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남긴 명언이라 알려져있는 말.당시 저서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를 통해 지동설을 설파하던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문책을 받고 재판정에서 천동설을 긍정했지만, 재판이 끝나고 나오면서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고 말했다 카더라.
진실의 불변성을 역설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나약한 지식인의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래도'에 주목한다면).
하지만, 현실의 역사에서는...
2. 진실
갈릴레이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는 뚜렷한 근거나 신빙성 있는 자료는 없으며 소설가의 창작일 뿐이다.역사학자 스틸만 드레이크에 의하면 갈릴레이에 대한 이 일화는 18세기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바레티의 창작이라고 한다. 바레티는 그의 작품에서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소에서 풀려나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을 내려다보며 발자국을 찍고 저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곧바로 다른 작가들에게 입수되었고, 그들은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소에서 재판이 끝난 직후 혼잣말로 말한 것처럼 재구성했다.
갈릴레이와 가톨릭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으며, 당시 가톨릭에는 지동설을 성직자들의 교육과목으로 삼아야 한다며 갈릴레이를 지지하는 가톨릭 성직자들도 많았다. 갈릴레이 이전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는 가톨릭의 성직자였고, 문제가 되었던 저서인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도 가톨릭의 허가를 받고 출판한 책이다. 당시의 가톨릭은 과학의 수호자(?)로서 유럽 과학자들의 최대 후원자였던 시절이었으며, 당시 교황부터가 갈릴레이의 지지자로서 주변의 성직자들은 지동설에도 관심이 많았다. 재판에 회부된 혐의 또한 갈릴레이의 지지자 중 한명이기도 했던 교황을 천동설 지지자라고 간접적으로 디스했다는 교황청 모독죄였다. 그나마도 갈릴레이가 재판에서 교황청에 대한 모독 혐의를 철회했으므로 지동설 자체에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재판의 후반부는 향후 가톨릭의 과학교육을 어떤 이론으로 할지에 대한 학술토론회 같은 성격도 약간 있었다.[1] 당시 신교 vs 구교 간의 종교분쟁으로 유럽인들이 전쟁으로 수만 명씩 죽어나가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기소이유나 결과나 해프닝 수준의 평화로운 재판(?)이었다. 재판 10년 전후의 종교대립의 광기가 찾아오는 상황이었다면 다소 위험했을 수 있으나, 어쨌든 이 재판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문제는 갈릴레이가 종교이슈를 일으킬만한 행동을 한 것에 비해서는, 자신의 행동이나 이론에 대해서 별다른 증명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어지간한 국가원수에 대한 인격모독죄도 무겁게 다루어지던 시절에 무려 교황이 엮인 인격모독혐의는 교황청에서도 무턱대고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골치 아픈 이슈[2]였으므로 재판은 열려야 했고, 까놓고 보니 갈릴레이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완벽한 해설을 내놓지는 못하는 등의 해프닝이 벌어지자, 갈릴레이도 당시의 과학이론으로는 지동설을 완전히 증명할 수 없음을 재판 도중에 깨닫는 어이없는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다.
참고로, 가톨릭에선 갈릴레이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지동설이 일부 날짜 계산에서 정확하니, 지동설을 성직자의 교육과목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성직자들의 주장도 적지 않았다. 문제는, 갈릴레이가 당시의 과학이론 부족으로 자신의 지동설에 대한 의심을 품고 이를 철회하게 되자, 가톨릭에서 지동설을 교육과목으로 채택하자던 성직자들도 갈릴레이의 이론철회와 함께 재판에서 단체로 할말이 없어져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3]
지구가 둥글다는 건 그 시절에도 이미 종교를 불문하고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의 각종 천문학, 지구과학 관련 이론과 수치 해석을 따져봤을 때 다른 천체들이 지구 주변을 돌고 있다는 계산이 중세를 막 벗어난 당시의 과학이론으로는 더 정확했다. 케플러의 법칙이 발표되기 전까지의 지동설은 원 궤도를 전제했기 때문에 천동설보다 천체 궤도 계산이 더 복잡하고 부정확했다. 즉, 당시까지의 갈릴레이는 그냥 다른 증명과 이론을 제끼고 너무 빨리 결론을 냈던 개인연구자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예시처럼, 오히려 가톨릭 내부에선 지동설에도 찬성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는데도 갈릴레이가 실수를 깨달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순전히 갈릴레이가 주장하는 논리에 대한 이론의 부족 때문에 생긴 문제였던 것이다. 오히려 갈릴레이는 외부에서 데려온 손님이며 교황과 친분있는 사이라서 덜 고생한 편에 속하고, 가톨릭 내부의 지동설 찬성파들이 더욱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2.1. 갈릴레이의 갈등과 재판
다만, 갈릴레이와 케플러가 주고받은 편지를 봤을 때, 갈릴레이가 지동설이 교회나 천동설 지지자들을 자극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4][출처]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일이 자신에게도 벌어질 것이라 생각한 것을 편지의 내용에서 추측할 수 있다.실제로 갈릴레이가 태양 반점에 관한 편지를 출판했을 때, 수도사 로리니가 신학적 관점에 의거해 지적하였고 갈릴레이는 그 지적에 대하여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그 갈등이 결국 종교재판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당시 교황 바오로 5세가 신학자들의 관점을 지지하면서 갈릴레이가 그들의 훈계를 받아들일 것, 그렇지 않으면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가르치는 것과 변호하는 것을 1616년 재판으로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왔다. 다만 바오로 5세가 갈릴레이 연구를 지원했던 점, 그리고 갈릴레이가 신학자들의 훈계에 복종했기에 명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명령은 갈릴레이의 정적이 추가 삽입했을 것이라 역사가들은 추측한다.[6] 이 흐름으로 봤을 때, 갈릴레이와 지동설 일방적으로 박해받은 것이 아닌 과학과 신학의 학술적 충돌로 인한 갈등이 재판으로 이어진 경우로 볼 여지가 생긴다.
이후 과학에 긍정적이었던 우르바노 8세가 즉위하며 갈릴레이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권유로 자신의 지식과 이론을 설명하기 위하여 작성한 책이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이다. 하지만 책이 완성된 후 로마는 책 출판을 금지시켰다.[7] 이후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해 가르치거나 주장하거나 저술하는 것을 금지하는 1616년 재판의 명령을 위반했다 선언받고 1633년 재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게 된다.
3. 응용
- 록맨 & 포르테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그래비티맨이 하는 대사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이다.
-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는 이 명언의 패러디로 여겨진다.
- 네이버 웹툰 베스트 도전 만화에 그래도 행성은 돈다라는 행성 의인화 만화가 있다.
- 뮤지컬 최후진술에서는 엔딩 넘버 제목이다. 해당 곡 가사 중에서도 나온다.
- 김영삼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도 비슷한 맥락으로 쓰였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천문학자 전직 퀘스트를 수행할 때, 갈릴레이가 천문학 연구는 외부의 압력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한다.
- 피터 히스토리아에서는 피에트로가 안드레아에게 '그 사람이 재판 끝난 뒤에 뭐라고 하던가요?' 라고 묻자 '글쎄? 잘 기억 안나는데. 와인 한잔 하고 싶댔나?' 라고 대답하는 장면을 넣어서 해당 명언이 후세에 주작된것임을 고증했다.
[1] 물론, 갈릴레이가 실제로 '지구는 돈다' 라는 말을 했으면 또다른 학술토론회(...)가 열려서 당시의 힘든 재판 문화와 함께 더 귀찮아졌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갈릴레이가 '교황을 천동설 지지자라고 간접적으로 디스했다'라는 죄목은 해명했으니 교황청의 주요관심은 끝난 셈.[2] 다만, 정작 당시의 교황이 갈릴레이의 초기이론의 지지자였기 때문에 갈릴레이의 혐의가 개인한테는 몰라도 토론에서까지 지동설 찬성파한테 약점으로만 작용했을지는 알기 어렵다.[3] 언급했다시피 교황조차도 초기 지동설에 찬동하는 사람이었을 정도이니, 가톨릭의 지동설 지지자들도 적지 않은 숫자였다. 르네상스 이후의 가톨릭은 여러 수도회와 추기경끼리 토론을 하면서 과학이론에 맞춰서 기존의 종교이론을 수정하는 문화가 보편적이었고, 당시의 가톨릭은 유럽에서 각 지방의 유망한 과학자들의 최대 후원자이기도 했다.[4] 갈릴레이가 자신의 걱정을 케플러에게 보냈음에도 케플러가 발표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갈릴레이가 무시한 뒤 시간이 흘러 발표하였다.[출처] 제임스 R. 뵐켈, 행성운동과 케플러, 바다출판사, p. 64 & Karl Von Gebler, Galileo Galilei, p. 26 (1879). https://www.famous-trials.com/galileotrial/1029-galileolettertokepler[6] 이 명령으로 인해서 1633년 재판이 발생된다.[7] 책의 멍청한 천동설 지지자가 우르바노 8세를 칭한다고 하여 교황이 분노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