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8:30:43

김용희(사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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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용희노동자.png
이름 김용희(金容熹)
출생 1959년 7월 10일 ([age(1959-07-10)]세)
전라남도 목포시
학력 성남서고등학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 / 학사)
소속 정당

[[정의당|
파일:정의당 로고타입.svg
]]
현직 사회운동가, 해고노동자
경력 한국교육개발원 직원
창원 삼성항공 직원
삼성그룹 노사협의회 위원
삼성그룹 경남지역 노조설립준비위원장
삼성물산 건설지부 러시아 스몰롄스키 지부
민주노총 해고자복직특별위원회 조직국장
강남역 사거리 철탑 복직투쟁 활동가
링크 페이스북

1. 개요2. 생애3. 기타4.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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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이다.

2. 생애

김용희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로 이사를 가 아버지가 10년 동안 경작을 하는 조건으로 논 2만 평을 분양받는 등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남서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여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했고, 3대 독자로 군대 면제 대상자였으나 학생운동 중 구속되어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1982년 3월 한국교육개발원에 들어가게 되어 강북 빈민촌과 강남의 부자 동네를 오가며 유아교육 실태를 조사하는 일을 도맡아 하게 되는데, 삼성전자에 근무하던 친구의 소개로 12월 창원공단에 있는 삼성항공에 입사하게 된다. 당시부터 비상계획부에 있는 회사 간부들한테 입사한 지 며칠 되지 않는 날 당시 국방부 장관의 아들이었던 비상계획부장에게 폭언을 당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내에서 교통 지원 등에 있어서 차별을 받는 등의 일로 인해서 회사의 부조리를 깨닫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사내 규정에 따라 간접선거로 직원 30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 노사협의회 위원이 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국적으로 노동조합 설립 물결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부울경 지역의 첫 노동자 조직인 마창노련이 결성되는데, 고 이병철 회장의 무노조 경영 원칙으로 인해서 삼성에서 노조를 결성하는 건 매우 어려웠다. 예로, 노조 설립 신고서를 시청에 가지고 가면 이미 회사에서 '가짜' 노조를 다 등록해 놓은 상태라서 등록을 할 수 없었을뿐더러, 삼성 직원들이 노조 등록을 막기 위해 각 관공서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90년 6월 김용희는 마창노련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다. 단위사업장 노조를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어 삼성그룹 경남지역 노조를 결성하려고 했는데, 김용희가 추진본부장으로 추대받았다.

1990년 7월 김용희는 노조 활동에 관심 있는 노동자 몇 과 술자리 후 헤어지던 도중, 중년 남성 세 명이 다가와 "이 개자식"이라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고, 깨 보니 창원동서병원 중환자실에 있었다고 한다. 지역주민이 풀숲에 소변을 보러 갔다가 쓰러진 김용희를 보고 신고했던 것이었다. 이후에 노조 설립 활동을 계속하자 회사 간부 둘이 김용희를 차에 태워 대구에 있는 호텔, 해남 대흥사, 광주 ,목포 등으로 데리고 다니며 지속적으로 회유를 했고, '광주에 시계 대리점을 차려 주고 보증금 지원과 함께 전셋집을 얻어 주는 대가'로[1] 노조 설립 포기를 회유했다고 한다. 김용희는 겨우 빠져나와 회사로 출근해 생산부 직원들에게 납치 회유 사실을 폭로한다.

노동조합 설립 준비를 마치고 1991년 3월 28일 노동조합 총회를 하는 날, 노사협의회 사무실에 사복경찰 2명이 들이닥쳐 김용희를 경찰차에 태워 창원시 공정선거감시센터에 가둔다. 또 노조 설립 관련자 몇 명이 미국으로 발령이 나면서 노조 설립은 실패하게 된다. 또, 그날 오후 김용희에게 해고 통보를 하고 회사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데, 해고 사유는 '여직원에 대한 성폭행' 이었으나, 이는 명백히 날조된 정보였다. 노동조합 총회를 하기 직전인 3월 1일, 여사원이 김용희에게 상담을 요청하여 염 부장이 여사원을 성폭행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용희는 다른 노사협의회 위원과 그 문제를 논의하다가 해당하는 위원은 염 부장이 엮인 걸 알고 두려움에 회사에 사실을 알렸다. 회사는 여사원을 협박하여 오히려 김용희에게 성폭행당했다고 고소하고 좋은 부서로 옮겨 주겠다고 강압을 하여 김용희가 역으로 고소당하게 된 것이었다. 김용희는 여사원을 무고죄로 고소하고, 여사원은 김용희에게 회사가 강압적으로 시켜서 한 일이라며 고소를 취하하고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다는 공증서를 쓴 후, 김용희의 집에서 김용희의 아내와 함께 일주일 동안 은둔한다.

김용희는 해고 무효 소송을 걸고 회사 정문 앞에서 출근 투쟁을 시작했다. 사측의 회유와 협박 또한 집요해졌는데, 아버지가 계시는 목포까지 가서 아들을 설득히 복직 투쟁을 접으면 광주에 시계 대리점을 내주고 집을 사겠다고 해 주었고, 이에 따라 아버지는 김용희를 오랫동안 설득하나 김용희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후 아버지는 고향으로 내려가 유언장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가는데, 김용희는 인근의 모든 기도원, 사찰 등을 찾아다닌 후 혹시라도 회사의 소행일까 해서 복직 투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회사에 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하나 묵살당한다.

그러던 1992년 5월 18일, 사측 인사와 간부의 부인 임 씨가 김용희의 아내에게 만나자고 한다. 아내가 약속 장소에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무렵 임 씨와 잘 아는 경찰관이었던 황 순경이 나타나 아내를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며 승용차에 태웠으나, 임 씨는 중간에 내리고 아내를 대방동 야산으로 끌고 가 성폭행을 시도했다. 다행히 지나가던 성주파출소 소속 순찰 차량에게 발견되었으나, 성추파출소는 황 순경에 대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합의를 종용하였다. 이 사건 또한 경남도청 소속 경찰 간부가 와서 천만원으로 무마하자고 하였으나, 김용희는 이를 거절하고 황 순경을 고발하여 구속시킨다. 당시 기사

그러나 해고무효소송은 2심에서도 졌다. 여기에도 석연찮은 부분이 있는데, 해고 사건을 맡은 문재인 변호사[2]가 김용희가 성폭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여사원이 쓴 공증서를 증거로 제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항의하였으나 묵살당했다. 마지막으로 대법원상고를 하면서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공증서를 직접 제출했는데, 결심공판을 15일 앞두고 사측 임원이 찾아와서 상고 취하서를 작성하면 계열사에 1년간 근무하다 원직 복직시켜 주겠다고 하여 1994년 2월 삼성종합건설로 발령이 나 러시아 스몰렌스키 지부로 가게 된다.

러시아에서도 지속적인 탄압을 받게 된다. 하루는 인사과 간부들이 김용희를 묶은 후 가방을 빼앗아 그 속에 있는 아버지의 유언장과 복직합의서 등을 불지르고 <한국노동조합 원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같은 책을 보고 간첩으로 신고한다.[3] 러시아 한국대사관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이 와서 조사를 했으나 결국 무혐의로 풀려난다. 다행히 복직합의서는 따로 복사본이 있어서 계속 근무를 할 수 있었으나, 현장 노무관리부터 시작해서 상추씨를 심으라는 명령까지 사소한 업무를 맡겼다.

러시아 근무가 끝날 무렵 회사에서는 노조를 설립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지 않으면 한국으로 발령하지 않고 싱가포르로 발령하겠다고 했다. 김용희는 단식에 들어가게 되고, 단실 9일째 삼성건설 부사장이 한국에서 와서 단식하던 김용희와 협의하여 사측은 싱가포르 발령을 철회하고 한국으로 발령하는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1995년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다시 노조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쓸 것을 강요받았고, 이에 응하지 않자 해고당한다.

이후 지속적으로 삼성그룹에 대항하는 투쟁을 하게 된다. 1998년 7월 태평동 삼성그룹 본사에서 단식투쟁 16일째 '공무상비밀표시무효죄'로 2개월 동안 구속되고, 1999년 10월 한국기독교회관 인권위실에서 48일 단식투쟁 중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의 설득으로 단식을 풀고 창원 집에 내려갔다가 다시 공갈죄로 구속된다. 2017년 청와대와 국회회관 앞에서 119일 동안 단식을 했다가 80kg이던 몸무게가 49kg까지 줄었다.

파일:김용희2.jpg

2019년 6월 10일 강남역 CCTV 철탑 위에 올라간 후 55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다가 이대로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의료진의 권고를 받아들여 중단하였다.

김용희의 고공농성은 355일 동안 계속되다 2020년 5월 29일 삼성과의 극적인 협상 타결로 종료되었다.

3. 기타

  • 일반 시민들도 매주 수요일 7시에 가면 김용희 노동자와 연대하는, 1시간 가량 진행되는 집회에 참가할 수 있다. 집회 전에 강남역 7번 출구 옆에 있는 천막에 들어가면 있는 고공농성에 연대하는 대표자들에게 참가 의사를 밝히면 되고, 매주 정의당, 노동당, 민중당 등 진보정당 및 여러 시민단체의 활동가, 일반 시민들이 와서 연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삼성생명에게 암보험료를 받지 못한 피해자들 또한 김용희의 고공농성에 연대하고 있다.
  •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 고공농성 공동대책위원회의 대표는 다름 아닌 고려대 임미리 교수이다. 임미리 교수 고발 사건[4]의 그 임미리 교수가 맞다.
  • 2019년 7월 12일 기준으로 40일째 단식 중인데, 의사들의 소견에 의하면 건강이 위중한 상태이다. 기사 관련 권고를 받아들여 55일째에 단식은 중단하고 고공농성은 계속 진행하였다.
  • 2020년 3월 31일 정의당 대표, 총선 선거운동 기간 도중 국회의원 심상정이 21대 국회의원이자 당시 비례대표 후보 류호정 등과 함께 농성현장을 방문하였다. 기사 류호정 의원의 경우는 과거 화섬식품노조에서 활동해 올 때부터 김용희의 농성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기사 또, 당선된 이후에도 4월 25일에 다시 한번 강남역을 찾아 연대 투쟁을 하였다. 영상
  • ARD(독일국영방송) 뉴스 Tagestheme(오늘의 화제)에 2020년 5월 1일 노동절 특집으로 김용희의 고공농성 투쟁 관련 내용이 보도되었다. 영상 ARD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소속된 곳으로, 그리고 2016년 백남기 농민 사건을 보도한 언론 매체로 잘 알려져 있다.
  • 2020년 5월 7일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무노조 경영 포기 선언을 하자, 민주노총은 논평을 통해 '무노조 경영 포기는 너무나도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이며 '김용희 해고자 등을 비롯한 노동자들에게 사과와 복직, 보상이 되어야 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 김용희 본인은 이재용의 사과와 복직 등을 요구하며 세 번째 단식에 들어갔다. 기사
  • 고공농성 당시 시위 장소 인근의 시민들의 고생이 심했다. 소음법에 딱 안 걸릴 정도로 철저하게 정해진 시간 내에 소리지르고, 욕하고, 노래 틀고, 싸이렌 소리까지 틀었다. 정해진 시간이란 곧 주간 시간인데, 시위 장소가 다름아닌 사무실들이 밀집해 있는 상업 구역이다. 딱 인근 직장인들의 근무 시간에 겹치게 소음을 발생시켰던 것. 덕분에 바로 인근에 있던 강남센타빌딩, 미진프라자 빌딩, 강남 메리츠타워에 근무하던 직장인들에겐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아슬아슬하게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소음을 발생시키니 어떻게 법적으로 제재할 수 도 없었다. 매일마다 나와 있는 수서경찰서 경찰들은 덤.# 소음에 시달린 시민들은 확성기 시위를 반대하는 카페를 세우기까지 했다.
  • 2020년 5월 29일. 삼성과 합의를 하여 355일 만에 고공농성을 해제하였다.
  • 2021년 7월 말, 한때 김용희가 고공시위용으로 사용했던 강남사거리 CCTV 철탑은 다른 시위자가 점거해 확성기 시위를 시작했다. 원래 몇 달동안 근처에서 현수막을 잔뜩 걸어놓고 확성기로 시위하던 사람인데,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자 김용희를 벤치마킹 한 듯 하다.[5] 하지만 이 시위자의 철탑시위는 안전문제 때문인지 하루만에 끝나버렸고 다시 원래 위치인 8번 출구로 돌아갔다. 해당 시위는 약 1년간 지속하다가 2022년 여름 종료되었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 성남시의회 의원)
경기 성남 아[6]

[[국민참여당|
파일:국민참여당 로고타입.svg
]]
1,721표 (9.92%) 낙선 (4위)


[1] 당시 삼성항공에서는 시계를 만드는 사업도 하였다.[2] KBS1 라디오 [주진우 라이브] 김용희 "내가 죽어야만 이 사건 끝나겠다는 생각 많이 해…퇴직일 날 죽음 각오하기도"[3] 이 책들은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의 서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이었다.[4] 과거 #민주당은_빼고 운동을 진행하다가 민주당에게 고발된 사건. 민주당과 진보진영 사이에 벌어진 감정의 골을 엿볼 수 있는 부분.[5] 해당 시위자는 삼성그룹이 미허가 건설업체에 건설 수주를 맡겼다가 노동자 3명이 사고사하자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냉동한 후 폐기처리했으며 이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라고 시위하고 있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공교롭게도 해당 시위 역시 삼성을 타겟으로 했다.[6] 중원구 은행1·2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