾸었다.1926년부터 3년간 주로 후보에 머물렀고, 1929년 세리에 A가 창설되면서 베로나는 1928-29시즌의 성적에 따라 세리에 B에서 시즌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베로나에서 머무르던 마제티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는 데 그것이 바로 새로 창단된 구단 AS 로마의 손짓이었다.
마제티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고, 1930년 9월 28일에 로마에서 데뷔하였다. 그는 쾌활하고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고, 유머감각도 있는 사람이라 새 구단에 쉽게 적응하였고 곧 중심선수로 떠올랐다. 그리고 마제티는 데뷔 시즌에 32경기 28실점, 경기당 실점율 1 이하로 골문을 지키면서 로마는 창단 4년 만에 세리에 A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1939년부터는 AS 로마 역사상 3번째 주장이 되었고, 1941-42 시즌에는 처음으로 로마에 스쿠데토도 안겨주었다. 총 13년간 AS 로마에서 총 339게임을 뛰었고 은퇴할 때에는 단연 역대 출장 순위 1위였다. 그리고 이 기록은 지금도 AS 로마 역대 출장 순위 10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1.2. 국가대표팀
하지만 리그 내에서의 명성에 비해 국가대표팀 출전 기록은 초라하기 그지없는데, 실제 출전 기록은 스위스를 상대로 한 단 2경기에 지나지 않는다. 주로 대표팀에서는 후보 골키퍼로서 역할을 수행했는데, 자신의 첫 월드컵 때에는 은퇴한 줄 알았던 선배가 돌아와서 팀을 우승시켜버렸다. 다음 월드컵에서도 알도 올리비에리에게 밀려 벤치를 지켰고 벤치에서 우승을 지켜보았다.1.3. 감독
감독으로서는 다소 불운한 스타일.1942-43 시즌 중간부터 플레잉 코치로 AS 로마에서 은퇴를 준비했고, 1943시즌에 맞춰 정식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리그가 파행 운영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비테베세와 굽비오 등을 돌아다녔다.
굽비오에서는 세리에 B로 팀을 승격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나름 평안한 감독생활을 보내는가 했다. 그러던 중 1951년, 친정팀이 시즌 중에 감독을 2번이나 바꾸면서 험난한 강등 경쟁을 펼치는 와중에 마제티에게 구원 요청을 했고 그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가 책임진 마지막 5경기에서 3승 1무 1패라는 호성적을 거두었지만 결국 로마의 강등을 막지 못했고 쓸쓸하게 팀을 떠나고 말았다.
이듬해에는 레모 갈리 감독을 해임한 팔레르모에서 다시 구원요청을 보냈고, 이번에는 남은 7경기에서 2승 3무 2패라는 호성적으로 11위를 지켜내며 팔레르모의 강등을 막아냈다.[1]
이후에는 레지아나, 콜레페로 등 여러 팀을 돌아다녔고 길게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전쟁 이후 친정팀에서 감독을 맡은 경기가 총 10경기 남짓일 수준이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마제티는 1930~40년대 세리에 A에서 인정받은 강력한 골키퍼였다. 이탈리아 출신 골키퍼로서는 유일하게 2차 대전 전 월드컵에 두 번 참가했지만 아쉽게 본선 무대를 밟지는 못했다.3. 여담
- 마제티는 월드컵에서 2회 우승을 차지한 20인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브라질의 페페[2]와 더불어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뛴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선수이다.
- 마제티는 1934년 월드컵 우승 멤버 중 최후의 생존자였다. 안젤로 스키아비오의 사망 이후 마제티가 최고령 생존 FIFA 월드컵 우승 선수가 되었으며 마제티의 사망 이후의 최고령 생존 월드컵 우승 선수는 1938년 월드컵 때 뛰었던 피에로 파시나티였다.
4. 수상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 AS 로마 명예의 전당: 2015
4.3. 감독
- AS 구비오 (1946~1947)
- 세리에 C: 1945-46
[1] 당시 팔레르모의 시즌 승점이 36점이고 실제 강등권 팀인 17위 팀 트리에스티나의 성적이 32점이었던 터라 삐끗했으면 팔레르모도 강등당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시즌은 승점 34점짜리 팀이 4개나 있던 역대급 강등 경쟁이었다.[2] 산투스 FC에서 펠레와 더불어 산토스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