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조길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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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0년 9월 11일 |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양촌정 (現 광주광역시 북구) | |
사망 | 2005년 4월 11일 (향년 95세) |
광주광역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본관 | 김해 김씨 |
직업 | 독립운동가 |
가족 | 가족관계 |
학력 | 광주고등보통학교 (現 광주제일고등학교) |
서훈 | 건국포장(1982년) 수훈,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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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10년 9월 1일에 태어났고, 2005년 4월 11일에 사망했다.2. 생애
광주(光州) 출신이다.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 1926년 11월 3일 당시 광주 부동정(不動町) 소재 최규창(崔圭昌)의 하숙방에서 장재성(張載性)·왕재일(王在一)을 비롯한 광주고보·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 연구, 식민지 노예 교육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동회의 운영은 월회비 10전,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여서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와 동지포섭 등으로 조직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1927년 3월에 회원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었음으로 회원 정남균(鄭南均)의 집에 모여 성진회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해 나갔다.
1928년 6월에 그는 광주고보생 이경채(李景采)에 대한 학교측의 퇴학처분에 대해 복교운동을 펴기로 결정하고 동교생 임주홍(林周弘)·최규창 등 2·3·4학년생들과 힘을 모아 학교측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한편, 동맹휴교를 결의 지도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년 7월, 최규창의 하숙방에 동지들과 모여 맹휴대책 중앙본부를 설치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학부형 및 학우들에게 발송하였다. 이렇게 맹휴를 지도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무렵 광주학생계는 성진회 해체이후 분산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29년 6월에 동경(東京)에서 돌아온 장재성의 주장에 의하여 광주시내 각학교 학생지도자들은 그의 집에 모여 비밀결사〈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하였다. 한편 〈독서회중앙본부〉는 독서회원의 목적 수행을 위한 재정 활동으로 소비조합을 설치하였는데 이 때 그는 운영자금으로 500원을 출자하였으며 소비조합의 영업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항일활동을 계속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도 성진회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일경의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