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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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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g.khan.co.kr/book1-1.jpg
본명 <colbgcolor=#ffffff,#191919>장지락(張志樂) / 장지학(張志鶴)
이명 유청화(劉淸華), 이철암(李鐵岩), 한국유(韓國劉)
유한평(劉漢平), 유금한(劉錦漢)
본관 인동 장씨
출생 1905년 3월 10일
평안도 용천군 북중면 하장동[1]#
사망 1938년 10월 19일 (향년 33세)
직업 항일운동가, 군인, 공산당원, 시인
종교 개신교 - 무종교
학력 신흥무관학교, 황포군관학교
조직 고려공산당, 중국공산당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일본 유학2.3. 만주에서 황포 군관학교2.4. 중국에서의 활동
3. 회고록: 《아리랑4. 여담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때 신흥무관학교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

중국공산당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앞장섰다. 이 외에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2. 생애

2.1. 초기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하장동 출신으로 본명은 장지락(張志樂) 또는 장지학(張志鶴)이었다. 11세 때인 1916년에 가출해 친구나 친척네 집에서 지내며 공부를 하다가 중학교 입학 시험을 쳤으나 불합격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먼저 가출했던 둘째 형을 만나 형네 집에 가서 얹혀 지내며 살았다. 이후 중학교 입학 시험을 다시 보아 합격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했고, 1919년 중학교 시절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3일간 구류되었다.[2]

2.2. 일본 유학

김산은 둘째 형이 준 돈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김산은 친구 한 명과 함께 방을 빌려 매일 아침 신문을 배달하는 일자리를 구하면서 도쿄제국대학에 응시할 준비를 했다. 김산은 학교가 끝나면 매일 4시에 일을 했고, 일본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헌 책을 사기도 했다. 일본에 있는 부유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김산과 같은 힘들게 일하는 부류의 유학생들을 '룸펜 프롤레타리아'[3]라고 부르면서 놀렸지만, 김산과 그의 친구들은 오히려 부유한 한국인 유학생들을 '달걀 껍데기'[4]라고 부르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산은 일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일제 군경과는 달리 글로벌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놀랐다.

1923년 관동 대학살을 목격한 김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일본 대신 중국으로 갔는데, 김산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5] 김산은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소련으로 가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6]

2.3. 만주에서 황포 군관학교

1920년 겨울 상하이에 도착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의 교정과 식자로 활동했다. 1921년 일본을 거쳐 잠시 지내다가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쑨원이 세운 황포 군관학교와 중산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했다.

2.4. 중국에서의 활동

1922년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운 것을 계기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했다.

1925년 7월 광저우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하고 1925년 중국 대혁명에 참가, 다음해 조선혁명청년동맹 조직위원회의 기관지인 《혁명동맹》 부주필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민족연맹을 결성했다.

1926년 오성륜, 김성숙 등과 함께 광저우 폭동(광둥 코뮌)에 참가하였다.

1927년에는 황포 군관학교에서 교관을 맡았다.

1927년 하이루펑에서 펑파이가 폭동을 일으키고 하이루펑 소비에트를 건설하자 동참했다. 펑파이가 '칠살령'을 발표하며 학살을 선동하자 지주들을 학살하는 인민재판을 주도한 전력이 있다.

1929년 중국공산당의 요청으로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있으면서 8월의 조선혁명청년연맹 대표대회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주와 화북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고 다음해 4월에 풀려났다.

이어 공산당 북부 지구 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결혼해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했다.

1938년 캉성의 지시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여기엔 민생단 사건도 영향을 주었다.

1983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에서 김산이 일본의 간첩과 사상 변절자라는 근거가 없고, 올곧은 인물이었음을 인정받아 사후 45년 만에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3. 회고록: 《아리랑

그의 삶이 이렇게 자세히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1937년 말, 미국인 작가 님 웨일스[7]를 만나 3개월 동안 20여 회에 걸친 구술을 통해 그의 혁명적인 생애를 다룬 《아리랑의 노래》의 초고가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된 덕분이었다.
파일:external/img.hani.co.kr/02615345_20050805.jpg
원작 표지

1941년 뉴욕에서 출판되었고, 이후 한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4. 여담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에 김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200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 기념식 때 중국에 사는 그의 외아들 고영광[8]을 초청했다. 2018년 8월 15일에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중한국대사관에서 열린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여했다.

김산의 생애와 명예 회복 과정을 팟캐스트 방송 이이제이에서 100회 특집으로 다루었다.


[1] 인근의 북현동, 동양동, 동송동, 원송동, 추정동, 진흥동, 수봉동, 가성동과 함께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2] 그러나 김산은 3.1 운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1919년 어느 가을날, 조국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조국을 원망했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투쟁의 함성으로 바뀔 때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조선은 평화를 원했으며, 그래서 평화를 얻었다. 저 평화적 시위가 피를 뿌리며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난 이후에. 조선은 멍청하게도 세계 열강을 향하여 국제 정의의 실현과 민족자결주의의 약속 이행을 애원하고 있는 어리석은 늙은 할망구였다. 결국 우리는 그 어리석음에 배반당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조선 땅에 태어나서 수치스럽게도 이와 같이 버림받은 신세가 되어 버렸을까? 나는 분개했다. 러시아와 시베리아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모두가 싸우고 있었고, 또한 이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롭게 쟁취하였다. 나는 그곳에 가서 인간해방의 비책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 후에 돌아와서 만주와 시베리아에 있는 200만의 조선 유민들을 지도하여 조국을 탈환하겠다고 생각했다." 출처: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3] 가난하고, 일하며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는 뜻으로 쓰였다.[4]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말랑말랑하다는 뜻으로, 옛 조선 노동자들이 양반 계급들을 부르던 말이었다.[5] 다만 김산은 후술하듯이 이미 1920년부터 중국에서 지낸 기간이 더 많았다. 관동 대학살이 일본 생활을 포기하는 데 있어 결정적 계기가 됐을 뿐이었다.[6] 원래 무정부주의자였지만 이때는 이미 공산주의로 전향한 시점이었다.[7] 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우이다.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이자 마오쩌둥중국공산당 간부들을 직접 만나 서구권에 중국 혁명을 알리는 데 기여한 에드거 스노우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8] 아버지가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써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처형당했을 때, 아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걱정한 어머니가 아들의 성을 고려에서 따온 고씨로 바꾸었다. 이후 성장한 고영광은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수년 동안 애를 썼는데, 그는 1979년부터 후야오방 전 공산당 총서기에게 두 차례 편지를 보낸 것을 포함해 지도자들에게 탄원서를 썼다. 이후 이루어진 수년 간의 조사 끝에 마침내 당시 처형이 잘못되었다는 발표를 이끌어냈고, 1983년 1월 27일에 중국 공산당이 김산의 혁명 공로를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