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흥 金淳興 | |
창씨명 | 가네모토 준쿄 金本淳興 |
출생 | 1910년 12월 28일 |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사망 | 1981년 10월 26일 (향년 70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 167-2 자택 | |
본관 | 광산 김씨 |
직업 | 기업인 |
가족 | 조부 김홍기(金弘基) 아버지 김윤석(金潤錫), 어머니 송은석 부인 배동수 장남 김사익, 차남 김사복, 장녀 김옥경, 차녀 김희경, 3남 김사홍(金士鴻), 3녀 김선경, 4남 김사준, 4녀 김양경, 5녀 김미경, 5남 김사원, 6남 김사성[1] |
상훈 | 일본 제국 훈장 감수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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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자본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 배우인 이지아(본명 김지아)의 친할아버지이다.2. 생애
1910년 12월 28일 경기도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경성부에 거주하는 대지주로서 경기도 파주군 지역에 논 389 정보와 밭 75정보를 소유했으며, 1937년 6월 말경 소작인 750여 명을 두고 있었다. 1940년 무렵 1년 소득이 11만 원이었는데, 현재 시가로 약 110억 원이다.[2]2.1. 친일 행적
그는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국방 관련 단체에 헌금을 기부했다. 그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내역은 다음과 같다.- 1933년 8월 조선나예방협회 기금으로 1,000원을 냈다.[3] 1934년 6월 29일 조선중앙일보 감사역을 맡았다.
- 1936년 2월부터는 합자회사 구정상회 사장으로 있었다. 이때 교하간이교(校河簡易校)를 지을 땅을 1,500평을 기부하였다.
- 1936년 7월부터 금융신탁회사인 우익상사 취체역으로 있었다.
- 1937년 7월 22일 국방헌금 1만원(현재 가치 10억원 정도)을 종로경찰서에 헌납했다. 그는 "나라에 대한 봉사의 뜻을 표하고자 적은 돈이나마 바치오니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 1937년 조선군사후원연맹 사업비로 2,500원을 냈으며, 같은 해 9월 5일 결성된 '경기도내 군기헌납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비행기 대금 500원을 냈다.[4] 반일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일선융화'를 내걸고 결성된 동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 1939년 9월 주식회사 쇼와직물을 설립하여 사장을 역임.
- 1940년 9월 중앙연료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다.1943년 8월 징병제 실시에 감격하여(…)[5] 국방헌금 3,000원을 헌납했다.
- 1944년 4월 일본 정부가 주는 감수포장을 받았다.
- 해방 이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5년 12월 대한경제보국회 감사를 맡았다.
- 1948년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이 지목한 숙청대상 친일 인사들 명단초안에 이름을 올랐다.
2.2. 사망
1981년 10월 26일에 향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동아일보 1981년 10월 28일자에는 “학교법인 이화학원 이사 김순흥이 새벽 4시 50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 167-2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장례는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이화학원장으로 거행된다고 밝혔다. 이 주소는 1937년 7월 22일 일제강점기 종로경찰서에 국방헌금 1만원을 헌납했던 주소와 성명이 일치한다. 1948년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 2009년 친일인명사전 경제부문에 선정되었다.3. 여담
한때 이 사람의 손녀로 인해 이 사실이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가 되자, 이 사람의 외손자(이지아의 고종사촌 남동생)는 "친일을 한 것이 아니라 세금을 뜯긴 것"이라고 sns상에서 주장했다가 논란이 되자 글을 삭제했다.관련 기사사실, 이 사람의 손녀가 유명 연예인이란 사실이 밝혀진 것은 네티즌의 뒷조사가 아니라 당시 소속사의 언플이 화근이었다. 이지아의 할아버지가 덕망 있는 자산가라는 사실이 매스컴에 공개되자, 어느 네티즌이 호기심에 검색을 했다가 이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하지만 해당 네티즌의 글은 순식간에 삭제되었고, 이후 억울함을 토로하는 글을 오늘의유머에 올려 파장이 커졌다. 이 일로 인해 과거가 알려진 게 없어 외계인설이 나돌 정도로 신비하고 고상한 이지아의 이미지가 곤두박질쳤으며, 이후 한국 연예계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혼으로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서태지와의 이혼 관련 사건들로 이후 2020년 10월 펜트하우스 시리즈의 심수련 역으로 나올 때까지 나오는 작품들마다 외면받았다.
흔히 이지아의 리스크는 그녀의 조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조부보다 더 큰 리스크는 그의 부친이다. 부친 김사영은 희대의 난봉꾼이자 사기꾼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김사영은 결혼 초 당대 최고의 모델이었던 유혜영과 바람이 나서 임신중절 수술을 시켰는데 수술비를 집사람 몰래 마련하기 위해 작은 형으로부터 돈을 빌렸다고 한다. 물론 안 갚았다고 한다. 유혜영은 이후 국내 최고의 액션 배우 중 한 명인 나한일과 결혼했는데 김사영은 몇 년 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한일이가 아무리 검도의 달인이라고 해도 막싸움에서는 나를 못 이기지"라며 허풍을 떨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김씨 친구들은 모두 "유혜영의 남편이 그 사실을 몰랐기에 망정이지 만약 알았다면 김사영은 뼈도 못 추렸을 것"이라며 모두 김사영을 걱정했다고 한다.
김사영은 실제로는 겁이 많고 싸움도 잘 못했다고 한다. 싸울 때에도 우산이나 소주병 같은 물건에 의존해서 했지 주먹으로 맞짱을 뜬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김사영은 유혜영 외에도 여러 명의 여성들과 염문, 아니 추문에 휘말렸는데 그래도 미모로는 유혜영이 단연 군계일학이었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김사영의 사기 수법은 매우 단순하다고 한다. 부친 김순흥의 토지를 미끼 삼아서 돈을 빌리고 안 갚는 것이다. 김사영은 친일파로 알려진 부친 김순흥으로부터 상속 받은 토지의 개발권을 주겠다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수십억 원을 빌리고 갚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경우 보통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새로 돈을 빌려 이전에 빌린 사람의 돈을 돌려막기 하는 게 일반적인데 김사영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빌린 돈은 절대로 갚지 않는 게 김씨의 철칙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부친 김순흥으로부터 상속 받은 토지는 김사영 본인이 단독으로 상속 받은 토지가 아니라 다른 형, 누나들과 공동으로 상속 받은 토지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마치 자기 단독 소유인 것처럼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썼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동일한 토지의 개발권을 주겠다며 복수의 지인들로부터 돈을 빌리기도 했다. 물론 모두에게 단 한 푼도 안 갚았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는 참 공평하다.
김사영으로부터 큰 사기를 당한 지인 중에는 그와 가장 친한 친구인 오OO도 있었다. 오씨는 김사영으로부터 받지 못한 돈이 수억 원에 이르는데 현재 암 투병 중이다. 오씨에 대해 김사영은 종종 지인들에게 "오OO이 오늘 내일 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그 돈을 갚느냐"며 우정보다 돈이 소중한 본인의 인생 철학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고 한다.
오씨에 따르면 김사영은 자기 형과 누나들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를 종종 하고 다녔다고 한다. 큰 형에 대해서는 "타고난 사기꾼"이라고 욕하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그 형으로부터 사기 수법을 전수 받기 위해 큰 형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OJT를 받은 것이다. 큰 누나에 대해서는 "돈에 환장한 미친년"이라고 욕하고 다녔지만 정작 본인이 급할 때에는 큰 누나를 가장 먼저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큰 누나는 말로만 위로해줬지 실제로 돈을 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 외 다른 형, 누나들에 대해서는 "다들 멍청해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했다고 오씨는 전한다.
[1] 출처: 서울고등법원 1984. 2. 22. 선고 82구399 판결 [법인세등부과처분취소], 7남 김사영[6]
손녀 김지아[2] 1정보는 3000평이다. 즉 140만평의 논밭을 소유했다는 것이고, 평당 70만원으로 계산하면 1조원이 넘는다.[3] 현재 시가로 약 1억 원이다.[4] 당시 군용기 가격이 1대 75,000원이었다.[5] 징병제 실시가 좋아서 감격한 게 아니라 이전에는 조선 출신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관생도 이외는 군입대를 배제시켰으나 이후로는 '내지인'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겠다는 정책이었다. 일제는 1946년부터는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는 방안 또한 검토하였다.근데 1945년에 망했어요
손녀 김지아[2] 1정보는 3000평이다. 즉 140만평의 논밭을 소유했다는 것이고, 평당 70만원으로 계산하면 1조원이 넘는다.[3] 현재 시가로 약 1억 원이다.[4] 당시 군용기 가격이 1대 75,000원이었다.[5] 징병제 실시가 좋아서 감격한 게 아니라 이전에는 조선 출신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관생도 이외는 군입대를 배제시켰으나 이후로는 '내지인'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겠다는 정책이었다. 일제는 1946년부터는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는 방안 또한 검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