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0:20:45

니콜라이 리시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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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10대 장관회의 주석
니콜라이 리시코프
Никола́й Рыжко́в | Nikolai Ryzhkov
파일:16019_original.jpg
본명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리시코프 (러시아어)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ыжко́в
Nikolai Ivanovich Ryzhkov
미콜라 이바노비치 리지코우 (우크라이나어)
Микола Іванович Рижков
Mykola Ivanovych Ryzhkov
출생 1929년 9월 28일
소련 우크라이나 SSR 도네츠크주 아르툐몹스크군 딜리옙카
(現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 바흐무트군 딜리옙카)[1]
사망 2024년 2월 28일 (향년 94세)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묘소 트로예쿠롭스코예 묘지
재임기간 제10대 장관회의 주석
1985년 9월 27일 ~ 1991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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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이반 표도로비치 리시코프
어머니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리시코바
배우자 류드밀라 세르게예브나 리시코바
자녀 딸 마리나 니콜라예브나 구티나
학력 우랄 주립 기술대학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의원 대수 2, 3 (두마)
약력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경제 담당 서기
제10대 소련 장관회의 주석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의원
러시아 연방평의회(상원) 의원
주요 서훈 10월 혁명 훈장
노력적기훈
러시아 연방 노력영웅
레닌훈장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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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창기2.2. 정계활동
3.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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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러시아정치인이자 테크노크라트이며, 소련의 마지막 장관회의 주석이다.[2]

2. 생애

2.1. 초창기

1956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1959년 우랄 주립 기술대학을 졸업했으며 루간스크주의 스베르들롭스크[3] 시 우랄마시 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했고, 이 시기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던 안드레이 키릴렌코 장관회의 주석을 만나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2.2. 정계활동

2.2.1. 소련 시절

당시 친 브레즈네프 성향의 좌장 키릴렌코가 이끄는 파벌에 있던 인물이다 보니,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신임을 얻어 1975년 화물교통부 제1차관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주석에 임명되었고, 1981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진출했다. 1982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로 선출된다.

1982년을 기점으로 키릴렌코가 건강상의 이유로 2인자로 밀려나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에 임명되자, 브레즈네프와는 노선을 달리한 친 안드로포프 성향의 개혁파가 권력을 잡았다. 더군다나 브레즈네프가 사망하면서 친 브레즈네프 세력의 중심은 브레즈네프의 심복이었던 콘스탄틴 체르넨코의 파벌로 변하면서 리시코프의 정치 생명이 끝나는 줄 알았으나, 그가 공장장으로 일할 때 태업을 적극적으로 막았던 행적이 '브레즈네프가 산업 현장 지도를 방임한 영향으로 노동자들이 태업하는 것'이라고 우려하던 안드로포프의 눈에 들어오게 되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경제 담당 서기에 임명된다. 이때 리시코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만났고, 경제 담당 서기로서 안드로포프의 정책을 잘 수행하여 소련을 잠시나마 부흥기로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안드로포프가 사망한 후 브레즈네프 파벌의 좌장이자 리시코프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체르넨코가 서기장에 임명되었다. 때문에 중앙위원회 경제 담당 서기인 리시코프의 의견이 체르넨코의 반대에 부딪혀 대부분 무산되었다.[4] 그러나 체르넨코 사후, 체르넨코 파벌에서 급부상하던 빅토르 그리신 모스크바 시당(市黨) 제1서기와의 후계경쟁에서 고르바초프가 완승하자[5] 리시코프는 오히려 지위가 더 낮아졌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펼친 반() 알코올 캠페인 당시 리시코프는 암시장의 활성화와 주류시장 타격을 예상하여 캠페인을 적극 반대했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1985년 10월 전원회의에서 서기에서 해임되었다.

1986년 시작된 제12차 5개년 계획에서는 생산품의 생산량과 질을 향상시키자는 고르바초프를 지지했다. 그러나 기계 품질 향상과 전반적인 투자량 확대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를 놓고, 기계 품질 향상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얻을 방법이 없는 것을 안 고르바초프, 그리고 투자량 확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리시코프가 갈라섰다. 결과적으로 무리하게 안드로포프식 방식을 추진한 고르바초프의 정책과 미래에 대한 생각 없이 브레즈네프식의 다소 뒤떨어진 방식을 추진한 리시코프의 정책은 모두 중단됐다.

1986년 우크라이나 SSR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일어나면서 원전 반경 30km 내의 많은 사람들을 대피시킴으로써 우크라이나계 정치인의 좌장으로서 이름을 알렸다.[6]

1987년 리시코프와 고르바초프는 기업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기존의 브레즈네프식의 방임과는 다른 방식인 기업주의 권한 축소로 노동자을 증가시켰지만, 결과적으로 그 힘이 너무 커져서 실패했다.

1988년에 그는 아르메니아 SSR에서 일어난 아르메니아 대지진 복구를 하겠다며 나섰고,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소련 전역에서 큰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공황으로 인한 정부 예산 부족으로 전체 복구에는 실패했지만, 국민들 관심 돌리기에 바빴던 고르바초프보다는 행동으로 나선 리시코프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았고 그는 고르바초프의 라이벌로 부상한다.

1988년 점진적 시장경제 도입을 꾀한 페레스트로이카 추진 당시 급격한 민영화가 불러올 악영향을 깨달은 리시코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극구 반대했다. 리시코프의 규제 시장경제 정책[7]부패한 관료들이나 브레즈네프 독트린 파기를 우려한 군부, 그리고 지식인들을 막론하고 큰 지지를 받았지만, 그의 정책이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소련이 해체되었고, 새로 거듭난 러시아 연방은 페레스트로이카에 버금가는 급격한 시장경제화를 맞이했다.

리시코프와 고르바초프의 실책(제12차 5개년 계획, 기업에 관한 법률)을 사실상 전혀 검토하지 않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경제부를 폐지시켰고, 중앙정부의 힘을 강화시켜 보다 효율적인 경제정책 시행을 꾀했지만, 1990년 고르바초프가 대통령 직위를 도입하며 정부의 힘을 약화시키자 둘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1990년 리시코프의 지지율은 빠르게 떨어졌지만, 지방정부를 강화시켜 소련 해체에 영향력을 미친 리시코프의 경제 개혁안[8]은 결함이 심각할 정도로 많은 보리스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500일 계획'과 다르게 높이 평가되었다. '500일 계획'은 특히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관계설정을 잘못하여 소련 해체를 불러오게 된다.

리시코프는 러시아 SSR 최고회의의 내각 불신임안 통과 실패 이후에도 러시아 SSR 최고회의 주석이던 옐친과 500일 계획에 관한 타협에 실패하여 빠르게 지지를 잃은 끝에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에게 패했다.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 SSR은 이 선거를 기점으로 소련에게서 차례차례 벗어나기 시작했다.

2.2.2. 소련 해체 이후

소수정당을 세우고 러시아에서 계속 활동했으나, 겐나디 주가노프를 지지하며 2003년에 국가두마 의원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곧 같은 해에 연방평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2014년 크림 위기 당시 러시아군크림반도 합병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때문에 미국서방으로부터 제재조치를 당했다.#

2024년 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95세. 장례식은 3월 1일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트로예쿠롭스코예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소련 공산당|]]
1956 - 1991 입당
정계 입문
인민에게 권력을 1995 -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2024 사망


[1] 딜리옙카는 바흐무트(아르툐몹스크)에서는 20km 넘게 떨어져 있다. 토레츠크 북쪽 4km 지점 철로상에 있는 마을이다.[2]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장관회의는 소련 내각으로 변경되었고 장관회의 주석 또한 소련 총리로 변경되었다.[3] 예카테린부르크 시와 다르다. 2016년 우크라이나가 도우잔스크(Довжанськ)로 개칭했으나, 한번도 실효통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에 속하는 도시이다.[4] 리시코프는 안드로포프가 5년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중국의 개방정책와 비슷하게 소련이 개방되어 소련 해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의 경제 정책을 평가하며 회고했다.[5] 워싱턴포스트 모스크바 지국장을 지내기도 했던 미국 기자 마이클 돕스의 역사서 <1991>에 따르면, 비록 체르넨코 파벌이 당시 소련의 기득권 세력이긴 했지만, 고르바초프의 대항마로 나온 그리신부터 당시 70세의 고령이었을 만큼 주요 지도자들의 노령화가 심했던 데다, 체르넨코가 오늘내일 하던 시절, 그리신이 공식석상에서 체르넨코를 보란 듯이 부축하며 다음 총서기가 되고 싶다는 듯 아부를 떠는 모양새가, 노령화된 기득권층의 무능 탓에 정체된 소련의 실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정치국 내 개혁파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고르바초프의 승리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6] 다만 정확히 30km 반경은 아니었고, 일부 오염지역은 방치된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그가 정부를 대신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출한 것은 공이 맞다.[7] 시장경제 도입을 민간기업과 공기업 사이에 위치한 기업 다수를 창출한 후 서서히 사회민주주의를 도입하는 사상. 리시코프는 시장경제의 본격적인 도입 시기를 1992년으로 잡았다.[8] 가격 자유화, 중앙정부 통제 유지, 단계적 민영화, 무상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