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남기명(南基明) |
생몰 | 1923년 10월 28일 ~ 1999년 5월 13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통영시 동부면 명진리 |
사망지 | 부산광역시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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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남기명은 1923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시 동부면 명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7년에 동래중학교에 입학했다. 동래중학교 4학년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3일, 일제는 경남 전 남녀 중등학교 학도들을 참가시킨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개최했다. 이때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동래중학교가 일본인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우승하지 못하고 일본인이 주로 다니던 부산중학교가 우승했다.이에 분노한 동래중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일본인 심판관들을 폭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남기명 역시 이들과 함께 하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그는 동래중학교 1년 후배인 양중모(梁仲模), 김일규(金一圭), 김진훈(金鎭焄) 등과 함께 은사 허현(許鉉)[1]의 지도를 받으며 독서회를 조직했다. 독서회에서는 주로 조선의 문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제정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인의 투쟁사 등을 주제로 하는 서적들을 학습했고, <월간 러시아> 같은 월간지도 읽었다. 독서회 회원들은 이를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세계사적 흐름과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을 넓혔다.
1941년 겨울, 독서회 회원들은 김일규의 집에 모여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독서회를 개편해 조선청년독립당(朝鮮靑年獨立黨)이라 칭했다. 이들은 1942년 초봄 남기명의 집에서 2차 회합을 가지고 조선청년독립당의 강령을 정했으며 구체적인 부서를 만들었다. 이때 남기명은 행동반이 되어 국내의 정보 조사, 일본군의 기밀 내사, 탄약 제조 등을 맡았다. 조선청년독립당은 비밀 모임을 여러번 가쳤고, 1943년 멤버들이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1944년 8월 1일, 남기명 등 독서회 회원들은 양중모의 집에 모여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하고 수집한 군사 기밀을 분석한 뒤 일본군 탄약고 폭파, 군용 열차 통과시 구포다리 폭파 등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만약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일본군에 입대한 뒤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대비책도 세웠다. 한편 조선청년독립당은 항일결사 자일회(紫一會), 순국당(殉國黨)과도 연락을 취하면서 항일 투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1944년 7월 순국당의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고 한달 후인 8월에 조선청년독립당도 발각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남기명은 당원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년간 미결수인 채 모진 고문을 받으며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8월 16일에 출옥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엔 부산에서 폄범하게 살아갔으며 1999년 5월 1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남기명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9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