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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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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원3. 한국 정부 개입의 시작
3.1. 기지 폭력 사건3.2. 기지촌의 제도화
3.2.1. 특정지역 지정3.2.2. 성병 관리의 제도화3.2.3. 한미친선협의회3.2.4. 요약
4. 문제점
4.1. 현재 경과

1. 개요

基地村

한국의 마을 형태 중 하나. 정책적·전략적·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주둔하는 병영(兵營)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서비스업 중심의 생활권을 형성하는 군사취락. 한국에서는 주로 주한미군의 주둔기지 근처의 촌락을 의미하는 편이다.

2. 기원

이 기지촌이 생긴 이유는 미군 기지로 인한 경제 활동에서 기인한다. 대규모 인원이 집단 거주하는 군 기지의 특성상 이로 인해 경제 활동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1990년대 이전만 해도 미군 장병들의 경제력은 당시 한국의 1인당 경제력을 크게 상회했으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업이 등장하게 되었다. 즉 부대의 민간 위탁 사업에 종사하거나 미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 기지촌의 시작이다. 기지촌으로 유명한 곳으로는 미군부대가 위치한 서울 용산구, 파주, 평택, 동두천, 의정부, 부산 동구, 대구 남구, 인천 부평구, 창원 진해구, 평택, 군산, 칠곡 등이 있다.

3. 한국 정부 개입의 시작

3.1. 기지 폭력 사건

전후 미군기지 주위에서는 미군으로 인한 폭력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단적으로 1957년 1월에는 미군에 의해 민간인 소녀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고, 4월에는 흑인병사가 파주에서 강간 살인한 사건이 있었다.[1]
미군의 린치, 총격 등으로 인한 한국인의 인명 피해 사건은 1962년에는 102건이었던 것이 다음 해에는 157건으로 크게 증가하는 추세였다.[2] 이는 반공을 중시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 유대 공고 등을 강조한 군사정부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3]

3.2. 기지촌의 제도화

기지 폭력 사건을 이후로 기지촌의 관리/통제를 둘러싼 제도가 만들어졌다.

3.2.1. 특정지역 지정

성매매 지구를 일반인 거주지구로부터 분리해 시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962년 6월 법무부·내무부·복지부 등이 합동으로 전국 104개소를 성판매를 허용하는 특정지역으로 지정하였다. [4]정부는 설치목적 가운데 하나를 "외국 군인 주둔지역의 특수사정 해결"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혔다. 특정지역을 통해 안정적으로 성병을 관리하고, 관광수입을 올리려고 한 것이다.[5]
정부는 '특수관광협의회'를 만들어 기지촌 시군마다 설치하였고, 미군과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외국인 대상 유흥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하였다. 군사정부는 1961년 8월 22일 '관광사업진흥법'[6]을 제정하고 시행했는데 관광업이 중요한 발전수단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관광객 유치보다는 주한미군의 달러 지출에 큰 관심을 두었다. 이를 반증하듯 1970년 2월 기준으로 정부에 등록되었던 관광휴양업체 354개소 중 '빠'가 304개소로 대부분이었다.
기지촌에서 주한미군이 지출하는 달러는 결코 적지 않았다. 단적으로 1969년 대한민국 전체 수출액이 6억 2,200만 달러였는데 미군 주둔으로 획득한 외화는 직접 군납 1억 달러와 불법 PX 경제 등을 제외하고도 연간 1억 6천만 달러라고 경제기획원 장관이 1970년에 답변한 바있다.[7] 이는 획득한 전체 외화의 20 %에 가까운 수치였다.

3.2.2. 성병 관리의 제도화

60년대 기지촌 성판매 여성들은 성병진료소 또는 보건소에 등록되어 검진을 받았는데, 이들 진료소 개설과 검진, 치료는 미국의 원조로 가능했다. 미국 정부가 이를 지원을 한 이유는 성병으로부터 미군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성병진료소에서 검진을 받지 않고 검진증 없이 다니다가 미군 헌병에게 적발될 경우에는 즉결 처분과 수용소 수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8] 기지촌 여성의 신체에 대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성병을 예방하고자 한 것이다.
수용과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요보호자 규정'이다. 쿠데타 세력의 첫 번째 행정조치로 만들어진 '윤락행위방지법'에는 "윤락행위의 상습이 있는 자"와 "환경 또는 성행으로 보아 윤락행위를 하게 될 현저한 우려가 있는 여자"를 "요보호 여자"로 통칭하고, 직업보도를 명분으로 이들을 격리수용하는 보호지도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9] 이곳이 바로 부녀보호지도소이고, 1961년 서울에서 시작하여 1970년까지는 전국에 31개의 부녀보호지도소가 만들어지고, 1990년대 중반까지 22개소가 유지되었다.[10] 앞서 말한 경찰 단속에 검거된 기지촌 여성 중 일부는 다른 요보호 여자들과 함께 이 시설에 수용되었다.
다른 대부분의 여성들은 성병관리소에 수용되었는데, 이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낙검자 수용소 문서에 자세히 다루어져있다.

3.2.3. 한미친선협의회

60년대 초반 기지 폭력 사건은 미국/주한미군에 대한 불신이 쌓이게 만들었고, 평등한 SOFA 체결을 요구하는 서울대와 고려대 등 대학생들의 시위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양국 모두 기지와 기지촌에 대해 본격적으로 개입을 하기 시작했고 1966년 7월 9일 한미행정협정(SOFA)이 체결돼 이듬해 2월 9일 발효되었다. 한미친선협의회는 한미 각 1인의 위원장과 총 10여 명의 위원으로 이루어져 시장, 경찰서장, 교육장, 안기부 조정관, 한국특수관광업협의회장, 병원장 등이 한국 측 위원으로, 사령관, 헌병 참모 등 고위군인들이 미국 측 위원으로 선임됐다. 미국 측 위원으로는 사령관, 헌병참모 등 고위군인들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성판매 여성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포함해 기지촌에 대한 정부의 관리/통제를 제도화하였다.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분명히 기지촌의 관리와 통제에 대해 동시에 인지하고 모든 불합리하거나 비인도적인 정책들을 시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1]

3.2.4. 요약

한미친선협의회, 특정지역, 성병진료소, 부녀보호지도소, 성병관리소 등 일련의 제도들은 안정적인 기지 주변 한미관계의 조정과 미군을 위한 성판매 여성의 성병 관리를 위해 기지촌을 한국 사회에서 고립된 게토로 변화시켰다. 이는 장기적으로 70년대 이후 기지/기지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한 제도적 기초였다.[12] 1961년 정해진 '특정지역'은 70년대에도 실질적으로 유지됐으며, 총기사고-범죄/폭행-토벌로 이어지며 기지촌을 게토화시켰다.
1960년대 이래 한국사회는 내재화된 외부, 외재화된 내부를 절단해 안정을 추구하였고, 기지와 성판매 여성을 향한 부정적 시선과 기지촌의 게토화를 통해 대다수는 안정감을 누리게 되었다. 2014년에야 국가배상소송이 전개되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기지촌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이 변하지 않은 이유는 한국 정부와 미군, 그리고 냉전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기지촌 외부의 사회 안에서 그들을 게토화시킴으로써 안정을 누렸던 '국민'들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13]

4. 문제점

대다수의 기지촌들[14] 등이 구조 특성상 외부와 단절되어 있고, 주둔 중인 미군들도 인간이기에 성욕을 해소 해야 했으므로 양공주와의 성매매가 이루어져 성매매가 하나의 외화 벌이 수단이 되어 대규모 집창촌의 구색을 띄었었다. 이후 알려진 사실로는 기지촌 속 포주들이 정부를 등에 업고 여성들을 속이거나 기지촌으로 강제로 데리고 와 여성들에게 매춘 행위를 강요한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 낙검자 수용소 문서 참조.
한국 정부는 공창제가 폐지되었고, 윤락행위방지법[15]이 있었음에도 한미친선위원회에서 성병 검사를 받은 여성에 한해 성매매를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단순히 주한미군의 특수사정 해결이라는 명목으로 한국 여성들의 인권을 내어준 것이다. 기지촌 여성의 성판매부터 문제이지만, 성병의 검진뿐만 아니라 치료와 수용까지 정부와 미군의 협조로 강제로 집행한 것이 중요한 점이다. 성병에 대한 단속은 1960년대 말까지도 법적 규정이 명확하지 않은 조건에서 시행되었다. [16] 또한 당시 주한미군 다니엘 스털키 중사가 신문에 독자투고한 내용에는 문산 소재 보건소에서 무료검진이 원칙인데도 매번 300~600원씩 금품을 요구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17]

4.1. 현재 경과

2022년 9월 29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정부가 1950년대부터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조장하고 운영에 관여한 점을 인정하고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정부가 배상을 하라고 판결했다.#




[1] 「또 미군이 함부로 총질. 중상 입은 소녀 얼마 후에 절명」, 『조선일보』 1957. 1. 16,「파주서 발생한 강간살인사건. 용의자는 흑인병사, 미군 측서 체포보류 요청」, 『조선일보』 1957. 4. 30.[2] 「과연 쏴야만 했나―기지촌의 실태를 본다」, 『동아일보』 1964. 2. 1.[3] 김원. (2015). 60~70년대 기지촌 게토화의 변곡점 : 특정지역, 한미친선협의회, 그리고 기지촌정화운동. 역사비평. 155-156[4] 「특정지역을 설치」, 『경향신문』 1962. 6. 12; 「윤락여성들의 적선지역을 설정」, 『경향신문』 1962. 7. 7.[5] 문산 지역 기지촌 상황에 관해서는 박정원, 「汶山: 特輯 韓國과 美國, 美軍部隊周邊」,『신동아』 9월호, 1966, 287쪽 참조[6] 윤락행위금지법 공포 3달 전에 관광산업진흥법이 제정된 것으로 보아 정부는 사실 매매춘 종식에 큰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캐더린 문, 『동맹 속의 섹스』, 삼인, 2002, 74쪽[7] 「미군 감축과 기지촌」, 『동아일보』 1970. 7. 17; 성영소·장봉진, 앞의 글, 130쪽[8] 김원, 앞의 글, 161쪽[9] 김원, 앞의 글, 161쪽[10] 「윤락여성 보호지도소를 신축」, 『동아일보』 1963. 1. 22.[11] 김원 앞의 글, 163-164[12] 김원, 앞의 글, 164쪽[13] 김원, 앞의 글, 173, 177[14] 용산기지이태원, 부산기지의 텍사스 거리, 캠프워커대명동, 봉덕동, 평택기지오산기지의 기지촌, 군산기지의 아메리카타운[15] 공식적으로 성매매를 금지하는 법률로 1961년에 만들어져 2004년까지 적용되었음. 현재는 성매매방지법.[16] 「성병치료 의무화」, 『동아일보』 1969. 8. 12.[17] 「위안부 등치는 진료소」, 『동아일보』 1969. 5. 17. 그 밖에도 매월 2,000원의 검진료를 받거나 검진료 80원이라는 가격표를 붙이기도 했다. 「서울 새풍속도 192. 외국인촌」, 『경향신문』 1971. 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