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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년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 |
사망 | 1961년 11월 29일 (향년 72세) |
미국 뉴욕 주 롱아일랜드 | |
본관 | 함열 남궁씨 |
서훈 |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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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남궁염은 1889년경 서울 중구 정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이었던 남궁억의 외아들로, 일찍이 배재학당에서 영어공부를 한 뒤 1905년 일본에 체재하던 박영효의 도움으로 미국 여행권을 취득했다. 1907년 11월 샌프란시스코로 유학갔지만 정착에 어려움을 겪어 버지니아로 이동해 그곳에서 고학하여 랜돌프 매건 대학을 졸업했다.졸업 후 교수의 추천으로 한 은행에 취직했다가 마침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구성하고 있던 이승만과 만났다. 이승만은 독립협회 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남궁억의 외아들을 머나먼 타지에서 조우한 것에 매우 반가워했고, 이때부터 남궁염은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구미위원부 활동을 도왔다. 그는 낮에는 은행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구미위원부에 나가 재무 일을 맡았으며, 미국에 체류하는 한인들에게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남궁염은 1924년 8월 20일 이승만의 소개로 우복자와 결혼했으며, 1926년 이승만을 후원하는 동지회가 뉴욕에서 창립될 때 참여했다. 그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주선소를 운영하기도 했고, 향수 도매를 하기도 했다. 또한 1928년 뉴욕 최초의 한글신문인 <3.1 신보>가 뉴욕에서 발행될 때, 그는 자녀들과 함께 발송 역할을 수행했다.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 후보를 역임했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다.
8.15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뉴욕에 처음 뉴욕총영사관이 세워졌다. 뉴욕총영사관은 1949년 4월 1일을 기해 업무를 시작했고, 초대 총영사는 이승만의 특명에 따라 남궁염이 임명되었다. 남궁염은 마침 뉴욕에 와있던 이순용 전 내무장관과 함께 임시 사무실을 하나 얻어 공관 준비를 하다가 본국 정부와 상의한 끝에 맨해튼에 건물 하나를 물색했다.
9E, 80가로 부근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구겐하임 박물관 등이 있는 이 4층 건물은 공관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지하실은 식당, 1, 2층은 사무실, 3, 4층은 사저로 개수를 마치고 태극기를 계양했다. 하지만 해외공관 경비를 최소한 줄여 쓰라는 외무부의 훈령에 따라 가구를 변변히 구입하지 못해 아파트에서 사용하던 가구를 임시로 사용했고, 청소비를 절약하기 위해 밤이 되기를 기다려 남이 안볼 때 가족들이 총동원되어 청소를 했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남궁염은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병사들의 유족을 찾아가 위로했고, 한미재단을 통해 한국으로 가는 구호물자 수송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미국 각지에 초청을 받아 한국의 어려운 실태를 설명하며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여러번 수행했다. 그는 총영사관 업무가 늘어나자 부영사로 최용진을 두고 고용원도 늘렸지만, 정작 자가용 승용차를 두지 않았다.
1955년 7월 8일 외자청(外資廳) 겸임 이사관(理事官)에 임명되었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자 그해 6월 그도 총영사직을 사직하고 롱아일랜드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하와이로 망명간 이승만을 방문하려 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그러지 못하고 1961년 11월 29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롱아일랜드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74년에 화장된 뒤 국내로 이송되어 강원도 홍천 선영에 묻혔다.
남궁염의 장남 남궁준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미우주항공국 리서치 엔지니어로 근무했고, 둘째 딸 혜원은 아시아개발은행에 근무하던 민병휘와 결혼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인터내셔널 스쿨의 카운슬러로 근무했다. 그리고 막내아들 남궁진은 미 농무성 산림국 육종고문으로 재직했고,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임목육종학 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남궁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