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8:34:15

제갈량의 남중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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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Zhuge Liang's Southern Campaign.png

1. 개요2. 배경3. 결과4. 연의

1. 개요

제갈량의 남중 정벌은 제갈량유비 사후 익주 남부의 반란을 평정한 사건을 말한다.

2. 배경

손권은 자신에게 복종한 교주사섭을 사주하여 익주 남부의 호족옹개 등을 포섭하게 했다. 이에 옹개는 장예를 포박해 오나라로 보내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월수군의 이민족고정도 초황을 살해한 후 옹개에게 동조했고, 장가 태수 주포도 종사 상방을 죽인 뒤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남만의 부족장 맹획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회가 계책으로 옹개를 대파한 뒤 반란군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고정이 부하를 시켜 옹개를 살해하였고, 주포 역시 마충에게 토벌되어 죽은 후, 제갈량은 맹획을 감화시켜 마침내 남중을 평정하였다.

3. 결과

가을, 마침내 4군을 평정했다. 익주군을 고쳐 건녕군(建寧)으로 삼고, 이회를 태수로 하였고, 안한장군(安漢將軍)을 더하고, 교주자사(領交州刺史)를 맡도록 했으며, 치소를 미현(味)으로 옮겼다. 건녕군, 월수군(越巂)을 나누어 운남군(云南郡)을 설치하고, 여개(呂凱)를 태수로 삼았다.

또 건녕, 장가군을 나누어 흥고군(興古郡)을 설치했다. 마충을 장가태수(牂柯太守)로 삼았다.

남중의 경졸(勁卒=강병), 청강 만여 가를 촉으로 옮겨 5부로 삼으니, 그 앞에 당할 자가 없었고, (이를) 비군(飛軍)이라 불렀다.

또 그 연약한 자들을 대호족 초(焦), 옹(雍), 누(婁), 찬(爨), 맹(孟), 양(量), 모(毛), 이(李)씨에게 나누어주어 부곡으로 삼고, 오부도위(五部都尉)를 설치하였으며, (이를) 오자(五子)라 하였으므로, 남쪽 사람들은 말하길 '사성오자(四姓五子)'라 하였다.

이(夷)족엔 강한한 자들이 많아서, 대호족과 부호를 따르지 않았기에, 이에 금과 비단을 내어 성질나쁜 이족을 초빙해 가문의 부곡으로 삼도록 권하고, (부곡을) 많이 얻은 자는 칭찬하고 관직을 세습시켜 주었다.

이에 이인들이 재화를 탐하게 되어, 점점 한에 복속하게 되었고, 이족과 한족이 부곡을 이루었다.

제갈량은 남중의 준걸 건녕(建寧)의 찬습(爨習), 주제(朱提)의 맹염(孟琰) 및 맹획(孟獲)을 거두어 관속으로 삼았는데, 찬습은 관직이 영군(領軍)에 이르렀고, 맹염은 보관장군(輔官將軍), 맹획은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남중의 금, 은, 단, 칠, 밭가는 소, 전마가 군국(軍國)의 비용으로 생산되었다.

(내항)도독은 항상 신중한 사람을 기용하였다.
『화양국지』 「남중지」
여개를 운남태수(雲南太守)로 임명하고 양천정후(陽遷亭侯)로 봉했다. 마침 여개는 반란을 일으킨 만족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아들 여상(呂祥)이 후사를 잇게 되었다.
『삼국지』 「여개전」
이후에 군대가 돌아오자, 남방의 만족은 또 반란을 일으키고 수비하던 대장을 살해했다. 이회는 직접 토벌에 나서 흉악한 행동을 한 무리들을 근절시키고, 그곳의 유력자들을 성도로 이주시키고, 수(叟)와 복(濮)땅에서 밭가는 소, 군마, 금은, 무소 가죽을 공물로 납입하도록 하여 지속적으로 군용 물자를 충당했으므로 당시 비용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삼국지』 「이회전」
이전에 월수군(越嶲郡)에서는 승상 제갈량이 고정(高定)을 토벌한 뒤 수이(叟夷)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태수 공록(龔祿)과 초황(焦璜)을 죽였다. 이때부터 태수는 감히 군으로 가지 못하고 군으로부터 800여 리(320km) 떨어진 안상현(安上縣)에 머물렀으므로 그 군은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삼국지』 「장억전」

제갈량은 남중 정벌을 통해 청강 1만여 가(家)를 으로 이주시켜 무당비군(無當飛軍)으로 편성했고, 남중의 , 등 자원을 얻어 북벌의 군수물자로 사용하는 등의 단기적 성과를 얻었다. 또한 찬습, 맹염, 맹획 등 현지 인사들도 중앙에 기용했다.

남중 지역의 통치에 대해선 현지 유력가들을 기용하는 한편으로, 기존 남중 4군[1]과 유비가 신설한 주제군을 7군[2]으로 재편하고 내항도독이 통솔하도록 하여 남중을 군현 체계에 더 확고히 편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양양기 등의 서술과는 달리, 실제로는 남중에서 군대가 회군하자 다시 반란이 빈번히 발생했고, 촉에서 파견한 지방관 다수가 살해당하며 통제력이 저하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이회 → 장익 → 마충으로 이어지는 내항도독 라인의 지속적인 토벌이 있었으며, 233년 유주의 대규모 반란을 마충, 장억 등이 진압하고, 장억이 240년에 월수군을 새롭게 정복하는 등의 장기적인 노력 끝에야 남중 지방은 안정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초주전의 서술을 보면 남중 민심이 수탈로 인해 촉 중앙에 적대적이라는 여론은 촉 멸망 당시까지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4. 연의

연의에서는 이 남중 정벌이 남만 전역에 대한 정벌로 확대되고, 맹획을 7번 잡았다 풀어주는 것을 반복하는 칠종칠금을 통해 맹획을 굴복시킨다.
[1] 월수, 장가, 익주, 영창[2] 월수, 장가, 건녕, 영창, 주제, 운남, 흥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