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7:49:18

김원권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김원권
金源權 | Kim Wonkwon
파일:김원권 육상.jpg
출생 1918년 12월 13일 (생존 중일 경우 [age(1918-12-13)]세)[1]
황해남도 해주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2]
종목 육상
주종목 세단뛰기
가족 부친 김태규(金泰圭), 형 김원룡[3], 여동생 김원봉[4]

1. 개요2. 선수 경력3. 평가4.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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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前 남자 육상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보성전문학교로 진학해서 대학생 신분이던 1939년 오스트리아 에서 열린 국제대학경기대회(現 유니버시아드 대회의 전신)에 출전하여 15.37m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일본은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세단뛰기 종목에서 오다 미키오가 일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후로 올림픽 세단뛰기 3연패를 하며 세단뛰기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1940 올림픽이 자국 도쿄에서 개최될 예정인지라 세단뛰기 4연패가 유력한 상황이었고 그 주인공이 바로 김원권이었다. 실제로 1940년 세단뛰기 세계 최고기록은 김원권이 세운 15.68m였고, 1939년엔 비공인이긴 하나 16.25m로 당시 세계신기록에 해당하는 기록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중일전쟁의 여파로 일본은 올림픽 개최권을 반납했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올림픽 자체가 취소되며 김원권의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무산된다. 예정대로 대회가 개최됐다면 손기정에 이어 두 대회 연속 조선인 금메달리스트가 배출될 것이 유력했으니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다.[5]

이후로도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연도별로 세계 최고기록을 세우며 세단뛰기 최강자로 군림했다. 해방 이후 1948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여, 예선에서 7위로 통과하며 대한민국 올림픽 육상 최초로 결선에 진출했다. 결선에서는 14.25m의 기록으로 12위에 그쳤다.

3. 평가

재능이 역대급이였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본인이 수립한 15.86m의 최고기록은 1984년까지 한국 신기록이었다. 김원권 이후 어떠한 한국인도 40년 넘게 이 기록을 넘지 못하다가 1984년 박영준[6]에 의해 경신되었다. 시대 보정도 필요없는 수준이었으며, 마라톤 이외 종목에서 한국 역사상 거의 없었던 세계 최고 레벨의 육상 선수였다.

4. 은퇴 이후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1948년 런던 올림픽 이후 일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2004년 86세 때 노년을 일본 고베시에서 보내고 있다는 점 외에는 이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살아있다면 100세를 훌쩍 넘긴 인물이고 소식이 없는지 20년 이상 되었기에 현재 생사는 불분명하다.


[1] 1915년생이라는 자료도 있다.[2] 1948년 런던 올림픽 이후 일본으로 귀화.[3] 역시 육상 선수였으며 주종목은 높이뛰기였다. 형도 조선신기록을 세우는 등 재능을 과시했다. 1948 런던 올림픽에 형 김원룡은 임원으로, 동생 김원권은 선수로 참가하였다.[4] 육상 선수 손기정의 후처.[5] 비슷한 케이스로능 역도의 김성집, 남수일, 박동욱이 있다. 이 선수들은 각각 밴텀급과 페더급, 미들급에서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는 등 일본 역도계를 평정한 것을 넘어 1940 올림픽의 금메달 후보로 꼽혔지만 대회가 무산되었다. 이 선수들은 모두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1948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고 김성집은 3위, 남수일은 4위, 박동욱은 10위를 기록했다.[6] 이 선수가 훗날 은퇴한 후 코치로서 가르친 선수가 김덕현이다. 김덕현은 김원권과 마찬가지로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따며 육상 전체를 통틀어 세계 수준에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몇 안되는 선수로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