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04:15:30

나레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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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61932><colcolor=#fdc002> 아유타야 왕국 제18대 국왕
나레수안
파일:KingNU.jpg
나레수안 좌상
솜뎃 프라나레수안 마하랏[1]
솜뎃 프라산펫 2세[2]
출생 1555년 / 1556년
수코타이 왕국 핏사눌록
사망 1605년 4월 25일 (향년 49~50세)
아유타야 왕국 치앙마이
재위 기간 1590년 7월 1일 ~ 1605년 4월 25일
배우자 마니 라따나, 엑 까사뜨리 외
종교 불교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핏사눌록의 왕자2.3. 아유타야의 국왕
2.3.1. 코끼리 결투
2.3.1.1. 과연 실화일까?
2.3.2. 대(對) 버마 전쟁2.3.3. 사망
3. 여담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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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버마에게 수도 아유타야를 내주고 속국으로 전락했던 아유타야 왕국을 독립시키고 연이은 전쟁을 벌임으로써 아유타야를 동남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시킨 명군.

산펫 2세(สรรเพชญ์ที่ 2)라고도 불린다. 왕자 시절의 이름은 나렛으로, 왕자 시절 흑태자라고 불리기도 해서 흑태자라는 명칭으로도 유명하다. 동생은 백왕자고 누나는 금공주인 걸 보면 색깔 이름으로 맞춘 듯. 나레수안의 경우에는 흑태자 에드워드와 달리 생전부터 흑태자라 불렸고, 왕이 됐다.

여담으로 중국어로는 납서선(纳瑞宣)이다.

2. 생애

2.1. 초기

나레수안은 1555년(또는 1556년) 아유타야 북부의 요지이자, 일시적으로 수도이기도 했었던 핏사눌록에서 마하 탐마라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하 탐마라차는 당시 아유타야의 왕이었던 마하 차끄라팟의 즉위를 도운 반정 공신이자 수코타이 왕국의 후예였고, 그의 어머니 위수티 까사뜨리는 마하 차크라팟과 수리요타이의 딸이었다. 나레수안은 왕자 시절 '흑태자'라고 불렸고 동생 에까톳사롯은 '백왕자'로 불렸으며 누이 스판깐라야는 '금공주'로 불렸다.

1564년, 버마의 군주 바인나웅(Bayinnaung)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핏사눌록을 포위했다. 마하 탐마라차는 핏사눌록이 식량 부족과 전염병 창궐로 인해 오래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도시를 포기했다. 바인나웅은 핏사눌록을 함락한 뒤 뒤이어 아유타야를 공략하고 아유타야 왕국을 버마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바인나웅은 아유타야 국왕의 충성을 보장받기 위해 왕족들을 인실로 삼겠다며 버마의 수도 바고(Bago)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마하 탐마라차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두 아들 나레수안과 에까톳사롯을 인질로 보냈다.

그렇게 해서 바고로 보내진 나레수안과 에까톳사롯은 바고에서 7년간 억류 생활을 보내면서 다른 나라에서 인질로 온 왕자들과 함께 왕가로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1570년, 두 왕자는 누이 스판깐라야가 바인나옹의 후궁이 되는 조건으로 귀환했다. 나레수안은 버마에 머무는 동안 "버마 출신 청년 엘리트들과 고관, 귀족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최고의 군사 교육을 받았다. 나레수안은 어린 시절부터 매우 총명해 군사 외에도 여러 분야의 지식을 빠르게 습득했다고 한다.

2.2. 핏사눌록의 왕자

조국으로 돌아온 나레수안은 아버지 마하 탐마라차에 의해 핏사눌록의 우파라자(황태자)에 임명되었다. 그는 랑상의 수도 비엔티안을 정복하려는 바인나옹의 원정에 아버지와 함께 동참했지만 도중에 천연두에 걸리는 바람에 핏사눌록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방문했을 때 아유타야에 찬카셈 궁전을 지었다.

그러던 1581년, 바인나옹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난다 바인(Nanda Bayin)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1583년, 난다의 삼촌인 아바의 타도 민소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바이닌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플모, 타웅구, 치앙마이, 비엔티안, 아유타야의 왕족들을 불렀다. 1584년 2월 2일, 나레우안은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버고로 향하여 4월에 버마-아유타야 국경에 도착했다. 라마 4세의 57번째 아들이자 형인 라마 5세를 보좌하며 교육 장관, 내무 장관 등 요직을 지내며 태국 근대 교육 제도의 기반을 닦은 담룽 라자누바브(1862~1943)가 저술한 《버마와의 격전》에 따르면, 이때 난다 바인이 아들 마하 우파라자 밍기이에게 수도에 남아서 나레수안을 맞이했다가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버마 측의 연대기들에 따르면, 난다는 1584년 3월 25일 아바의 반역자들을 토벌하러 가기 전에 나레수안을 맞이해 후하게 대접하려 했다고 한다.

담룽의 저술에 따르면, 나레수안은 국경 도시 크렝에 도착했을 때 마하 우파라자가 자신을 공격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레수안은 즉시 회의를 소집하고 신료들 앞에서 금잔에 물을 가득 담고 땅에 뿌린 후 이날부터 버마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독립할 것임을 선포했다. 담룽의 저술에 따르면, 나레수안은 이후로 바고로 진군해 그곳에 포로로 잡혀 있던 가족들을 석방할 작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난다 바인은 이미 아바의 반역자들을 섬멸하고 그의 수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에 나레수안은 약 1만 명의 가족들을 해방시킨 후 퇴각했다. 이에 마하 우파라자가 이끄는 군대가 그들을 추격해 사퉁강에서 따라잡았다. 그러나 버마군 장수 수라캄마가 나레수안이 화승총으로 쏜 탄환에 맞아 죽자, 마하 우파라자의 군대는 공황에 휩싸여 수도로 패주했다고 한다.

이후 나레수안은 푸에시의 성지에서 물을 마시며 옛 수코타이 주민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는 의식을 벌인 후 사완할록으로 진군했으며 버마군의 공격에 대비해 북부 지방의 모든 사람들을 아유타야의 수도인 시암으로 데려왔다. 한편, 나레수안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접한 난다 바인은 두 개의 군대를 파견했다. 하나는 자신의 삼촌 밑에 있었던 파테인의 대리인이 이끄는 군대였고, 다른 하나는 난다의 동생 노라트라 망고시리가 지휘하는 치앙마이의 군대였다. 그러나 두 군대가 연합하기 전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나레수안에게 각개 격파당하고 본국으로 후퇴했다. 그 후 1586년, 나레수안은 파 모크와 방 카에오 인근에서 치앙마이의 비케로이를 격파하고 반 사켓에서 적병 1만 명과 코끼리 120마리, 말 100여 마리, 배 400척, 무기, 탄약, 식량을 포획했다.

1586년 10월, 난다 바인이 친히 버마 군대를 이끌고 아유타야 침공을 개시했다. 그는 5개월 동안 아유타야를 포위했지만 나레수안이 철통같이 방어하다가 기회만 되면 역습을 가해와 손실이 막대하자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3] 1590년, 마하 타마라카티랏 국왕이 사망했다. 그리고 1590년 7월, 나레수안은 모두의 추대를 받고 아유타야의 왕위를 차지했다. 이해에 버마 군대가 또다시 침공했지만 나레수안은 이를 물리쳐 많은 포로와 코끼리, 전투 물자들을 노획했다.

2.3. 아유타야의 국왕

2.3.1. 코끼리 결투

파일:WatSuvandaramMural.jpg

태국의 대법전 프라 우보솟(Phra Ubosot) 벽화에 그려진 나레수안과 민지 스와의 일기토

1592년 11월, 난다 바인은 자신의 아들 민지 스와(Mingyi Swa), 프롬의 대리인 부자에게 각기 군대를 이끌고 세 갈래 진군로를 통해 아유타야를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민지 스와는 3개의 파고다스 고개를 통과했고, 나머지 2개 군대는 메 라마오를 거쳐 진군했다. 나레수안은 이보다 앞서 자신이 선제 공격을 하려 했지만 버마군이 먼저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접하자 수판 부리를 향해 행진했고 타코이 강 근처의 농 싸라이에 진을 쳤다. 나레수안은 전투 계획을 수립한 후 1593년 1월 버마군과 정면 격돌했다.[4]

이 농 싸라이 전투에서, 버마군은 아유타야군을 압도했고 나레수안과 동생 에까톳사롯은 각자 코끼리에 탑승한 채 적에게 둘러싸였다. 이때 두 사람은 근처에 민지 스와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나레수안은 곧바로 민지 스와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형제여, 어찌하여 차양에 몸을 가리고 있는가? 나와서 결투를 벌임으로써 영광을 함께 하는 게 어떤가? 앞으로 우리 처럼 결투에 나설 왕은 없을 것이다."

이에 민지 스와는 그의 요청에 응해 결투를 벌였으니, 이른바 "코끼리 결투"였다. 민지 스와는 이 결투에서 자신이 잡고 있는 대낫으로 공격해 나레수안의 투구를 베었지만 나레수안은 가까스로 피한 뒤 자신이 타고 있는 코끼리에게 상아 돌격을 행하게 한 후 대낫으로 민지 스와를 공격해 그의 오른쪽 어깨를 잘라버렸다. 민지 스와는 코끼리에서 떨어져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담룽의 저술에 따르면, 버마군은 지휘관의 죽음에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나레수안과 에까톳사롯이 타고 있는 코끼리 2마리를 공격했다고 한다. 그 결과 나레수안은 팔을 다치는 부상을 입었고 나레수안의 코끼리의 맨 뒤 탑승자가 사망했으며 에까톳싸롯의 코끼리의 중간 탑승자도 전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유타야군이 뒤에서 나타나 구원한 덕분에 나레수안과 에까톳싸롯은 생존했고, 버마군은 지휘관을 잃은 여파로 무너졌다고 한다. 그 후 난다 바인은 다른 두 부대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나레수안은 훗날 코끼리 결투 현장에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탑을 세웠고 손상된 투구에게 "프라 말라 비앙"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민지 스와의 목숨을 빼앗은 대낫에 "프라야 센 폰 파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대대로 보존하게 했다. 이 두 보구는 현재까지 태국 왕실에 의해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 전투 때 적에게 압도당해 패주했던 지휘관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가 주변에서 만류하자 사형을 철회하고 변방 지역으로 추방하는 처벌을 대신 내렸다.
2.3.1.1. 과연 실화일까?
태국에서는 상세하게 말하나 정작 버마의 연대기는 코끼리 결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버마 측 연대기에 따르면, 두 군대는 1653년 1월 8일 전투를 벌였고 민지 스와는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고 한다. 동남아시아 역사를 연구한 서양 역사학자 B.J 테르비엘에 따르면, 농 싸라이 전투에 다룬 연대기는 총 10개인데(태국 측 4개, 버마 측 1개, 16세 후반과 17세기 초반의 유럽측 4개, 17세기 후반의 페르시아측 1개) 그중 버마 측 연대기에서도 오직 한 개의 연대기만에 나레수안과 민지 스와의 코끼리 결투를 서술했다고 한다.

1630년대 초반 태국을 방문한 네덜란드인 예레미아스 반빌레트(Jeremias van Vliet)에 따르면, 나레수안과 동시대 사람이었던 태국인이 나레수안과 민지 스와의 일기토가 실제로 일어났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반빌레트는 이 태국인의 증언을 듣고 코끼리 결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코끼리에 앉아 왕실의 옷을 입은 페구 왕자와 어린 시암 왕자는 자제력을 잃고 군대를 떠나 서로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시암 왕자는 랜스를 들고 상대방에게 달려가 상대의 몸을 베었고 다른 코끼리를 잡았다.

하지만 테르비엘이 다른 연대기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버마 왕자 민지 스와와 아유타야 국왕 나레수안은 정식 결투를 벌이진 않았지만 코끼리를 타고 전투에 참여한 건 맞다고 한다. 그는 민지 스와가 결투를 벌이는 것에 동의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그 이유는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되어온 전쟁을 갑작스럽게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꼴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나레수안의 코끼리는 전투 중에 버마군에게 둘러싸이는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때 버마군 전쟁 코끼리 한 마리가 흥분한 나머지 전열을 이탈해 민지 스와가 타고 있던 코끼리를 공격했다. 민지 스와가 곤경에 처한 것을 목격한 나레수안은 달려들었고(또는 그와 함께 타고 있던 전사들 중 한 명, 어쩌면 포르투갈인), 민지 스와에게 화승총을 발사해 낙마시켰다.

테르비엘은 나레수안이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운이 좋게 살아남았다고 지적하면서도 그가 기회를 빠르게 이용해 전세를 뒤집었다고 호평했다. 다만 그는 태국의 연대기에 자주 등장하는 나레수안의 결투 장면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며 만들어낸 전설에 불과하다고 단정지었다.

2.3.2. 대(對) 버마 전쟁

1593년, 나레수안은 차오 프라야 짜끄리와 프라야 프라 클랑에게 타닌타리이유와 다웨이를 공격하게 했다. 두 장수들은 두 도시를 각각 15일, 20일에 걸쳐 포위했다. 버마 국왕 난다 바인은 버마 함대를 파견해 두 도시를 구하려 했지만 그 전에 두 도시는 함락되었고, 두 장수들은 뒤늦게 도착한 버마 함대를 격파했다. 또한 모타마로 행진한 버마 육군 부대는 짜끄리와 클랑이 이끄는 군대의 습격을 받고 11명의 버마 지휘관, 많은 코끼리, 말, 병사, 무기 및 탄약을 노획당했다.

같은 해, 나레수안은 크메르 왕국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개시해 대승을 거두고 캄보디아 왕을 처형하고 크메르인들을 대거 포획해 아유타야 왕국 북부 지방에 정착시켰다. 또한 버마의 속국이었던 몬스가 버마가 야유타야 왕국에게 거듭된 패배를 당해 약화된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뒤 아유타야 왕국에게 도움을 청하자, 나례수언은 군대를 보내 이들을 지원하게 했다. 난다 바인 왕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타웅우의 대리인을 파견했으나 패배했고, 몬스는 아유타야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595년, 나레수안은 바고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3개월 동안 바고를 포위했다가 프롬, 타웅구, 아바의 대리인들이 구원군을 이끌고 접근해오자 철수했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많은 전쟁 포로들을 끌고 감으로서 버마인들의 전투력을 악화시켰다. 이후 프롬이 난다 바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타웅우, 라킨, 란나, 란상이 뒤를 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란나 왕은 자신의 영토를 아유타야에게 넘겼고, 나레수안 란나에 군대를 주둔시켜 버마군이 란나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했다.

1599년, 나레수안은 아라칸과 타웅구를 동맹국으로 삼아 바고를 다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아라칸과 타웅구군이 이미 바고를 함락하고 도시를 모조리 불사르고 남은 재산을 약탈했다. 나레수안이 뒤늦게 바고에 도착했을 때, 타웅구의 마니이 티하투 2세는 버마 국왕 난다 바인을 본국으로 압송했다. 나레수안은 난다 바인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미나이 티하투 2세는 난다 바인의 건강이 좋지 않다며 거절했다. 이에 나레수안은 2달 동안 타웅구를 포위했으나 식량이 떨어지자 후퇴했다. 이후 난다 바인은 타웅구에서 주살되었고, 대 버마 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2.3.3. 사망

1605년 4월 25일, 나레수안은 버마를 정벌하려 했으나 병으로 쓰러졌고 치앙마이에서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3명의 아내를 두었지만 자식이 없었기에 왕세제인 동생 에까톳사롯이 뒤를 이어 아유타야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나레수안은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많은 태국인들은 나레수안이 화장된 후 그의 유골이 몽톤의 탑에 묻혔다고 믿는다.

3. 여담

  • 젊은 시절에 천연두를 앓았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천연두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천연두는 한 번 발병했다가 나으면 다시는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를 도와 일본을 공격하겠다고 제안한 바 있다고 한다. 《명사》 외국전 섬라에 따르면, 임진왜란 초기에 명군을 조선에 보내는 데 기여한 병부상서 석성은 나레수안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했으나, 광동성 지역의 양광총독은 아유타야 해군이 일본 공격을 빌미로 명을 공격할지도 몰라 제의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

파일:external/www.brns.com/naresuan.jpg
태국에는 당연히 이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가 있다. 그것도 시리즈물로.

대항해시대 온라인에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제목의 그를 새긴 석상을 발견하는 퀘스트가 있다.

문명 5에 등장하는 시암 문명의 특수유닛인 나레수안 코끼리는 위에 설명된 코끼리 결투의 일화에서 따온 것이다.

[1] สมเด็จพระนเรศวรมหาราช[2] สมเด็จพระสรรเพชญ์ที่ 2)[3] 담룽의 저술에 따르면, 나레수안은 이 시기에 버마군 요새에 야습을 개시했다가 버마군의 반격으로 아유타야군이 수세에 몰리게 되자 본인이 직접 요새 공격에 나서기로 하고 말에서 내려 입으로 검을 물고 스스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고 한다. 아유타야군은 왕자의 이 같은 모습에 사기가 크게 올라가 다시 맹렬한 공격을 했지만, 버마군이 수적인 우세로 반격해오자 결국 철수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버마 왕 난다 바인은 나레수안의 용맹에 감탄하며 그가 무서운 적수가 될 거라고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일화의 신빙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4] 담룽의 저술에 따르면, 버마군은 24만 대군이었고 아유타야군은 10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아유타야와 버마 왕국 둘다 인구가 각자 200만에 불과했을 정도로 적은데다(현재도 태국과 미얀마는 국력에서 우세한것이 없이 서로 대등하다.) 전근대 미얀마 군대의 상비군 병력은 육해군을 포함해서 10만도 안되는 7만에 불과했다.# 특히 1563년에 아유타야와 버마간의 벌어진 최대의 전면전에서 양측이 총력전으로 동원한 병력이 아유타야는 7만, 버마는 62,760명이었다.# 그래서 현대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수치는 모두 과장이며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