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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운(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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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저서4. 기타

1. 개요

金容雲
1927년 9월 6일 ~ 2020년 5월 30일 (향년 92세)

대한민국수학자로 1927년 일본 도쿄시 출생. 본적지는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이다. 수학 관련 대중 서적 집필로 1980년대 - 2000년대까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수학자로 여겨졌다. 수학 이외에도 다양한 학문에도 관심이 많아서 역사와 철학 분야와 관련한 여러 저술을 남겼고, 역사 관련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다양한 학설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2019년 3월 11일에는 김용운의 역습이라는 채널을 만들어 역사, 언어, 사회정치철학 등등의 이야기들을 풀고 설명하는 등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이어갔지만 2019년 6월 28일을 마지막으로 새로운 영상을 업데이트하지 못하고 2020년 5월 30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2. 상세

재일 조선인의 자손으로 태어난 그는 일본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고, 일본 와세다대학 광산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광복으로 부모를 따라 귀국하여 광주광역시에 있는 조선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교원 시험에 합격하여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30세에 유학을 떠나, 미국 오번 대학교에서 석사, 캐나다 앨버타 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위상수학이었다. 그 후에는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조교수, 일본 도쿄대학고베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하였다.

이후 1969년에 귀국하여 한양대학교 수학과 교수 및 명예교수로서 동 대학의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양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으며, 1970~1990년대까지 김영사에서 출판한 '재미있는 수학여행' 등 수학 관련 대중서를 많이 써서, 기성세대에서는 조경철 박사[1]와 함께 꽤 유명한 이공계인이다. 심지어 본인이 감수한 웅진 씽크빅 수학의 원래 이름은 웅진용운수학이었으며, 2000년대까지 학습지 첫장에 '김용운 선생님의 수학이야기'가 실렸다. 1990년 7월 9일부터 10월 18일까지 한겨레신문에 '즐거운 산수여행'이란 칼럼을 연재했다.

일본에서 출생하고 수학하였기 때문에 일본통으로도 유명하다. 9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인기있었던 노구치 유키오[2]의 '초학습법' 시리즈는 김용운이 도쿄 키노쿠니야서점에 들렀다가 선 자리에서 다 읽어버린 후 번역을 결심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문화를 소개하거나 한국 문화와 일본 문화를 비교하며 비평하는 여러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전체 세대를 통틀어 대중적인 인지도는 다른 동명이인보다 훨씬 높으나, 서브컬처 특화적인 엔하위키 시절에 동명이인 두 명(김용운(야구), 김용운(도사랜드))보다 나중에 문서가 만들어졌다.

2020년 5월 30일 오전 5시에 향년 93세를 일기로 숙환이었던 폐암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망 얼마 전까지도 유튜브에 채널을 개설하여 영상을 업로드하고 있었다.

3. 저서

  • 〈문화 속의 수학〉 (1976)
  • 〈한국수학사〉 (1977)
  • 〈카타스트로피 이론 입문〉 (1980)
  • 〈동양의 과학과 사상〉 (1984)
  • 〈수학사대전〉 (數學史大全; 1986) : 한국에서 출판된 수학사 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다.
  • 〈수학 클리닉〉 (동생 김용국과 공저)
  • 〈개인의 이성이 어떻게 국가를 바꾸는가〉 (2020)

4. 기타

파일:김웅용의의제기1.jpg
사실요, 그 천재 소년은 미적분을 계산하는 척만 했지 그 뜻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990년 9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 천재소년 김웅용의 실체를 파악한 칼럼을 썼는데[3] 2012년 MBC에 의해 뜬금없이 IQ 210의 천재 김웅용을 공격한 장안의 호사가로 디스당했다(...). 물론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김용운 교수는 김웅용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많은 업적을 수학계에 남겼다.

재일교포라는 신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 중에서 백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좋아하는 듯 하다. 역사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백제와 관련된 것들을 설명해줄 때 등장하는 경우가 많고 그중에서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될 때에는 그 비중이 더욱 높았다. 다만, 김용운이 개인적으로 소개하던 학설이나 마이너한 연구주제들이 때로는 방송사나 유튜버 등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 확대해석 되어 퍼지는 일도 많았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


대표적으로 도쿠가와-신라후손설, 도요토미-백제후손 설이 있다.

원래 방송에서 김용운은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 시기, 중앙정부의 권력을 잡은 것은 백제계 인물들이기 때문에 후발주자로 들어온 신라계 도래인을 동부 개척을 핑계로 외지로 보내다보니[4] 자연스레 두 지방이 서로와 한반도에 대한 정서가 다르게 형성되었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려했던 것으로 보인다.[5]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서적으로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소개시켜준 것에 불구하고, 일부 방송사와 유튜버들에 의해 확대해석 및 왜곡되어 백제 후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토를 회복하기 위함해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신라인 후손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 정복에 소극적이었다는 식으로 논리비약이 이루어지기도 했다.[6]

김용운 본인도 전문 역사학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덕후인 수준인 정도라 항상 정확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대중적인 명성과 영향력 때문에 김용운 개인이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 사실인냥 퍼지는 일도 종종 있어왔다.

다른 예로, 유튜브 활동을 하면서도 삼국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풀다가 백제의 싸울아비라는 것을 언급한 적이 있다. 싸울아비가 일본의 사무라이의 원형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싸울아비는 무사라는 한자어를 대체하고자 현대에 만들어진 단어이다. 일단 한자어 '武夫'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이를 직역하면 가정을 위해 싸우는 것을 업으로 삼는 남자'가 되기는 한다. 당시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언어와 별개로 대륙에서 문자를 빌려와 사용하였기에 발음이야 어쨌건 '싸우는 아비'와 발음이 달라도 뜻이 일맥상통하는 武夫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7] 그러나 백제의 무사들을 특별히 武夫로 칭했다는 증거도 없고, 사실 상 武夫에 대한 순 우리말 발음은 명맥이 아주 끊긴 상태에서 현대에 다시 재정립된 것이다보니 과거의 '사무라이'라는 일본어 발음이 고대 한국어 武夫과 얼마나 연계성이 있는지 알 수 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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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분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당시 한국 방송에서 해설을 맡아 대중적으로 알려진 천문학자. 소행성에 이름도 붙여져 있다![2] 도쿄대학 경제학과 명예교수. 고시에 합격해 대장성 관료로 근무하다가 돌연 미국에 유학, 경제학과 교수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는 '종(縱)적 사회인 일본에서 횡(橫)으로 걸어온 사람'이라고 하여 유명하다.[3] 사실 그 전에도 뿌리깊은 나무, 월간조선과 같은 잡지나 그의 저서 등에 직간접적으로 계속 언급되었으며 그 후에도 간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했다.[4] 의외로 이런 일들은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도 보기 쉽다. 비단 고대-중세 국가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이나 영국의 호주개척 역사도 이와 비슷했다.[5] 김용운의 주장은 일본삼서가 백제계에 의해 쓰여졌으니 신라에 대한 반감과 잃어버린 한반도의 고토에 대한 정서가 묻어나올 수 밖에 없고, 이를 읽으며 자란 일본의 천황가와 권력자들이 자연스레 신라에 대한 반감과 한반도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는 설에서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설은 일본서기를 연구하는 주류학계에서도 어느정도 묵직하게 받아들여지는 주장이다.[6] 실제 역사상으로는 다들 알다시피 후삼국시대에 들어서 재건국된 후백제나 신라나 나란히 고려에 점령당하고 끝났고, 남북국시대에는 신라인 또한 상당한 규모가 상업적 목적 등으로 일본 열도로 넘어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어느 계열이든 이미 한참 예전에 일본인으로 동화된 사람들이 고토 회복이라는 정서만을 간직하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인구 비례로 볼 때 일본열도로 가장 많이 넘어간 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가야계로 추정되고 있다.[7] 이것도 사실 '아비'는 그냥 남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父를 써야 한다. 그야말로 夫와 父의 현대 한국어 독음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붙인 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