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13:57:33

네이트 맥밀란

네이트 맥밀란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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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5837> 파일:2001년부터 2008년까지 쓴 시애틀 슈퍼소닉스 로고.png시애틀 슈퍼소닉스
영구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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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 1 No. 10 No. 19 No. 24 No. 32
<rowcolor=#ffffff> 거스 윌리엄스
(Gus Williams)
네이트 맥밀란
(Nate McMillan)
레니 윌킨스
(Lenny Wilkens)
스펜서 헤이우드
(Spencer Haywood)
프레드 브라운
(Fred Brown)
<rowcolor=#ccac00> No. 43 🎙️
<rowcolor=#ffffff> 잭 시크마
(Jack Sikma)
밥 블랙번
(Bob Blackburn)
* 영구결번자는 시애틀 시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키피디아와 Basketball-Reference 사이트에는 후신격 팀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가 그대로 기념하고 있지만, 팀이 부활하면 다시 가져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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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NBA 올해의 스틸왕
마이클 조던네이트 맥밀란스카티 피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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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네이트 맥밀란 애틀랜타 감독 대행.jpg
<colbgcolor=#005837><colcolor=#fff> 시애틀 슈퍼소닉스 No. 10
너새니얼 맥밀런
Nathaniel McMillan
생년월일 1964년 8월 3일 ([age(1964-08-03)]세)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지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
출신학교 초완 대학교 (1982~1984)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1984~1986)
신체 196cm, 95kg
포지션 포인트 가드 / 슈팅 가드
등번호 10번
드래프트 1986 NBA 드래프트 2라운드 30순위
시애틀 슈퍼소닉스 지명
역대 소속팀 시애틀 슈퍼소닉스 (1986~1998)
지도자 시애틀 슈퍼소닉스 어시스턴트 코치 (1998~2000)
시애틀 슈퍼소닉스 감독 (2000~2005)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감독 (2005~2012)
인디애나 페이서스 어시스턴트 코치 (2013~2016)
인디애나 페이서스 감독 (2016~2020)
애틀랜타 호크스 어시스턴트 코치 (2020~2021)
애틀랜타 호크스 감독대행 (2021)
애틀랜타 호크스 감독 (2021~2023)

1. 개요2. 일생3. 수상 내역4. 여담

[clearfix]

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전 애틀랜타 호크스 감독이다. 평균 득점은 높지 않았지만 수비력만큼은 대단했고, 평소에도 팀 메이트들로부터 두터운 리더로 평가받은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또한 감독으로서는 주로 지역방어에 기반을 둔 수비 전술을 구사해왔다. 별명은 "Mr. Sonic".

2. 일생

2.1. 선수 이전

저소득층용 주택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얼굴을 알지 못했으나 일을 열심히 한 어머니와 돌본 형 밑에서 돌봐주며 솔직한 성격을 지녔다.

고등학교 시절 스카우트로부터 주목받지 못하고 초완 대학교로 진학했다가 3학년 때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로 편입한 후, 짐 발바노(1946~1993)[1]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ACC 우승을 기록했고, 2년 연속으로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 준결승에 진출하며 베스트 8까지 이끌었다.

2.2. 선수 시절

1986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30순위로 시애틀 슈퍼소닉스에 지명되어 입단 첫 시즌 때 선발 자리를 잡으며 평균 8.2어시스트를 찍었고,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전에서 25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어니 디그레고리오가 수립한 신인 기록을 세웠다.

특히 수비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1993-94 시즌 스틸왕[2]에 이어 1993-94, 1995-96시즌에는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렸다.

1995-96시즌에는 생애 처음으로 NBA 파이널 무대에 진출해 동부 컨퍼런스 챔피언 시카고 불스1996 NBA 파이널에서 맞붙었으며 2차전과 3차전은 등 통증과 햄스트링 부상 등으로 나서지 못했지만, 4차전은 부상에서 돌아와 마이클 조던을 마크하는 활약을 내세우며 전승 우승을 막을 수 있었다. 시리즈 최종 전적은 2승 4패.

1997-98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하였으며 맥밀란이 사용했던 10번은 소닉스에서 영구결번이 되었다.[3]

2.3. 지도자 시절

2.3.1. 시애틀 슈퍼소닉스

선수 은퇴 후, 소닉스의 어시스턴트 코치에 취임하였으며 2000-01 시즌 중반 성적부진으로 감독직에서 경질된 폴 웨스트팔을 대신해 감독 대행을 맡으며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데 실패했지만, 정식 감독이 된 2001-02 시즌에는 새로 들어온 삼촌뻘 코치 딘 데모폴루스[4]로부터 지역방어를 터득해내 45승 37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당시 허용된 지역방어의 수혜자가 됐다. 2004-05 시즌에는 라샤드 루이스, 레이 앨런 등을 선발로 출전시키는 지도를 내세워 첫 노스웨스트 디비젼 우승을 달성했고 동시에 컨퍼런스 준결승에 진출하기까지 이르렀다.(5시즌 통산 212승 183패, 승률 .537)

2.3.2.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2005-06시즌부터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감독으로 옮겨가 7시즌을 보냈으며, 이곳에서도 지역방어를 팀에 적용시켰다. 첫 시즌에는 텅 비어버리다시피 한 선수단 탓에[5] 2할대의 승률에 그쳤으나, 2006년 드래프트 때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뽑은 브랜든 로이를 받아 팀을 빠르게 정상궤도로 올려 놓으면서 매 시즌 승률이 올라갔고 2009년부터는 2011년까지 세 시즌 연속으로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2008-09시즌의 .659를 정점으로 매년 승률이 떨어져 2011-12시즌에는 5할을 밑돌게 되자 결국 경질당하고 말았다.(7시즌 통산 266승 269패, 승률 .497)

2.3.3. 인디애나 페이서스

이후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코치를 맡던 맥밀란은 2016년에 재계약에 실패한 프랭크 보겔[6]을 대신하여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맥밀란이 감독으로 있었던 4시즌 동안 페이서스는 4번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지만 2017-18 시즌에 르브론 제임스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3승 4패로 탈락한 것을 제외하면 전부 4패로 스윕패를 당했다. 팀 역시 5할 이상의 승률은 꾸준하게 거뒀지만 우승권에는 근접하지 못하고 플레이오프 중하위권 시드 정도를 오르내렸다.

계약 마지막 해인 2020년에는 감독직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들려올 정도로 위태했지만[7][8] 정규시즌 종료 직전 구단은 소문과는 정반대로 그에게 1년의 연장계약을 안겨주었다. 덕분에 자리가 안전해지는 듯 했지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5번시드 마이애미 히트[9]를 상대로 4연패하며 또다시 스윕당하자 연장계약 10여 일만에 경질당하고 만다.(4시즌 통산 183승 136패, 승률 .574)

2.3.4. 애틀랜타 호크스

인디애나에서 경질당한 뒤 맥밀란은 코치로 애틀랜타 호크스에 합류했다. 그리고 첫 해인 2020-21 시즌 초반에 팀이 심각한 부진을 겪자(14승 20패, 승률 .412) 구단은 감독이던 로이드 피어스를 경질하고[10] 맥밀란을 임시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맥밀란 취임 직후 애틀랜타는 곧바로 8연승을 내달리는 등 교체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맥밀란 부임 후 총 27승 11패, 승률 .711[11]) 덕분에 10권 언저리에서 머물던 팀성적은 최종순위 5위로 뛰어오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여유있게 성공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 상대가 뉴욕 닉스로 정해지자 맥밀란은 "사무국은 닉스의 활약을 기대할 것이다."라는 발언을 하였고[12] 결국 2만 5천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다.[13] 덕분인지 시비가 될 정도의 편파판정은 받지 않았으며 호크스는 닉스를 4승 1패로 꺾고 2라운드에 진출했다. 닉스의 에이스 줄리어스 랜들을 아예 안 보일 정도로 무력화시켰으며 랜들을 대신 해 에이스 역할을 하던 데릭 로즈마저도 4차전부터는 봉쇄시키는 등 좋은 공격과 수비를 조화롭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맥밀란의 수비 분석(매니아)

2라운드에서는 동부 1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맞았지만 1차전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며 기분좋은 출발을 하더니 4차전에서는 18점차로 뒤지던 경기를 역전시키며 잡아낸데 이어 5차전 원정에서는 무려 26점차[14]를 뒤집으며 대 역전승을 거뒀다. 필라델피아의 닥 리버스의 경직된 벤치 로테이션을 파고들었으며 핵-어-시몬스 작전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6월 20일에는 7차전까지 잡아내면서 팀을 컨퍼런스 파이널로 진출시켰다. 시리즈 동안 감독 간의 수싸움에서도 리버스보다 우위를 가져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3번 시드 밀워키 벅스와 맞섰다. 하지만 주축선수들의 잇따른 부상[15] 등의 여파에 2승 4패로 탈락하고 말았다.[16]

그럼에도 기대 이상의 선전을 거둔 덕분에 호크스의 플레이오프는 호평을 받았으며 뛰어난 지도력을 보인 맥밀란 감독 역시 덩달아 주가가 올랐다. 덕분에 시즌 종료 후 맥밀란은 호크스과 4년의 계약을 맺으며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22-23 시즌 도중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으로 경질되었다.

3. 수상 내역

수상 내역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2회 (1994, 1995)
파일:NBA 로고.svg NBA 스틸왕 (1994)

4. 여담

  • 포틀랜드에서 감독으로 재직하던 당시 하승진을 지도한 바 있다. 하승진을 밀워키로 트레이드시킨 감독이지만 하승진은 맥밀란 감독에 대해 친절하고 신사적이며 선수들에게 용기를 주는 감독이라 이야기하며 매우 좋게 평가한다. 반면 밀워키에서 하승진에게 방출통보를 한[17] 테리 스토츠 감독[18]은 하승진의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19]


[1] 별명은 'Jimmy V'. 1980년부터 10년 동안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농구부 감독을 맡으며 1983년 NCAA 전국대회 당시 썰 베일리, 시드니 로 등 'Cardiac Pack'들을 이끌어 결승전에서 휴스턴대를 꺾은 뒤 우승 트로피를 따냈고, 맥밀란 외에 크리스 워시번과 처키 브라운 등 유망주들을 키우며 ESPN과 ABC 등지에서 농구 해설위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1989년 피터 골렌복 작가의 저서 《Personal Foul》을 통해 크리스 워시번의 SAT 미달 및 부정입학, 선수들의 경기 관람권 판매 등 온갖 비리가 폭로되면서 NCAA의 조사가 시작되어 1990년 전국대회 출전 금지 등의 징계를 받았고, 1989-90 시즌을 끝으로 불명예 퇴진했다. 1992년부터 골수암으로 투병하며 '지미V 재단'을 세워 암 연구 지원을 활성화시키도록 했으며, 1993년 3월 '아서 애쉬 용기와 박애상'을 받고 2개월 후 숨졌다.[2] 팀은 NBA 전체 정규시즌 1위(63승 19패)를 기록했으나 플옵 1라운드에서 8위 덴버 너기츠에 2승 3패 리버스 스윕업셋을 내준다.[3] 하지만 후신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가 시애틀의 역사를 계승하지 않음에 따라 사실상 무의미해진 상태.[4] 1983년부터 17년간 템플 대학교 코치로서 존 체이니(1932~2021) 감독을 모신 바 있다.[5] 2000년대 초반 포틀랜드는 스타들은 많았으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하도 많이 일으킨다고 하여 'JailBlazers'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덕분에 팀성적이 나락으로 떨어지자 팀에서는 선수단을 대거 재편하고 재정비를 노렸다. 맥밀란이 부임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6] 한 때는 르브론 제임스마이애미 히트와 자웅을 겨룰 정도의 강팀이었으나 에이스인 폴 조지의 부상 등으로 전력이 약화된 것을 재정비하는 차원에서 감독 교체가 이루어진 것. 보겔은 이후 2020년에 LA 레이커스에서 감독으로서 우승을 차지했다.[7] 가장 자리가 위태로운 감독 중 1순위로 손꼽혔다.[8] 시즌 승률 .616으로 4번 시드를 획득한 만큼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애초에 인디애나의 목표는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시즌 이전까지 3번의 플레이오프에서 2번을 무기력하게 1라운드 스윕으로 내준 것도 컸다.[9] 인디애나를 이긴 마이애미는 파이널까지 올라가서 준우승을 차지.[10] 성적도 좋지 않았지만 트레이 영을 비롯한 젊은 선수들과의 불화가 더 컸다.[11] 동부 1위 필라델피아의 시즌 승률(.681)보다 높다![12] 미국 최대의 도시 연고팀 + 8년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이니 흥행보증수표가 따로 없긴 하다.[13] 편파판정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기싸움으로 먼저 선수를 친 것. 몇십 년 전부터 NBA 감독들이 종종 써먹던 방법이다.[14] 전반 종료기준 역대 3번째 점수차이 역전 : 22점(40-62)[15] 에이스 트레이 영이 심판의 발을 밟으면서 발목을 심하게 다쳤고 보그단 보그다노비치는 무릎부상으로 돌파 공격을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16] 사실 부상 탓을 하긴 뭐한게 벅스는 팀 내 비중이 트레이 영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야니스 아데토쿤보가 무릎부상으로 5, 6차전에 결장하는 악재를 겪었다. 그나마 호크스는 캠 레디시가 시리즈 중간에 돌아와서 힘을 보태기라도 했지만...[17] 방출은 단장/사장 등의 프런트 선에서 결정되었을 것이고 스토츠는 결과 통보만 했을 것이다. 선수단 구성은 프런트의 고유 권한/업무이고 당시의 스토츠처럼 경력도 얼마 안 되고 스타 출신도 아닌 감독들은 여기에 개입할 수조차 없다.[18] 얄궂게도 맥밀란의 후임 포틀랜드 감독이 된다.[19] 당시 하승진은 개막 전 트레이닝 캠프에서 부상당하고 시즌 전에 방출되었기 때문에 스토츠와 별다른 시간을 보낸 적도 없을 것이고, 2년간 교류한 맥밀란과 달리 "날 방출한 작자" 정도 이미지 밖에 남을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