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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무라 타쿠야 木村拓也 / Takuya Kimura | |
<colbgcolor=#ffffff><colcolor=#000> 출생일 | 1972년 4월 15일 미야자키현 미야자키군 타노정[1] |
사망일 | 2010년 4월 7일 (향년 37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미야자키현립 미야자키미나미고등학교 |
포지션 | 유틸리티 플레이어 (2루수, 외야수) |
투타 | 우투양타 |
프로입단 | 1990년 드래프트 번외 |
소속팀 | 닛폰햄 파이터즈 (1991~1994)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5~2006)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6~2009) |
지도자 | 요미우리 자이언츠 내야수비 및 주루코치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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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SMAP의 키무라 타쿠야와는 이름의 마지막 자만 다른 동명이인인데[2] 나이까지 똑같다.[3]2. 현역 시절
드래프트 번외로 1991년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해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나 2군에서만 머물러야 했고, 출장 기회를 늘리기 위해 강한 어깨를 살려 외야수로 전향했으나 이후에도 간간히 1군에서 얼굴을 보이는 정도에만 머무르다 1995년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트레이드되었다. 히로시마에선 노쇠화가 보이던 쇼다 코조와 노무라 켄지로를 대신할 후보 내야수로써 점찍혀 다시 내야수로 메인 포지션을 바꾼 데 이어 1997년부터 스위치 히터로 전향했고, 1998년부터 백업 유격수로써 1군에서 서서히 출장기회를 늘려가다 2000년에 부상으로 이탈한 외국인 선수 에디 디아스를 대신할 주전 2루수를 맡아 첫 규정타석을 채우고 1군에 완전히 정착했다.주요 포지션은 2루수였지만 내야의 모든 포지션뿐만 아니라 외야수는 물론 데뷔 당시 포지션인 포수까지 소화 가능한, 그야말로 모든 포지션을 다 볼 수 있었던 진정한 유틸리티 플레이어에[4] 스위치 히터라 활용 범위가 매우 넓은 선수였다. 타격에서도 출루율은 높지 않았지만 2할대 중반 내외의 타율에 두 자릿 수 홈런과 도루를 기대할 수 있는 나쁘지 않은 장타력과 주력을 보여주며[5] 나름대로 활약했고, 그 덕분에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백업 멤버로 선발되었다.[6]
그러나 2004년부터 추간판 탈출증과 요통을 겪으며 주전에서 밀려났다가 마티 브라운 감독이 취임한 2006년엔 아예 2군에서만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결국 출장 기회를 찾아 시즌 도중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 요미우리에선 니시 토시히사의 이적으로 공백이 된 주전 2루수를 맡으며 다시 부활에 성공했고, 요미우리가 2007~2009년에 3년 연속 센트럴리그 제패에 이어 2009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는 데 유틸리티 플레이어로써 톡톡히 공헌했다. 현역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9년에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홈경기에서 10년 만에 포수 수비를 보기도 했는데, 당시 주전포수였던 아베 신노스케와 백업포수 츠루오카 카즈나리[7], 카토 켄[8]이 모두 교체되는 바람에 더 이상 쓸 포수가 없어서 포수 경험이 있던 키무라가 비상용 포수로 황급히 나서게 된 것이었다.
2009년을 끝으로 통산 1523시합 출장, 1049안타 53홈런 280타점 103도루의 기록을 남긴 채 현역에서 은퇴했고, 곧바로 1군 내야수비 및 주루코치로 취임해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3. 갑작스런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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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5년 후인 2015년 4월 7일, 키무라가 쓰러졌던 자리에 헌화를 바치는 오가타 코이치 감독(왼쪽)과 하라 타츠노리 감독(오른쪽) |
그런데 코치 취임 후 본격적으로 정규시즌을 맞이한 지 1주일밖에 안 되었던 2010년 4월 2일, 키무라는 마츠다 줌줌 스타디움에서 열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원정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에게 펑고를 쳐주다가 급성 뇌출혈로 쓰러져 급히 히로시마대학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5일 후인 4월 7일에 사망했다.[9] 향년 37세.
현역 시절부터 그를 높이 평가하던 하라 타츠노리 감독은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인터뷰 도중 눈물을 참지 못하고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다.
사망 당일인 4월 7일엔 일본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는 모든 구장에서 경기 개최 전 조기를 올리고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고, 4월 10일에 히로시마시에서 장례식 및 고별식이 진행된 데 이어 4월 24일 도쿄돔에서 열린 요미우리와 히로시마의 경기에서 이별회 및 추모경기가 개최되었다. 경기 시작 전 열린 추모 세레머니에서는 키무라의 장남이 아버지의 유니폼을 입고 나와 시구식을 가진 데 이어 양팀 팬들이 다 함께 구장에서 CD음원으로 재생되는 요미우리 시절 키무라의 응원가를 부르며 그의 넋을 기렸고, 이날 경기에선 요미우리가 8회 말에 생전 절친이었던 타니 요시토모의 역전 만루홈런으로 7:4로 이기며 키무라의 영전에 승리를 바쳤다.[10]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던 前 삼성 라이온즈 감독 김한수와도 인연이 있었는데, 김한수는 한국에 오면 자신이 밥을 사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1] 2006년에 미야자키시에 편입되었다.[2] 마지막의 '야'를 SMAP의 키무라 타쿠야는 哉, 야구선수 키무라 타쿠야는 也로 쓴다.[3] 그래서 이 SMAP의 키무라 타쿠야와 토크쇼에서 서로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데, SMAP의 키무라 타쿠야가 히로시마의 경기를 볼 때마다 전광판에 표시되는 이름과 아나운서의 풀네임을 듣고 자신이 야구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참고 그런데 이 유사한 이름 때문에 사망 당시 기레기들이 SMAP의 키무라 타쿠야가 죽은 것처럼 낚시 기사를 쓴 씁쓸한 일도 있었다.[4] 선수 시절의 수비 출장 횟수는 1루수 39경기, 2루수 769경기, 3루수 61경기, 유격수 91경기, 외야수 539경기, 포수 5경기로, 실질적으로는 2루수와 외야수 위주로 뛰었고 나머지 포지션은 1군에 막 정착한 초창기에 맡았던 유격수를 빼면 볼 사람이 도저히 없을 때 간간히 보는 수준이었다.[5] 커리어하이 타율 및 OPS는 2000년의 .288/.737이었고, 2번의 10홈런 시즌(2000년 10홈런, 2003년 13홈런)과 4번의 10도루 시즌을 기록했다. 다만 주루 센스가 좋지 못해 도루 성공률이 50%를 간신히 넘긴 해도 있을 만큼 나빴던 것이 흠이었다.[6] 대표팀에서는 이택근과 유사하게 포수 경험을 살려 불펜 포수를 맡기도 했다.[7]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3팀을 떠돈 저니맨 백업포수로, 현역 말년에 뛴 한신에선 오승환의 전담 포수로 유명했다.[8] 2012년 일본시리즈에서의 헐리우드 액션으로 알려진 선수. 이 경기에선 머리에 사구를 맞는 바람에 교체되었다.[9] 야구장에 들어가기 전에 구단 관계자에게 "올해 들어 먹는 양은 변하지 않았는데 체중이 줄고 있다. 요통도 있고, 두통도 심하다. 당장 어제도 2시간밖에 못 잤다."라고 컨디션 불량을 호소했다고 한다.[10] 경기 종료 후의 히어로 인터뷰에서 타니 또한 생전의 키무라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