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배경
다이애나는 타곤 산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의 부모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동상으로 사망했고, 그 사이에 포대기로 감싸진 그녀를 솔라리 사냥꾼 무리가 발견한 것이었다. 다이애나의 부모는 이방인이었고, 먼 길을 걸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사냥꾼들은 다이애나를 자신들의 사원으로 데려와 '라코어'로 알려진 마지막 태양 부족의 일원으로 키웠다. 다이애나는 솔라리의 신앙에 따라 엄격한 신체 훈련과 종교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부족의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는 솔라리 고유의 행동 양식을 명확히 이해하고 솔라리 신앙의 근거를 알고 싶어 했다. 이러한 호기심에 매일 밤 도서관으로 이끌린 다이애나는 희미한 달빛에 의지한 채 온갖 책들을 탐독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이를 통해 얻은 것은 답이 아니라 더 많은 의문이었고, 스승들의 격언에 가까운 상투적인 답변은 결코 그녀의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책이 통째로 찢겨 나가고 달에 대해 언급된 부분이 모두 사라진 것을 다이애나가 발견하자, 스승들은 엄한 벌을 내려 그녀가 솔라리 신앙에 전념하게 만들고자 했다. 또한 그녀의 동료 수련생들은 의문을 품는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힘겨운 고독의 시간 속에서도 그녀에게 힘이 되는 빛이 있었으니, 바로 레오나였다. 다이애나의 동료 중 가장 신앙심이 깊은 솔라리였던 레오나는 다이애나와 자주 열정적인 토론을 벌이곤 했다. 비록 서로를 설득시킬 순 없었지만, 오랜 대화를 자주 나누며 둘 사이엔 우정이 싹텄다. 어느 날 밤 다이애나는 타곤 산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장소를 발견했다. 달빛이 그곳의 벽면에 드리우자 타곤 산 정상에 금빛 갑옷의 군인들과 은빛 갑옷의 전사들이 함께 있는 모습, 그리고 태양과 달의 형상이 나타났다. 다이애나는 기뻐하며 이 사실을 레오나에게 알리기 위해 달려갔다. 태양 부족과 달 부족은 사실 서로 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오나는 이 얘기를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이교도 같은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려 했다간 어떤 형벌이 주어질지 모른다며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 다이애나는 레오나가 진지한 성격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진지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이애나는 괴로워했다. 솔라리 부족에 대한 궁극의 지식을 얻게 되었지만, 레오나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는 지식이라니. 솔라리가 진짜로 숨기고 있는 건 무엇일까?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은 타곤 산 정상뿐이었다. 타곤 산을 오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상을 향해 오르는 동안 마치 시간이 멈춰 있는 것만 같았다. 다이애나는 살아남기 위해 솔라리를 좀 더 완벽하게 만들어 줄 답과 자신의 유일한 친구를 생각하며 마음을 집중했다. 정상에 다다르자 다이애나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밝고 꽉 찬 달이 그녀를 맞이했다. 황홀한 순간이 지나자 달빛 기둥 하나가 그녀를 비췄고, 어떤 존재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존재는 과거와 라코어의 또 다른 신앙인 루나리에 대한 기억을 다이애나에게 보여 주었다. 다이애나는 이 존재가 전설 속 성위 중 한 명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성위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빛이 희미해지자 다이애나는 자신의 의식을 되찾았다. 그녀의 몸에는 갑옷이 걸쳐져 있었고, 손에는 초승달 검이 들려 있었으며, 검은색이었던 머리는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는 레오나가 서 있었다. 레오나는 빛나는 금빛 갑옷을 입은 채 태양 빛이 뿜어져 나오는 방패와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이와 같은 계시의 순간을 친구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레오나의 머릿속은 오로지 솔라리로 돌아가려는 생각뿐이었다. 다이애나는 새로운 미래를 함께해야 한다며 말려 보았지만, 레오나는 거절했다. 의견 충돌은 곧 엄청난 싸움으로 번지며 달빛과 태양 불꽃이 폭발적으로 번쩍였다. 성위의 힘에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다이애나는 결국 산 아래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추구해 온 자신의 탐구가 정당한 것이며 솔라리 교리에 의문을 품은 것이 올바른 행동이었다고 확신했다. 이제 그들에게 정면으로 맞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입증할 때가 온 것이다. 다이애나는 라호락의 수호자들을 지나쳐 고위 성직자들이 있는 곳으로 난입했다. 그녀가 루나리에 대해 알아낸 사실을 풀어놓기 시작하자 성직자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그녀를 이교도, 신성 모독자, 가짜 신을 신봉하는 자로 몰아세우며 비난을 쏟아부었다. 이에 다이애나는 분노했고, 그 분노는 내면의 성위로 인해 더욱 커졌다. 그녀가 분노를 받아들이자 달빛이 무시무시한 폭발을 일으켰다. 놀란 그녀는 사원을 도망치듯 떠났다. 그 뒤에 남은 것은 쓰러진 주검들뿐이었다. 반쯤 기억해 낸 환영과 옅은 고대 지식의 흔적으로부터 원동력을 얻은 다이애나는 이제 명확하게 밝혀진 사실만을 믿는다. 루나리와 솔라리는 서로 적이 될 필요가 없으며, 타곤 산의 솔라리 수련생으로 사는 것보다 더 위대한 목적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운명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다이애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든 그 운명을 찾아 나서고 말 것이다. |
2. 밤의 할일
다이애나는 늘 밤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솔라리 사원의 담장을 기어올라가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달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지금도 그녀는 보랏빛 눈동자로 은색 달을 열심히 좇았다. 하지만 울창한 숲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짙은 구름과 검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흐릿한 빛만 새어들 뿐이었다. 걸어가면 갈수록 나무들이 점점 더 빽빽해졌다. 이끼로 뒤덮인 시커먼 나뭇가지들이 뒤틀린 팔을 내뻗듯 하늘로 뻗쳐 올라갔다. 숲길은 무성한 수풀과 찔레덤불에 막혀버렸고, 달빛도 잘 들지 않아서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그녀의 갑옷을 긁어대는 소리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이애나는 눈을 감고서 머릿속의 기억에 의지해 앞길을 더듬었다. 다이애나 자신의 기억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공유하는 어떤 미지의 존재가 지닌 기억의 조각들 중 하나였다. 눈을 떠보니, 그녀 앞에 펼쳐진 빽빽한 숲의 풍경 위로 또 다른 숲의 잔상이 아른아른 겹쳐져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 숲의 예전 모습이 보였다. 나무들이 더 어리고 생기 넘치던 시절, 가지마다 열매가 맺히고 들꽃이 피고 오솔길에 빛이 아롱지던 시절의 모습이. 다이애나는 평생 험하고 황량한 타곤 산에서만 살아왔다. 저렇게 온화한 숲의 풍경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보이는 저 환상이 타곤 산의 과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풍경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인동덩굴과 재스민의 짙은 향기까지도 생생하게 맡아졌다. 그 시절의 숲이 온전히 되살아난 것처럼. “고마워.” 다이애나는 그렇게 속삭이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고대의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솔길은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과 시들어가는 나무들 사이로 구비구비 이어졌다. 모두 오래 전에 이미 죽었을 고대의 나무들이었다. 다이애나는 바위투성이 언덕, 소나무와 전나무 숲, 세차게 흐르는 시냇물을 지나, 깎아지르듯 가파른 절벽을 휘감는 비탈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 마침내 탁 트인 고원에 이르렀다. 저 밑으로는 거대하고 차디찬 검푸른 빛깔의 호수가 내려다보였다.고원 한가운데에는 높다란 거석들이 원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저마다 나선이며 곡선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문자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낯익은 문자가 눈에 띄었다. 다이애나의 이마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룬 문자와 똑같은 문자가 모든 거석에 새겨져 있었다.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 분명했다. 다이애나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이곳에서 난폭하고도 위험한 마법과 맞닥뜨릴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녀는 거석들을 향해 다가가면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주변을 경계했다.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이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매우 위협적이면서도 친숙한 존재들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거석들로 이루어진 원 안의 중심부에 서서 검을 뽑았다. 초승달 모양의 검날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창백한 달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검 끝을 땅에 대고 무릎을 꿇어 앉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그때 공기가 흔들렸다 기압이 뚝 떨어지고, 공기 중에 어떤 기운이 스미는 것이 느껴졌다. 다이애나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석들 사이의 시공간이 찢어지면서 괴물 세 마리가 튀어나왔다. 상아색 피부에 뼈처럼 새하얀 갑각류의 껍데기가 덮인 괴물들이었다. 놈들은 소름끼치는 괴성을 내지르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녀에게 달려들어 강철 발톱을 휘두르고 이빨을 들이댔다. 공포. 다이애나는 재빨리 몸을 숙여 피했다. 그녀를 물어뜯으려 했던 괴물의 반질반질한 흑단 같은 이빨이 딱 하고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다이애나는 머리 위로 검을 휘둘러 그 괴물을 베었다. 한 바퀴 굴러 일어서보니, 남은 괴물 두 마리가 이리떼처럼 다이애나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그녀가 든 검을 이제야 알아보고 경계하는 눈치였다. 아까 다이애나가 벤 괴물은 삽시간에 몸 전체가 녹아내려서 부글부글 끓는 타르 웅덩이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놈들이 다시 덤벼들었다. 양편에서 동시에 달려드는 괴물들의 살이 어느새 검푸른 빛깔로 변색된 게 보였다. 본래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라, 이곳의 공기가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다이애나는 죽은 괴물의 잔해를 뛰어넘으면서, 루나리의 성스러운 구절을 외치며 검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검날에서 눈부신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섬광에 직격당한 괴물의 몸뚱이가 파열되었다. 다이애나는 마지막 괴물의 공격을 피하려고 몸을 옆으로 젖혔다. 그러나 한 발 늦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강철 갑옷의 가슴받이를 파고들더니 그녀를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놈의 가슴이 입처럼 쩍 갈라지면서, 그 안에 뒤엉켜 있는 점액성 감각 기관들과 구부러진 이빨이 드러나 보였다. 놈이 그 이빨로 다이애나의 어깨를 베어 문 순간, 뼛속까지 마비될 듯한 차가운 감각이 온몸에 쫙 끼쳐올랐다. 다이애나는 비명을 지르며 검의 자루를 단도처럼 고쳐 쥐고서 괴물을 찔렀다. 그러자 놈이 괴성을 내뱉으면서 다이애나를 놓아주었다. 검에 찔린 부위에서 끈적거리는 검은 액체가 쏟아져나왔다. 다이애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그녀가 초승달 검을 옆으로 내뻗자, 하늘에 짙게 끼었던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그녀의 피 맛을 본 괴물은 더 먹고 싶다는 듯 탐욕스럽게 그르렁거렸다. 그 몸뚱이는 이제 완전히 검은색과 자주색으로 변해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놈의 몸에서 삐죽삐죽한 톱날이 달린 두 팔이 뻗어나오더니, 팔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수많은 갈고리와 발톱으로 변했다. 그리고 살갗이 액체처럼 꾸물꾸물 움직이면서 상처 부위가 저절로 재생되었다. 다이애나는 속이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안에 깃든 미지의 존재가 아주 먼 옛날부터 품어온 증오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눈앞에 어떤 환영이 보였다. 그건 고대에 일어났던 끔찍한 전쟁의 기억이었다. 그 전쟁 때문에 온 세상이 무너질 뻔했다. 하마터면 지금의 바로 이 세상마저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릴 뻔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이 세상은 그런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괴물이 다이애나에게 달려들었다. 그 몸에서 이계의 에너지가 물결치듯 흘러넘쳤다. 그때 하늘의 구름들이 완전히 흩어지면서 찬란한 은색의 빛줄기가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그 광선을 빨아들인 다이애나의 검이 밝게 빛났다. 그녀는 밤의 빛으로 가득한 그 검을 처형인처럼 내리쳐, 괴물을 단칼에 베었다. 눈부시게 폭발하는 섬광 속에서 괴물은 그 즉시 분해되었다. 놈의 몸뚱이는 밤 공기 속에 완전히 사라졌고,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해진 벌판에 다이애나 혼자 남았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면서 몸을 추스르는 동안, 지금껏 그녀와 한 몸이 되어 움직였던 미지의 존재는 어딘가 더 깊은 곳으로 물러났다. 어느 텅 빈 도시의 환영이 눈앞을 스쳤다. 한때는 생기로 가득했던 도시가 적막하게 변해버린 풍경이었다. 다이애나는 그 도시가 어디인지도 모르는데도 불현듯 슬퍼졌다. 그러나 슬픔의 근원을 되짚어볼 새도 없이 환상은 희미해지다가 이내 사라져버렸다. 괴물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거석들이 모두 은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장소의 다른 차원에 존재했던 사악한 존재의 숨결이 제거되고 나니, 거석들에 깃들어 있던 본래의 치유력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 치유력이 땅 전체에 퍼져나가면서 바위들과 나무 뿌리들을 적시고 지하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밤의 일은 끝났군. 이 통로는 봉인되었다.” 다이애나는 저 아래의 호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수면에 비친 달이 그녀에게 손짓하듯 어른거렸다. 그녀의 몸과 영혼을 모두 끌어당기는 듯한, 못 견디게 강렬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내일 밤에도 할 일은 있는걸.” 다이애나는 누군가를 달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
3. 함께 떠오르자
들으라! 위대한 산 위에서 태양의 소중한 존재가 그녀에게 노래하네 사랑과 헌신의 노래 전투와 영광의 노래를 황금빛 태양, 그녀의 빛은 우리의 얼굴을 따스하게 감싸고 우리의 적을 그슬려, 신성한 재로 태워 버리네 허나 빛나는 태양도 쉬어야 하는 법 그렇게 그녀 없이 남겨진 우리는 추위에 떠는 무방비한 상태로 어둠 속 사냥꾼의 처분을 기다리네 잠드는 그녀를 보며 슬퍼하는 우리 그녀가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마지막으로 깜빡이는 황혼의 빛은 스러져 가는 작별의 입맞춤이네 허나 그녀가 몹시 그리워지는 밤 길고 혹독한 어둠이 다가오면 그녀에게 더 오래 있어 달라고 그녀의 음악에 맞춰 춤추자고 설득하네 황혼의 입맞춤이 길어지네 겨울의 손아귀를 녹이는 맹렬한 불꽃 밤새도록 깨어 있는 태양은 여명까지 달콤한 비밀을 속삭이네 그녀를 위해 잔잔한 어둠과 싸우는 우리 우리를 향한 그녀의 사랑을 위해 우리는 그녀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우리의 영광을 바치네 여명의 찬가 16번 석판, 33~60행 백열의 대사제 탈라이아의 서한 천저까지 40일 서광의 승리 사원에 거주하는 충직한 젊은이들에게 또다시 산에 겨울이 밀려오자 그분은 매일 태양의 길을 따라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갈수록 짧아지는 낮을 보며 두려움에 떠는 대신 불야의 전야제를 준비합니다. 이제 겨우 마흔 번의 일출이 남았군요. 알고 있는 수련생도 있겠지만 이번 축제에서 사원은 오랜 세월 사용해 온 것과 다른 신성한 등유리를 사용하여 첫 번째 태양불꽃 횃불에 불을 붙일 것입니다. 과거의 신물보다 밝게 빛날 신물을 만들어 준 태양벼림공 이아수르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러나 지난 하지에 사원 등유리를 깨뜨린 자에게는 엄히 벌을 물을 것이니 누구든 이 일에 관해 아는 게 있다면 용기를 내 나서 주길 바랍니다. 첫 방패를 받을 나이가 된 사람은 불야의 전야제에 참석하여 춤과 노래를 통해 태양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다른 수련생과 함께 영광스러운 일출을 보고 싶다면 짝을 이루어 참석해도 좋습니다. 우리의 헌신만이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신참 사제 엘시네가 자신이 담당했던 수련생에게 보낸 편지 천저까지 38일 낮의 축복을 받은 다이애나에게 네 스승이신 태양의 사제 네미아 님께서 네 행동을 바로잡아 달라며 걱정스러운 얘기를 전해 주시더구나. 듣자 하니 네가 우리 가르침에 의심을 표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 질문하는 것은 좋지만 스승들이 성전을 잘 알지 못한다고 넌지시 표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넌 너보다 더 오랫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의 지혜와 믿음을 전수해 주려는 이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단다. 그들의 결론이 네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해도 말이야. 알고 있겠지만 네 스승들은 너와 나처럼 필멸자에 불과해. 우리 중 그분의 영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하지만 네가 입회 서약을 할 때까지는 사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꺼내선 안 돼. 네미아 님 정도의 지위에 오른 사제들은 겨우 열네 살이 된 수련생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거든. 그랬다간 도리어 벌만 받을 거야. 지금은 처신을 조심하고 침묵을 지키렴. 정중하게 행동할 자신이 없으면 더 깊이 파고들려고 하지 말아야 해. 네가 다른 수련생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스승의 노여움을 산 아이와 친해지기는 쉽지 않으니까. 그러고 보면 지난해 널 담당했을 때 네가 신참 사제 니신데와 언쟁을 벌인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지. 자, 우리끼리 얘기했을 때 네가 보여 준 것처럼 네 내면의 빛을 밝게 빛내 보렴. 그럼 다른 수련생들도 가까이 다가올 거야. 내 조언을 따르겠다고 약속한다면 웅변 수업에서 네가 다시 발언할 수 있도록 네미아 사제님께 잘 말씀드려 보마. 그렇지 않으면 널 대변해 줄 수 없어. 빛을 담아, 신참 사제 엘시네 라코어의 고아 다이애나의 일기 천저까지 38일 네미아 사제님께 왜 밤을 '어둠'이라고 부르는지 물어본 건 너무 과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밤은 어둡지 않다. 완전히는 아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대신 여름날의 개울처럼 시원하고 온화한 빛이 별과 함께 빛나며 내가 걷는 길을 밝혀 준다. 그럼 우리는 왜 태양만 얘기하는 걸까? 이 또 다른 천상의 존재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태양의 빛만 봐야 할까? 하지만 웅변 수업에서는 절대 이 얘기를 꺼내지 않을 생각이다. 네미아 사제님이 내가 수업을 방해했다거나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면서 앞으로 자신의 밑에서 수업을 받는 동안은 수업 시간에 발언하지 못하게 했다. 마음대로 하라지. 다른 수련생들이 예쁜 시를 늘어놓으면서 그럴싸한 논의를 하려고 애쓰다 결국 같은 시구를 계속해서 반복하면 결국 난 두 손 두 발 다 들고 사제님께 제발 발표자와 저 엉성한 결론을 갈가리 찢게 해 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다. 오늘 수업에서는 다가오는 축제에 관해 논의해야 했다. 세비나는 방패를 들 나이가 된 다른 친구들과 처음으로 불야의 전야제를 보내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발표했다. 그게 끝이었다. 논지는 그게 다였다. 그러니까 축제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게 이야기의 전부였다. 으. 왜 네미아 사제님이 이런 애는 놔두면서 나한테만 벌을 주는지 모르겠다. 자원해서 일어난 레오나가 그 말에 반박해 보려고 했지만 어떤 감정을 느꼈다는 말에 반박하는 게 가능한가? 이런 논지에는 자신은 태양을 올바른 방식으로 섬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힘들다거나 긴장된다는 등 다른 감정을 느낀다는 식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는 웅변은 아니었지만 레오나는 적어도 노력은 했다. 게다가 어둠이 컴컴한 것이니 어쩌니 하는 얘기도 해서 관심이 갔다. 사악하다고 한 게 아니라 컴컴하다고 했다. 둘은 전혀 다른 것이다. 레오나의 말이 끝난 후 발언하고 싶었던 나는 어둠에 관한 질문부터 던졌다. 하지만 진짜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라 질문을 가장한 동의의 표현이었다. 축제는 사람들이 태양을 더욱더 찬양하도록 몰아붙이는 방식일 뿐이라는 말, 우리가 각자의 방식으로 그분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대신 정통적 신념에 예속되도록 설계된 의식이라는 말은 꺼낼 기회도 없었지만... 네미아 사제님은 그것조차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그분은 빛과 시야로 우리를 축복했지만, 사제들은 우리가 진실을 똑바로 마주하길 바라지 않는 듯하다. 설마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내가 처음은 아니겠지? 오늘은 이쯤 해야겠다. 또 은빛을 받아 밝아진 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애나 헌신적인 딸이 보낸 편지 천저까지 37일 낮의 축복을 받으신 부모님께 편지가 두 분께 무사히 도착하고 동생 아이도넬과 케스피나가 건강하게 잘 지내길 기도할게요. 편지를 더 자주 쓰면 좋겠다고 하셨으니 딱히 할 말은 없지만 한번 써 볼게요. 중요한 얘기는 없어요. 수업에서 불야의 전야제에 관해 배우기 시작했어요. 깨어 있는 동안에는 그 시간이 오기만을 기대하면서 방패를 들 나이가 된 친구들과 함께 어둠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어요. 엄마 질문에 답하자면 다른 수련생이랑 같이 참석할지 말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러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고요. 엄마는 제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솔직히 아직 눈에 띄는 친구가 없어요. 상황이 바뀌면 숨김없이 말씀드릴 테니까 더는 묻지 않으셔도 돼요. 아! 이번 주에는 군사 훈련장에서 실력을 제대로 발휘했어요. 훈련을 담당하시는 니신데 신참 사제님께서 무척 칭찬하시면서 다른 수련생들에게 제 발놀림과 검술을 잘 봐 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방패도 잘 쓰지만, 방패로 단순히 절 지키는 걸 넘어서 전장에서 동료를 지원하는 법을 배워야 한대요. 사제님의 조언을 듣고 히테로페랑 세비나에게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계속 같이 훈련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계속해서 실력이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학업은 잘돼 가요. 웅변 실력이 부족한 것 같긴 하지만요. 네미아 사제님과 이야기를 나눴을 땐 계속 이대로만 하면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스승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전 실력이 더 늘었으면 하는데 네미아 사제님께서는 더 이상 도움을 주시지 않을 것 같아요. 웅변 수업을 같이 듣는 어떤 여자애가 있는데 그 애 논지는 간단명료하고 구성이 탄탄해요. 견해나 사고방식이 스승님들께 배운 것과 다를 때도 있지만요. 그래도 그 애는 늘 준비되어 있어요. 그 애가 이것저것 따지기 시작하면 어느새 다른 수련생들의 논지는 너덜너덜해지죠. 그 애에게 도와 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두 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게요. 그분의 빛과 사랑을 담아 레오나 올림 태양벼림공들의 딸 레오나와 라코어의 고아 다이애나가 주고받은 쪽지 천저까지 35일 낮의 축복을 받은 다이애나에게 중세 라코어어 수업이 끝나면 바쁘니? 웅변 실력이 잘 늘지 않는 것 같아서 설득력 있는 논지를 구성하고 전달하는 실력을 기를 수 있게 꼭 네 도움을 받고 싶어. 빛을 담아, 레오나 왜 하필이면 나야? 난 이제 수업 중 말할 수도 없는데, 왜 스승님들이 들을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논지를 펼친 사람한테 배우려고 해? 세비나나 너랑 같이 훈련하는 그 다른 여자애한테 부탁해 봐. 널 위해서라면 발 벗고 나설 정도로 의리 있는 친구들 같던데. 다이애나 네가 펼친 논지의 내용은 그렇다 쳐도 넌 우리 학년에서 논지를 제일 잘 구성하는 애잖아. 다른 학년을 통틀어도 네가 최고일걸? 몇 년 전 상급생들이 했던 연말 토론이랑 발표 들어 봤지? 이 분야에서 너만큼 날 잘 가르쳐 줄 사람은 없을 거야. 너도 해야 할 일이 있을 테니 시간을 많이 빼앗진 않을게. 그래도 다음 웅변 수업 전까지 내 원고를 훑어보고 내가 부족한 부분이 뭔지 알 수 있게 도와준다면 정말 고마울 거야. 그리고 내가 가볍게 부탁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줘. 혹시 어려운 게 있다면, 뭐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꼭 보답할 테니까. 빛을 담아, 레오나 라코어의 고아 다이애나의 일기 천저까지 35일 레오나가 날 찾아서 깜짝 놀랐다. 지금도 장난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차피 이제 웅변 수업을 준비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레오나를 도와주기로 했다. 물론 레오나를 직접 만나진 않을 거다. 부모도 없는 이단적인 외톨이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스승들이나 다른 수련생들이 레오나를 업신여기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군사 훈련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는 레오나에게 아주 등을 돌리지는 않겠지만 레오나를 조롱하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레오나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 건 싫다. 왜냐하면 레오나는 나한테 다가올 정도로... 용감했으니까? 겸손했으니까? 자신이 모든 면에서 최고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을 보면 신선하다. 솔직히 말하면 레오나가 그런 말을 해서 정말 놀랐다. 레오나가 뭔가에 실패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게다가 가끔 대화할 상대가 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비록 그 상대가 여기서 배우는 모든 걸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레오나가 나와 어울려서 많은 사람에게 얻은 존중을 잃게 된다면 나랑 계속 얘기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다이애나 사원의 사제가 오랜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천저까지 21일 낮의 축복을 가득 받은 멜리아와 이아수르에게 사원에 큰 선물을 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이아수르, 자네 작품은 늘 그렇듯이 굉장하더군. 백열의 사제님께서 스물한 번의 일출 후 있을 불야의 전야제에 두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셨어. 등유리가 쓰이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말이야. 어린아이 둘을 돌봐야 해서 오기 쉽지 않겠지만 아이들도 같이 데려와서 태양불꽃 횃불에 불을 붙이는 모습만 보고 가도 돼. 올해 레오나를 가르치는 사제들과 모두 이야기해 봤는데 레오나가 모든 방면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이고 있다고 하더군. 내가 가르치는 중세 라코어어 수업에서는 다른 수련생들이 어휘와 동사 시제를 익힐 수 있게 도와주고 있어. 레오나가 하는 걸 보고 있으면 태양을 향한 레오나의 헌신이 보일 정도야.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도 대단해. 지난 군사 훈련 모의 전투에서 레오나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봤는데 어느 순간 상급생도 제치고 다른 수련생을 이끌고 있더군. 정말 자랑스럽겠어. 그런데 태양이 우리에게 베푼 삶에 좀 더 감사하는 시간을 보낼 필요는 있겠어. 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레오나와 한편이었던 수련생 하나가 함께 불야의 전야제에 가지 않겠냐고 물어봤어. 레오나는 누가 관심을 보이든 거절한 후 저녁 공부를 하러 갔지. 레오나가 성취하는 데만 빠져서 태양의 선물을 즐길 기회를 놓칠까 봐 걱정이야. 사원에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분의 빛을 가까이서 만끽하지 못할까 봐. 두 사람이 레오나와 이 문제를 잘 얘기해 봤으면 좋겠어. 빛을 담아, 태양의 사제 폴림니우스 태양벼림공들의 딸 레오나의 일기 천저까지 17일 함께 축제에 가자고 물어보는 방법 —쪽지? 너무 유치한가? 더 직접적인 게 좋으려나? 많은 쪽지를 주고받았지만... 난 그 애가 보낸 쪽지를 받는 게 좋다. 그 애는 늘 시간을 내서 답해 줄 뿐 아니라 아주 세심하고 똑똑하니까. —같이 산책하자고 할까? 언제? 이번 주에는 밤마다 모의 전투가 열리는데. —꽃을 줄까? 꽃을 좋아하는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잖아. —밥? 같이 밥을 먹은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너무 눈에 띌지도 모른다. 밥이 맛없으면 어쩌지? 안 좋은 징조라고 봐야 하나? —방패 훈련을 도와준다고 할까? 그 애는 방패를 잘 쓰지 않으니 괜찮은 생각일지도! 아니면 방패 쓰는 걸 싫어하나? 모의 전투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 —교리에 대해 논해 볼까? 이참에 직접 만나서 얘기도 하고, 그 애 실력도 보고, 나도 멋진 모습을 보이면... 그 애에게 잘 보일 수 있겠지? 중요한 웅변 과제가 있으니 도와 달라고 할까? 아니, 그 애도 나랑 같은 수업을 듣잖아. 바보 같긴. —같이 기도하자고 해?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좋은 구실이지만 그 애가 받아들일 리 없지. —따로 계획이 있냐고 물어볼까? 그냥 친구로서 자연스럽게 물어보자. 그 애도 혼자 가긴 싫을 거야. 이미 같이 갈 사람이 있는 거 아니야? 누구랑 같이 가려나. —같이 갈 사람이 없다고 할까?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묻지 말고 그냥 거기서 만나서 같이 춤추자고 할까? 이것도 나쁘지 않겠어.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태양벼림공들의 딸 레오나와 라코어의 고아 다이애나 사이에 오간 쪽지 천저까지 14일 레오나에게 네가 지난번 발표한 내용에 대해 생각해 봤어. 네 논지는 간단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웠어. 세비나도 네 논리에 수긍하는 것 같더라. 별과 태양에 관한 가설을 끌어들인 것도 정말 좋았어. 몇 주 전 네가 하늘에 있는 태양의 선물에 대해 논의한 내용과도 아주 자연스레 연결됐지. 네미아 사제님도 감명을 받은 것 같았어. 정말 잘했어! 넌 태양의 빛과 생명을 차가운 어둠과 비교했지만, 어둠의 어떤 점이 나쁜지는 정확히 말하지 못했어. 온기가 없기 때문이야? 그럼 겨울은 나쁜 걸까? 차가운 물도? 생명이 없기 때문이야? 그럼 타곤 산도 엄밀히 따지면 살아 있지 않으니 나쁜 걸까? 더 좋은 예시를 들 수 없다면 은유를 바꿔야 해. 이단자는 태양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지.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야? 태양은 하늘에 떠 있잖아. 태양이 저기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은데, 태양을 믿는 것과 우리 교리를 믿는 것은 똑같지 않다는 점을 명확하게 해야 해. 아니면 태양을 믿는다는 표현 대신 숭배한다는 표현을 쓰든지. 게다가 열람이 제한된 석판에 우리의 역사에 대해 뭐라고 쓰여 있는지 어떻게 알아? 스승님들이 요약한 내용과 그 뜻을 알려 주셨을 뿐이잖아. 정확한 인용이 없다면 네 주장은 진실이 아니라 학설을 기반으로 한 것에 불과해. 나라면 입회 의식을 치른 후 그 석판을 직접 확인할 때까지 석판에 관련된 내용을 쓰는 건 보류하겠어. 영원의 날에 관한 의견과 그림자 이론을 지지하는 논지는 좋았지만, 그걸로 강력한 결론까지 끌어내지는 못했어. 태양의 승리를 영원의 날과 불야의 전야제로 기념하는 게 그림자의 창조와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데? 그림자가 필멸의 창조물이라는 거야? 아니면 태양의 창조물이라는 거야? 그래도 실력은 확실히 늘고 있어. 너도 연단에 서면 느껴지지 않아? 다이애나 다이애나에게 그래! 나도 확실히 느끼고 있어. 마치 내 안에서 고결한 태양의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아. 말하면 말할수록 내 뺨에 머무는 그분의 온기가 커지는 느낌이야. 그분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추운 겨울에도 야외 수업을 하면 좋을 텐데. 쪽지 보내 줘서 정말 고마워. 시간 내서 써 줬잖아. 그리고 웅변 실력이 늘 수 있게 지도해 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실력이 꾸준히 늘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내가 주장한 내용은 전부 확인을 거친 거야. 찬가도 그렇고, 철학자와 사원 학자가 쓴 글을 하나도 빠짐없이 인용했어. 내가 독특한 결론을 내린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다양한 출처에서 얻은 내용을 연결한 방식이 문제인가? 하지만 내가 인용한 출처 중 네가 비평하면서 물은 질문에 답이 되거나 답이 될 만한 내용은 없었어. 어둠이 사악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그 이유는 고려 대상이 아니야. 그랬던 적이 없지. 원래 그런 거니까. 왜 내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을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건 그렇고 넌 모의 전투에서 방패를 잘 안 쓰는 것 같더라. 나도 방패가 워낙 크고 불편해서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 슬슬 전투에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감이 잡히는 것 같아. 우리 같이 연습할래? 너만 안 바쁘면 말이야. 빛을 담아, 레오나 레오나에게 그게 그렇게 널리 알려지고 합의된 내용이라면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할 것 같지 않아? 이 내용에 누가 합의했는데? 언제? 왜? 왜 모두가 당연히 진실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들이 있는 거야? 나한테 네 논지를 살펴보고 더 잘 구성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했잖아. 난 그 말대로 하는 것뿐이야. 근본적인 사실과 정통적인 생각... 적어도 우리가 근본적인 사실로 알고 있는 내용을 기반으로 했을 때 논지가 탄탄하게 구성되지 않는다면 그 기초 전제가 틀리거나 말이 안 되는 것일지도 몰라. 열람이 제한된 석판에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한테는 읽을 권한이 없으니 알 길이 있나! 진짜 답답해!!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출처를 기반으로 논지를 구성하고, 출처에 나오지 않는 내용은 더 명확하게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야. 그래도 지난번보다 훨씬 나아졌어. 네 다음 발표도 빨리 듣고 싶다. 연단에 서기 전에 내 도움을 받고 싶은지, 아니면 네 논지로 날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은지 알려 줘. 그리고 제안은 고마운데, 난 절대 방패를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거야. 방패를 쓰면 너무 거슬리고 무거워서 공격에 집중하기 힘들더라. 게다가 우리가 같은 편인 한 날 지켜 주는 사람이 적어도 하나는 있잖아. 다이애나 태양의 사제 네미아가 뛰어난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 천저까지 12일 낮의 축복을 받은 레오나에게 지난 몇 주 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더구나. 정말 잘했다. 예전에도 토론 실력이 좋았는데 더 발전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지 이제는 네게서 빛이 날 정도야. 오늘 네 발표가 끊기는 일이 생겨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번 일은 내가 백열의 사제님과 함께 잘 처리할 테니 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서 최고를 향해, 그분의 빛을 향해 나아가렴. 그분의 신성한 온기를 담아 태양의 사제 네미아 징계 경위서 천저까지 12일 나, 태양의 사제 네미아는 라코어의 고아 다이애나 수련생의 행동과 그에 따른 징계 내용을 기록한다. 다이애나 수련생은 몇 주 전 앞으로 수업 중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는데도 다른 수련생의 발표를 방해했다. 발표를 계속하게 입을 다물라는 지시를 받자 지시를 따르는 대신 다른 수련생의 논지에 반박하려고 했다. 다이애나는 불경스럽게 열을 내며 빛이 영예로운 태양의 세계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태양이 사악한 어둠을 영원히 몰아내길.) 그리하여 위험한 이단의 사상으로 함께 수업을 듣던 또래 수련생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쳤다. 백열의 사제 탈라이아 님과 논의한 끝에 다이애나에게 다음과 같은 징계를 내린다. 다이애나는 사흘 동안 태양이 밤잠에 들 때까지 그늘도 물도 없이 서서 태양의 빛을 받으며 태양의 자비로운 심판을 되새겨야 한다. 라코어의 고아 다이애나의 일기 천저까지 11일 태양이 우리 모두에게 다정한 생명의 어머니 같은 존재인 것은 아니다. 혐오스러운 태양은 악의로 타오르며 뜨거운 빛으로 우리 모두를 지하로 몰아내려고 한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지만, 그분이 날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내일이면 징계를 받기 시작한 지 세 번째 되는 날이다. 날이 흐리길 바라는 수밖에. 비가 오거나! 아니면 눈? 뭐든 좋다. 붉어진 피부가 쓰라려서 잠이나 자고 싶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한다. 앞으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레오나와 그렇게 얘기해 볼 일은 없겠지. 수련생 생활이 끝나기 전에 해야 했다. 밤에 어둠을 꿰뚫는 그 빛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네미아 사제님이 징계를 내리겠다며 날 탈라이아 사제님께 끌고 갔으니까. 그 얘기까지 꺼냈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여기 있는 모두가 싫다. 누구와도 뭔가를 기념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다들 가식적인 웃음과 고소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내 몸에 구멍을 내는 게 싫다. 불야의 전야제에 가는 대신 그냥... 산이나 올라야겠다. 여기보다 높은 곳으로 가서 별을 보는 것도 괜찮겠지. 밤의 빛을 보는 거다. 어차피 전야제에 함께 가고 싶은 유일한 사람은 나랑 같이 다니려고 하지 않을 거다. 공개적으로 벌을 받은 사람과 어울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전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난 잃을 게 없다. -다이애나 '모두'가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빛나는 미소와 환한 마음을 지닌 다정한 사람은 아니다. 모두가 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래 봤자 남은 남이다. 하지만 이제 그 애마저 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겠지. 태양벼림공들의 딸 레오나의 일기 천저까지 7일 축제에 같이 갈 사람을 골라야 하는 이유 —여섯 명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들었는데 모두 거절했다. —다들 내가 딱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난 재미있는 (?) 사람이니까. —세비나와 히테로페는 나랑 같이 가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부모님이 오실지도 모르는데, 두 분은 내가 좀 더 사교적이길 바라신다. —겨우 일주일 남았으니까. —사실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다. 하지만 좋은 생각일까? 막 징계를 받은 다이애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이애나에게 발언하도록 한 사람이 나였는데도 말이다. 다이애나가 내 논지의 허점을 지적하고 질문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내가 준비해 온 인용문으로 그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 태양은 자비를 베풀라고 하겠지만, 다이애나가 다시는 사제단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다이애나와 함께 가면 나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될까? —그게 중요한가? 다이애나가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한가? —그 애는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나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그 애가 확신할 때 짓는 표정이 있다. 논쟁에서 이길 때, 태양의 빛으로 빛나는 듯한 그 애의 눈과 미소, 그 애가 왕관을 쓰듯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다. 좋아, 결정했어! 백열의 사제 탈라이아가 모범 수련생의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 천저까지 5일 두 분의 딸 레오나가 다른 수련생과 싸웠다는 소식을 전하고자 이 서신을 보냅니다. 듣자 하니 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언쟁이 끝날 때쯤 도착해서 두 사람이 뭐 때문에 싸웠는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두 수련생과 얘기해 봤지만 둘 다 싸움이 왜 시작됐는지 말하지 않더군요. 두 수련생에게는 징계 조치를 내릴 예정입니다. 그분의 빛이 온 세상을 비추길 백열의 사제 탈라이아 라코어의 고아 다이애나의 일기 발췌문 천저까지 5일 그런데 불야의 전야제에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어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레오나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날 알면서,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면서 왜냐고 물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날 전향시키려고 하는구나.' 보아하니 레오나는 나와 쪽지를 주고받으면서 설교를 통해 날 독실한 신자로 바꿀 수 있겠다고, 내게 빛을 보여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내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던 건... 본인이 날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난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자랑은 아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울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모두 내 착각이었다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나 혼자만 혼나지 않았다. 모두의 사랑을 받는 레오나도 징계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사제님들이 며칠 동안 레오나를 땡볕에 세워 둘 리가 없다. 대신 우리는 사제단이 쓰는 수도원을 포함해서 사원 바닥을 한 곳도 빠짐없이 닦는 징계를 받았다. 그 애가 태양을 위해서 개입해 달라는 스승의 부탁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 애에게 고작 그런 존재일 뿐이라면, 올바른 길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이단자일 뿐이라면, 이제 그 애가 웅변 수업에서 형편없는 발표를 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D 태양벼림공들의 딸 레오나의 일기 천저까지 5일 다이애나에게 같이 축제에 가자고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이유 —그 애는 내가 축제에 가는지 물어본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 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한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 둘 다 징계를 받아서 이제 모의 전투를 빠지고 바닥을 문질러야 한다. —그 애는 태양을 찬양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그 애는 이단자나 다름없다. —그 애는 가더라도 춤추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그 애가 나한테 쪽지를 보내는 일은 없을 거다. 그냥 다른 애가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그러자고 할걸. 실망한 부모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천저까지 2일 낮의 축복을 받은 레오나에게 네가 징계를 받고 지난 모의 전투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소식에 너희 어머니도 나도 기분이 좋지 않구나. 넌 더 잘할 수 있는 아이니까 이 상황을 잘 헤쳐나가길 바란다. 그분의 빛을 받는 지도자들은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에 달려들지 않는다. 학교에서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을 해서 문제가 생기는 상황도 만들지 않지. 우리도 이틀 후 불야의 전야제 개회식에 참석할 예정이니 그때 어떻게 해야 네 미래에 더 도움이 될지 얘기해 보자꾸나. 그분의 빛과 사랑을 담아 아버지가 라코어의 고아 다이애나의 일기 천저까지 1일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 그 애는 나한테 설교하려는 게 아니었다. 축제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다이애나 이 멍청아 백열의 대사제 탈라이아의 서한 천저 방패를 들 나이가 된 수련생들과 다른 참석자들에게 모두 불야의 전야제를 즐겁게 보내길, 영원히 그분의 가없는 사랑과 온기를 누리길 바랍니다. 축제는 황혼에 시작되니 꼭 사원 예복을 갖추어 입고 참석하세요. 그분의 빛이 온 세상을 비추길 백열의 사제 탈라이아 태양벼림공들의 딸 레오나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 (미발송) 천공까지 174일 낮의 축복을 받으신 부모님께 두 분 모두 영광스러운 태양의 빛을 받고 그분의 사랑을 느끼는 나날이 더 길어지길 바랄게요. 전 축제가 절반은 지나고 나서야 참석했어요. 라코어의 고아 다이애나의 일기 천공까지 174일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직도 손가락이 덜덜 떨린다. 지금부터 쓰는 내용은 진짜다. 말도 안 되는, 불가해한 일이다. 하지만 분명히 일어난 일이다. 난 다른 수련생들이 불야의 전야제를 준비하며 망토와 베일을 두르고 갑옷을 입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제일 따뜻한 옷을 걸치고 문으로 살짝 빠져나간 후 수련생들이 쓰는 난롯가와 사원 울타리를 지나서 아무도 없는 황야로 들어갔다. 사원 위쪽에 있는 낮은 산봉우리에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많지 않았다. 그곳은 원래 태양을 최대한 가까이서 느끼기 위해 가는 곳이었다. 그렇게 위로 올라간 나는 앉아서 하늘을 보기 좋은 곳을 찾았다. 태양이 지고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자 아래쪽 사원에서 태양불꽃 횃불들이 밝게 타오르는 게 보였다. 위에서도 그 끔찍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징계를 받을 때 피부가 화끈거리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위에 있는 밤하늘을, 어둠을, 별을, 아름답고 은은한 빛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은은한 빛, 위쪽의 부드러운 은빛을 본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온함을 느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스승님들이나 아래에서 열리는 축제, 내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따위는 걱정되지 않았다. 지금 그곳에서 위를 올려다본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다. 모두가 태양으로부터 느낀다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래서 난 그 빛을 향해 짧은 기도를 올렸다. 한낮에 엎드려서 하는 복잡한 기도 같은 게 아니라 그저 감사의 말을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여기 그 내용을 쓰진 않겠다. 기도의 가치를 떨어뜨리긴 싫으니까. 그때 레오나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레오나가 보낸 편지 (미발송) 이제야 알겠어요. 그런 징계를 받았으니 다이애나는 저나 다른 수련생들처럼 축제가 그리 기다려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 애는 제가 축제에 같이 가자고 해서 화를 낸 게 아니라... 제가 축제 얘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화를 냈어요. 사실 아버지가 보내 주신 편지 덕분에 고통스러운 마음은 잠시 제쳐 두고 그 순간을 더 진지하게 되돌아볼 수 있었어요. 생각을 마친 전 그 애를 찾아서 사과하기로 했죠. 그 애가 오지 않을 곳은 알았지만, 갈 만한 곳은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애를 찾아 사원 안을 뒤지다가 밖으로 나갔어요. 전에는 밤에 다이애나를 밖에서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애는 찬란한 태양 아래 너무 오래 서 있으면 피부가 고통스러워 보일 정도로 붉게 물드는데, 어둠에 감싸여 있으니... 원래부터 밤에 속하는 존재인 것처럼 보였어요.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그 애 머리카락이랑 눈과 같은 색을 띠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그 애는 저더러 왜 거기 있냐고 물었어요. 제가 왜 다른 수련생들과 축제에 참석하지 않았는지 의아한 것 같았죠. 그 애가 절 쳐다보는 표정이... 글쎄요.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적어도 불안한 것만은 확실했어요. 전 실망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어요. 그저 그 애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그러자 그 애는 누가 자신을 사원으로, 축제로 데려오라고 시켰는지 물어봤어요. 전 고개를 젓고 쉰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내뱉었죠. 화나게 해서, 문제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고요. 그 애는 절 잠시 마주 보더니 똑같이 고개를 젓고 오히려 자신이 미안하다고 했어요. 전 소리를 내서 웃고 싶었지만 아직 그래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분위기를 깨고 싶지도 않았고요. 전 우리가 단둘이 얘기하는 게 그 순간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 애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길래 그렇게 했어요. 우리는 나란히 앉았죠. 서로 그렇게 가까이 있는 건 처음이었어요. 팔이 스치자 그 애는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하며 멀어졌어요. "그래서 축제에는 아예 안 갈 생각이야?" 그 애가 물었어요.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대충 비슷한 말이었죠. 저는 "글쎄. 상황 봐서."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 애가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그 애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어요. 그 애는 시선을 들더니 하늘을 보고 미소를 지었죠.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 편지는 보내지 않을게요. 이어서—다이애나의 일기 우리는 함께 밤의 빛 아래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 몇 시간 됐으려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난 우리 위에 있는 빛을 가리키며 그 애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태양과 저 빛에 관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 대신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 순간 구름이 하늘을 가리자 횃불에서 나온 빛이 구름에 반사되는 게 보였다. 여전히 축제에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레오나에게 이런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 애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난 그 애에게 축제에 가서 함께 춤추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애가 거절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 애의 얼굴에서 미소가 번졌다. 그 애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림으로 그리고 싶지만 그 빛나는 느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애는 내 손을 잡더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말을 했다. "아직이야." 그리고 레오나는 내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나도 레오나에게 입을 맞췄다. 여명의 찬가 솔라리가 깨뜨리고 잃어버린 7번 석판, 행 미상 둘의 간절한 소망은 하늘을 공유하는 것 함께 춤춰도 될 만큼 넓은 그곳에서 손과 마음이 하나로 뒤얽히길 바라네 대신 둘은 서로를 훔쳐보며 상대가 다가오길 기다리거나 상대가 떠나는 모습을 봐야 하네 그럼에도 곳곳에 있는 입맞춤 대가 없는 사랑, 부드러운 포옹 넘쳐 나는 희열과 기쁨의 순간 함께 떠오르자, 그녀가 속삭이네 내 다정한 손길로 널 달래고 세상이 태양을 기다리게 할 테니 함께 떠오르자, 그녀가 외치네 내 열정으로 네 몸을 덥히고 오늘 밤 달이 없는 세상을 만들 테니 그렇게 둘의 결합으로 나타난 우리는 황혼과 여명으로 빚어져 둘의 사랑으로 감싸였네 |
4. 패잔병
판테온(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참고.5. 구 배경
5.1. 유니버스 이전
달의 힘을 증명해 보이는 불굴의 화신인 다이애나는 태양을 숭배하는 집단 솔라리에 대항하여 홀로 어둠의 성전을 벌이고 있다. 한 때는 그녀도 솔라리의 일원으로서 동료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이해시키고자 분투했지만, 몇 년간이나 어떤 노력도 결실을 맺지 못하자 결국 원한으로 똘똘 뭉친 냉혹한 전사로 변모하고 말았다. 이제 적이 되어 버린 그들은 이제 달의 힘을 받들거나, 아니면 초승달 검에 목숨을 빼앗기는 수 밖에 없다. 솔라리로 태어나긴 했지만,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강했던 다이애나는 언제나 밤 하늘에서 위안을 얻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곤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솔라리는 왜 오직 태양만 숭배해야 하는지 물음을 던졌지만, 솔라리 장로들은 이런 그녀의 도전을 조롱하고 형벌로 답할 뿐이었다. 그래도 다이애나는 달의 힘을 입증할 증거를 찾기만 한다면 장로들이 결국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몇 년 동안이나 홀로 솔라리 기록 보관소에 쳐박혀 자료를 뒤지던 어느 날, 어떤 고서 속에서 수수께끼같은 암호문이 드디어 눈에 띄었다. 암호문의 지시를 따라 타곤 산의 어느 외딴 골짜기로 향하자 봉인된 고대 사원으로 통하는 비밀 문이 나왔다. 오래된 유물과 색 바랜 벽화들 속에서 다이애나는 화려하게 장식된 갑옷 한 벌과 아름다운 초승달 검을 발견했다. 그런데 갑옷과 무기에 달의 인장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그날 밤, 곧바로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서 솔라리 장로들에게 돌아간 다이애나는 이 유물들이야말로 자신처럼 달을 숭배한 자들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장로들은 이러한 주장에 격노했고 다이애나를 이단자로 낙인 찍어 사형을 선고했다. 장로들이 처형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동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욕망을 압도하는 엄청난 슬픔과 절망이 밀려왔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달의 힘을 청해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불가사의한 힘이 밀물처럼 다이애나에게 흘러들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게 속박에서 풀려난 그녀는 초승달 검을 들어 장로들을 모두 척살하고야 말았다. 이제 폐허 속 사원을 등지고 선 다이애나는 달의 힘을 부인하는 모든 이들을 말살해 버리겠다는 단 하나의 결의로 살아간다. "태양은 진실을 비추지 않아. 그저 불태우고 눈 멀게 할 뿐." – 다이애나 |
5.2. 유니버스 이후
“나는 달의 영혼 속에 흐르는 빛이다.” 다이애나는 오늘날 거의 사멸된 고대 종교 ‘루나리’의 전사이자, 은빛 달의 화신 그 자체다. 그녀는 드높은 타곤 산 꼭대기에 떠오른 천체들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고, 겨울 밤 설원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갑옷과 초승달 검으로 무장했다. 그러나 인간을 초월한 그녀의 힘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다. 다이애나는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쓰고 있다. 다이애나의 부모는 본래 타곤 산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낯선 산이 나오는 기이한 꿈을 꾸고, 꿈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타곤 산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임신한 여자의 몸으로는 더욱이 버틸 수 없었다. 동쪽 산등성이에서 폭풍을 피하던 그들은 결국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차갑고 무자비한 달빛 아래에서 여자가 마지막 숨을 내쉰 순간, 다이애나가 세상에 태어났다. 다음날 폭풍이 잦아들고 태양이 중천에 떴을 때, 근처의 솔라리 사원에서 나온 사냥꾼들이 다이애나를 발견했다. 아기는 곰 가죽에 감싸인 채 죽은 아버지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그들은 아기를 사원으로 데려가서 태양의 세례를 내리고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곳에서 다이애나는 타곤 산을 지배하는 종교인 솔라리의 일원으로 길러졌다. 태양 숭배 사상과 신화들을 배우고, 솔라리 사원의 성전사들인 라호락 전사단과 함께 전투 훈련을 받으면서, 그녀는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의 소녀로 성장했다. 솔라리 원로들은 세상의 모든 생명이 태양으로부터 나왔다고 가르쳤다. 반면 달빛은 어둠을 교묘하게 꾸며낸 거짓된 빛이라서 아무런 자양분도 주지 못한다고, 오로지 어둠의 짐승들만이 달빛에 의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어쩐지 달이 태양보다 더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혹독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비하면, 그윽한 달빛이 오히려 훨씬 더 아름다운 것 같았다. 다이애나는 매일 밤 달이 나오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곤 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숙소를 몰래 빠져나가 산을 올라갔고, 달빛을 받아 은색을 띤 샘물을 구경하거나 밤에만 피는 꽃들을 꺾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이애나는 점점 더 원로들에게 반항심이 들었다.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는 모조리 의문투성이로만 느껴졌고, 그 이면에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원로들이 일부러 알려주지 않고 숨기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다이애나는 나이가 들수록 신랄하고 비판적인 학생이 되어갔고, 그녀가 교단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자 어릴 적 친했던 친구들조차 그녀와 멀어져갔다. 외톨이가 된 다이애나는 나날이 고립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힘든 것은 자신의 삶에서 필수적인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는 듯한 갈증이었다. 밤이 되어 아득히 먼 산봉우리 위로 떠오른 은빛 달을 올려다볼 때면, 저 봉우리로 올라가고 싶다는 열망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가려움증처럼 그녀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런 짓을 했다가는 죽음보다 끔찍한 파멸을 맞게 될 거라는 가르침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원로들은 오로지 존귀한 영웅들만이 타곤 산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누누이 가르쳐왔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애나는 원로들과 말싸움을 벌인 죄로 사원의 도서관을 청소하라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청소를 하다 보니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낡은 책장 뒤에서 빛 한 줄기가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책장 뒤편의 좁은 공간을 뒤져보니, 그곳에는 일부분이 불탄 고대 필사본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다이애나는 청소를 끝낸 뒤 그걸 가지고 밖으로 나갔고, 그날 밤 보름달 아래서 전부 읽었다. 그러자 잠겨 있던 영혼의 문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필사본은 ‘루나리’라는 사라진 종교에 대한 기록이었다. 일부분이 훼손된 탓에 전체 내용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남은 부분으로도 대략적인 지식은 얻을 수 있었다. 루나리는 달이 생명과 균형의 근원이라고 믿는 종교였으며, 밤과 낮, 해와 달의 영원한 순환이 우주의 조화를 지탱한다는 것이 그들의 핵심 교리였다. 루나리의 필사본을 탐독한 다이애나는 큰 깨달음을 얻은 기분에 휩싸여, 달빛이 비치는 밤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사원 담장 너머로 곰 가죽 망토를 두른 어떤 나이 든 여인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녀는 산꼭대기로 이어지는 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여인은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다가 버드나무 지팡이로 땅을 짚고서 겨우 바로 서더니, 다이애나를 보고는 도와달라고 외쳤다. 날이 밝기 전에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니 부축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건 솔라리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여인을 도와서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싶다는 열망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이애나를 사로잡았다. 이 산은 오로지 귀한 자에게만 길을 열어준다지만, 사실 다이애나는 세상 그 무엇도 귀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인이 다시금 도움을 요청했을 때, 다이애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담장을 기어넘어가서 여인의 팔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산을 올랐다. 가까이에서 보니 여인은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이런 노인이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만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후로 더더욱 험난한 고산지대가 펼쳐지는데도 여인은 별로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다이애나는 그녀와 함께 몇 시간이나 등반을 계속했다. 구름보다 더 높은 고도에 이르렀을 때부터는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가워졌고, 하늘의 달과 별들은 다이아몬드처럼 맑게 빛났다. 다이애나는 지쳐서 비틀거렸고 산소가 부족해서 숨 쉬기도 힘겨워했지만, 늙은 여인은 오히려 다이애나를 일으켜주고 격려해주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시간 감각이 점점 흐릿해졌다. 머리 위로 흘러가는 별들과 눈앞의 산길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흐릿해 보였다. 다이애나는 이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휘청거렸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창백한 달빛에 힘입어 겨우 기운을 짜냈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아예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결국 그녀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고 말았다. 온몸이 녹초가 되다 못해 한계 이상으로 소진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눈을 들어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그곳은 이미 산꼭대기였다. 하룻밤 만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정상에 벌써 도착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봉우리 주위의 하늘은 환영 같은 신비로운 색채로 온통 물들어 있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찬란한 빛의 베일 너머로 금색과 은색으로 반짝이는 대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다이애나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옆에 있어야 할 동반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 늙은 여인의 흔적이라고는 다이애나의 어깨에 걸쳐진 곰 가죽 망토 한 장뿐이었다. 다이애나는 하늘의 빛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를 줄곧 괴롭혔던 공허감이 채워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상도 못할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받아들여줄 거라는 예감이 밀려왔고, 이게 바로 자신이 평생 기다려왔던 순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싱그러운 생기가 몸을 타고 돌면서 번쩍 기운이 났다. 다이애나는 일어나서 저 경이로운 빛으로 가득한 하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한 발짝씩 나아갈수록 그녀의 결심은 확고해졌다. 그때 하늘의 빛이 그녀를 향해 밀어닥쳤다. 다이애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무언가 거대하고 강력하고 초월적인 고대의 존재가 자신과 융합되고 있었다.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희열이 샘솟았다. 순간이면서 동시에 영원 같고, 진실이면서 동시에 환각 같은 경험이었다. 마침내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다이애나는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린 듯한 아픔을 느꼈다. 이런 아픔은 난생 처음이었다. 다이애나는 비몽사몽으로 산을 내려갔다. 주위에 뭐가 있는지 보지도 않고 무작정 발을 옮겼다. 그러다 보니 어느 바위 벽 앞에 이르렀는데, 그 표면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깊은 틈이 나 있었다. 그건 달그림자가 지는 밤이 아니면 육안에 보이지 않는 동굴 입구였다. 추위를 피해 쉴 곳이 필요했던 다이애나는 동굴에서 노숙해야겠다는 생각에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의 비좁은 통로를 따라 조금 걸어 들어가자 탁 트인 널찍한 공간이 나왔다. 먼 옛날에 예배당이나 알현실 같은 곳으로 쓰였던 곳 같았다. 허물어져가는 벽에는 빛바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혜성들이 비처럼 쏟아져내리고, 금색과 은색의 전사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서 기괴한 괴물들과 싸우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 방 한가운데에는 초승달 모양의 검과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형태의 갑옷 한 벌이 놓여 있었다. 아름답게 세공된, 광택이 흐르는 강철 판금과 은사슬을 엮어 만든 갑옷이었다. 다이애나는 반짝이는 갑옷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칠흑 같던 머리카락이 순백색으로 변한 상태였고, 이마에는 눈부시게 밝은 빛이 새어나오는 룬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룬문자는 갑옷 철판에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과 같았고, 뿐만 아니라 도서관에서 발견한 필사본에도 똑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던 것을 본 기억이 났다. 다이애나는 자신이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이 운명을 받아들이든지, 물러나든지 둘 중 하나였다. 다이애나는 손을 뻗어 갑옷의 서늘한 표면을 만져보았다. 그러자 자신이 살아본 적 없는 삶들, 겪어본 적 없는 기억들, 알지 못하는 감각들이 머릿속에서 폭발하듯 솟구쳤다. 고대 역사의 파편들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치고, 어렴풋하게 알 듯 말 듯한 비전의 지식들과 무수한 미래의 장면들이 바람에 날려온 먼지처럼 마구 흩날렸다. 환상이 사라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다이애나는 은색 갑옷으로 완전히 무장하고 있었다. 갑옷은 맞춘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그녀는 새로운 지식들이 안겨준 충격과 감격으로 아직도 마음이 먹먹했지만, 그 지식들 자체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아서 답답했다. 마치 절반이 그림자에 가려진 그림을 보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자신이 무언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것은 분명했다. 그녀는 여전히 예전의 다이애나였지만, 동시에 예전의 자신을 뛰어넘은 불멸의 존재이기도 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찬 다이애나는 동굴을 나와서 곧장 솔라리 사원으로 향했다. 새롭게 얻은 깨달음을 원로들에게 알려줄 작정이었다. 사원의 입구에서 다이애나를 맞이한 사람은 레오나였다. 라호락 성전사단의 단장이자 솔라리 최고의 전사인 그녀는 다이애나를 원로들의 방으로 데려다 주었고, 다이애나가 원로들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함께 그 말을 들었다. 루나리에 대한 이야기가 다이애나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자 레오나는 기겁한 눈치였다. 원로들은 기겁한 정도가 아니었다. 다이애나가 말을 마치자마자 원로들은 그녀를 이단자, 신성모독자, 미신을 퍼뜨리는 선동꾼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런 극악무도한 죄악에 내려야 할 처벌은 오로지 사형뿐이라고 판결했다. 다이애나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원로라는 자들이 이처럼 명백한 진실을 부인할 수 있나? 다른 곳도 아닌 이 성스러운 산의 정상에서 받은 계시를 그들이 어떻게 감히 외면한단 말인가? 분노와 좌절감에 북받친 그녀 주위의 허공에서 은빛 불덩이들이 나타났다. 다이애나는 악에 받혀 고함을 지르면서 무턱대고 검을 휘둘렀다. 검날이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치명적인 은색 불꽃이 일어나는 게 보였지만, 그녀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를 뿐이었다. 그러다 겨우 분노가 진정되고 보니 눈앞에 끔찍한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원로들은 모두 죽었고, 의식불명으로 쓰러진 레오나의 갑옷은 지금 막 대장간에서 나온 것처럼 김이 피어올랐다. 자기가 한 짓에 질겁한 다이애나는 그곳에서 즉시 도망쳤다. 다이애나가 벌인 잔인한 학살극을 발견한 솔라리의 신도들은 경악에 빠졌고, 라호락 전사들이 그녀를 처단하기 위해 추적에 나섰다. 한편 타곤 산의 야생으로 숨어든 다이애나는 자신의 불완전한 기억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썼다. 루나리의 진실들은 절반밖에 기억나지 않았고, 고대의 지식은 어렴풋한 파편들로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루나리와 솔라리가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순한 전사의 삶보다 더 중대한 운명을 타고났다. 그 운명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알아낼 것이다. |
[1] 실제 원문에 있는 취소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