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3:04:49

나길모 굴리엘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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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인천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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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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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2002)
2대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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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016)
3대
정신철 요한세례자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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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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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초대 천주교 인천교구
나길모 굴리엘모
羅吉模 | Gulielmo Wiliam John-McNaughton
파일:나길모 굴리엘모 주교.jpg
<colbgcolor=#eee8aa> 본명 Wiliam John-McNaughton
윌리엄 존 맥나흐톤
출생 1926년 12월 7일
사망 2020년 2월 4일 (향년 93세)
국적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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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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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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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주교 임명일 1961년 6월 6일 대목구장 임명[1]
재임기간 초대 인천교구장
1961년 10월 26일 ~ 2002년 4월 25일
파일:나길모 굴리엘모 주교 문장.jpg
UT OMNES UNUM SINT
(모든 이가 하나 되기를)
[2]

1. 개요2. 생애
2.1. 초기 활동2.2. 인천교구장 시절2.3. 원로 주교의 삶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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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가톨릭 교회의 초대 인천교구주교로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이며[3], 2021년 현재까지는 한국 가톨릭의 마지막 외국인 선교사 출신 교구장이다. 교구장으로 1961년 8월 24일부터 2002년 4월 25일까지 재임하였으며, 한국식 이름은 나길모(羅吉模)이다. 세례명은 굴리엘모.[4]

2. 생애

2.1. 초기 활동

1926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Lawrence)에서 출생. 1944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953년 동(同)회의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고, 이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예일 대학교에서 1년간 한국어를 공부한 후 1954년 한국에 파견되었다.

충북 청주교구의 장호원 감곡성당에서 보좌신부사제 생활을 시작, 장호원성당, 북문로성당, 내덕동성당에서 사목을 폈다. 그러다 1958년 인천지역이 감목대리구로 설정되고 3년 후인 1961년 6월 6일 인천감목대리구가 인천대목구로 승격되자 같은 해 8월 24일 교황청으로부터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주교 성성식은 그해 8월 24일 고향인 미국 로렌스 시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주교 성성식에 이어 1961년 10월 26일 오전 11시, 주피(Xavier Zupi) 주한 교황 사절의 인천교구 설립식과 주교 임명장 수여식이 답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나 주교의 주교 수품 당시 나이는 만 34세로 이는 한국 천주교 최연소 주교 수품 기록이다.

2.2. 인천교구장 시절

파일:나길모 굴리엘모 주교 영명축일.jpg
인천교구장 시절

나 주교는 교구장에 취임하자마자 신설 교구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교육사업을 중심으로 한 복음선포 사업에 중심을 두었다. 당시 인천교구는 박문초등학교, 박문여자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만 운영하고 있었으나, 동구 화수동에 있었던 인천영화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인천대건중고등학교로 새 출발을 시켰다. 운영권이 노틀담 수녀회에 있던 박문학교와 달리, 대건학교는 교구 직속에 두면서 미국인 교장(조셉 기본스 신부)을 임명하고 철저하게 미국식 사립학교 체제를 도입하여 학교 수준을 매우 끌어올렸다.

1966년 한국 천주교가 사회 참여에 돌입하는데 본격적인 계기가 된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이 일어나자 해당 교구장 주교로서 당시 가톨릭 노동청년회 총재 주교였던 마산교구김수환 스테파노 주교와 함께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1970~80년대의 독재시기 때도 이어져 서울대교구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수원교구장과 광주대교구장을 역임했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원주교구지학순 다니엘 주교, 안동교구프랑스인 두봉 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 아우구스티노 주교와 함께 사회참여파 주교로 이름을 떨친다. 특히 인천교구가 당시의 신흥 공업지역이었던 인천, 부천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 사목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또한 인권문제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4년간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이사장으로 봉직하였다. 노동자 사목, 양심수 석방운동, 독재 투쟁 활동 등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으로 인해서 당시의 정권에서 요주의 인물로 언제나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교구장으로서 인천교구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초기 9개 성당과 약 23,000명의 신자들로 시작했던 인천교구를 은퇴 시에는 10배 정도 확장시켰다. 현재까지도 인천과 부천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서 천주교 신자 비율이 높은데, 이는 나 주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2년 4월 24일 교구장직을 은퇴하였다. 은퇴 시에도 여러 가지 기록을 만들었는데, 한국 천주교에서 남아있던 마지막 외국인 선교사 출신 교구장이었으며 41년간 교구장직을 수행하여 단일 교구 최장 임기 교구장 기록을 세웠다. 나 주교의 은퇴는 한국 천주교가 그동안의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교회 운영에서 완벽하게 독립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이었다. 후임 교구장으로는 부교구장이었던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가 승계하였다.

2.3. 원로 주교의 삶

은퇴 뒤에는 고향인 미국 보스턴으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5남매의 장남이었던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어머니의 소원이었던 "은퇴 뒤에는 고향에서 살기 바란다."는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얼마간은 자신의 본 수도회인 메리놀회 본부에서 소임을 하였고, 미국 여러 교구 성당들을 돌면서 견진성사를 집전하였으나[5] 구순에 가까워 가는 나이로 인해서 2010년에 들어서는 수도원에서의 주일 미사를 집전하거나 양로원에서의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등의 소임을 하고 있다. 또한 은퇴 이후에도 종종 한국을 방문했다.

2003년 사제 서품 50주년 미사를 인천교구에서 성대하게 거행했으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8년뒤인 2011년에 주교 수품 50주년 기념미사와 천주교 인천교구 설정 50주년 감사미사 참석차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인천 깍쟁이 美신부님' 주교 50주년 이 방문이 생전 마지막 방한이 되었다.

2020년 2월 3일, 미국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94세. 천주교 인천교구는 2020년 2월 10일 주교좌 답동성당에서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의 위령 미사를 봉헌했다.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가 주례한 이날 미사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주교회의 의장이자 광주대교구장인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를 비롯해 전-현직 교구장 주교들이 공동집전했다. [초대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 선종] 위령미사


3. 기타

  • 주교관이 있는 답동성당 바로 길 건너편 신포국제시장에서 파는 만두를 엄청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인 스스로 '만두 중독자'라고 하셨을 정도. 참고로 여기서 파는 만두는 웬만한 어른의 손 크기에 맞먹을 정도로 크기가 큰 고기만두다. 만두피가 꽤 두껍고 안에 들어간 만두속(고기와 당면, 야채)도 풍성하다. 지금이야 신포시장의 명물이 닭강정으로 굳어졌지만, 과거에는 이 고기만두도 이 지역의 명물 음식이었다.
파일:나길모 주교 요한바오로2세 알현 2.jpg
파일:나길모 주교 요한바오로2세 알현.jpg
천주교 인천교구장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 투부르보 미누스 명의주교[2] 요한 17,21로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 한국 천주교의 주보인 성모 마리아, 한국 천주교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그리고 인천 항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3] 즉, 교구 사제가 아니라 수사신부이다. 사제 신분을 갖고 있는 수도자인 셈.[4] 라틴어 '굴리엘모'에서 유래한 남자 이름은 라틴계의 발음과 튜튼계의 발음 사이에 괴리가 큰데, 라틴계의 경우에는 '굴리엘모(이탈리아어)', '기예르모(스페인어)'나 '기욤(프랑스어)'처럼 어두의 G 음가가 살아 있는 반면 튜튼계는 '빌헬름(독일어)'이나 '윌리엄(영어)'처럼 어두의 G 음가가 증발하고 U에서 변형된 W 음가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윌리엄'에 해당하는 라틴어 이름, 즉 가톨릭 세례명은 '굴리엘모'이다.[5] 견진성사는 원칙상 주교가 집전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일도 많은 주교가 일일이 성당을 순회하면서 성사를 줄 수가 없으니 부득이하게 사제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대신 성사를 주게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주교가 직접 집전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