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2:22:04

타카다 노부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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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타카다노부히코프로필.jpg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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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62년 4월 12일 ([age(1962-04-12)]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토츠카구
종합격투기 전적 10전 2승 6패 2무
2SUB
1KO, 4SUB, 1판정
신장 / 체중 183cm / 96kg

1. 개요2. 프로레슬링3. 종합격투기
3.1. 커리어3.2. 파이팅 스타일
4. 은퇴 후5. 기타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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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 프로레슬러[1]종합격투기 선수.[2]

2. 프로레슬링

주요 기록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1회
IWGP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1회
IWGP 태그팀 챔피언십 1회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MVP (1992)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올해의 경기 (1996)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최우수 태그팀 (1986)

1981년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통해 프로레슬러로 데뷔하였으나 1984년에 마에다 아키라사야마 사토루UWF를 만들 때 마에다를 따라 신일본을 나왔다. 1984년 12월 5일에 야마자키 카즈오와의 경기로 데이브 멜처에게서 5성 만점을 받는 등 활약했으나 UWF는 자금난에 빠져 1986년을 끝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타카다 노부히코는 선배인 마에다 아키라를 따라 다시 신일본으로 돌아갔다. UWF군으로서 신일본과의 항쟁을 시작했고, 코시나카 시로와 대립하며 IWGP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1987년 3월 20일에 마에다 아키라와의 태그로 무토 케이지 & 코시나카 시로를 상대해 다시금 데이브 멜처에게서 5성 만점을 받는 명승부를 펼쳤다. 그리고 3월 26일에 가진 재경기에서 설욕에 성공해 IWGP 헤비웨이트 태그팀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하지만 마에다 아키라는 언제까지고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휘하에 있을만한 인물이 아니었고, 결국 1987년에 마에다 안면축격사건을 일으키며 다시금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결별했다. 이후 타카다 노부히코는 마에다 아키라, 야마자키 카즈오와 함께 제2차 UWF(신생 UWF)를 시작했다. 제2차 UWF는 제1차 UWF(구 UWF)보다도 실전 격투기에 가까운 시합을 표방한 단체였는데, 여기에서도 타카다는 밥 백런드 등과 명승부를 펼치며 강자 및 흥행 스타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제2차 UWF도 끝내 자금난에 부딪히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마에다 아키라와 선수들 사이에 대립 구도까지 형성되었다. 특히 선수들의 해고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격해지며 결국 제2차 UWF도 해산하고 말았다. 그리고 후지와라 요시아키의 '신 UWF 후지무라 구미', 후지무라 구미에서 다시 떨어져 나간 후나키 마사카즈와 스즈키 미노루의 'Pancrase', UWF의 간판이었던 타카다 노부히코가 마에다 아키라로부터 독립해 설립한 'UWF 인터내셔널', 마에다 아키라가 1993년에 설립한 실전 프로레슬링 단체인 Rings 등으로 흩어졌다.

사쿠라바 카즈시, 게리 올브라이트, 타무라 키요시 등과 함께 초반엔 UWF 인터내셔널의 흥행을 이끌며 슈퍼 베이더 등과 명승부를 남겼다. 하지만 타카다 노부히코가 정계 진출을 준비하며 경영에 소홀해진데다가 본인이 흥행에 불참하며 UWF 인터내셔널은 흥행까지 부진해지면서 돈 문제에 직면했다. 그리고 본인이 그렇게 하면서까지 준비한 정계 진출도 실패했는데, 타카다 노부히코가 자기 동네에서는 인망도 있고 인기가 많았지만 정작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현지 주민들은 참의원 선거에서 기어이 그를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영난을 타진하기 위해 UWF vs 신일본의 구도를 1990년대에 재현하여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차지하면서 신일본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초로 IWGP 주니어 헤비급 타이틀과 IWGP 헤비급 타이틀을 모두 차지해본 프로레슬러가 되었다. 하지만 을의 위치에 있던 UWF 인터내셔널인지라 타카다 노부히코가 하시모토 신야와 1996년 4월 29일에 가진 최종전에서 패하며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항쟁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1996년에 UWF 인터내셔널은 문을 닫았다.

3. 종합격투기

3.1. 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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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미국에서 UFC 1 토너먼트가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우승자인 호이스 그레이시는 격투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에 안죠 요지가 힉슨 그레이시의 도장에 도전했다가 힉슨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맞고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UWF 인터내셔널은 그레이시 주짓수를 물고 늘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종합격투기 단체인 PRIDE였다.

1997년 10월, PRIDE 1회 대회에서 타카다 노부히코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명예 회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힉슨 그레이시과 대결했다. 하지만 그라운드에서 압도당한 끝에 암바에 걸려 패배했다. 심지어 암바가 제대로 들어가기도 전에 광속으로 탭을 치는 굴욕을 겪고 광속탭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그래도 'U계 프로레슬링 vs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대립 구도는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고, 여기서 가능성을 발견한 DSE는 PRIDE를 존속시키기로 결정했다.

흥행의 선봉장은 사쿠라바 카즈시와 타카다 노부히코였다. 1998년 6월, PRIDE 3에서 타카다 노부히코는 당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킥복서인 카일 스터젼과 대결했다. 그런데 카일 스터젼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게다가 카일 스터젼의 하이킥이 타카다 노부히코의 가드를 강타하자 타카다가 팔을 휘저으며 내동댕이쳐지는 황당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당시 북미 쪽 중계 영상을 보면 신나게 떠들던 바스 루턴이 순간 엄청나게 당황하는 반면 눈치 없는 파트너는 "저 친구 왜 저렇게 오도방정을 떨죠? 원래 스타일인가요?"라며 루턴의 속을 긁었다. 여기서 타카다 노부히코는 태클을 허용하여 가드에 몰렸지만 2분 만에 힐 훅으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경기는 카일 스터젼의 유일한 MMA 시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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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 PRIDE 4에서는 힉슨 그레이시와 재대결했으나 암바에 걸려 패했다.[4]

1999년 4월, PRIDE 5에서는 UFC 초대 헤비급 챔피언인 마크 콜먼과 대결했다. 'UWF 수장 vs UFC 왕자' 구도의 대결은 일본 팬들의 엄청난 주목을 받았으나, 이번에도 타카다 노부히코는 무기력하게 콜먼의 태클에 유린당하며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렸다. 그런데 2라운드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하위에 깔린 타카다 노부히코가 마크 콜먼의 다리를 잡고 기습적으로 힐훅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에 경기장은 떠나갈 듯 달아올랐고 일본의 해설진은 광란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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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라운드에서 마크 콜먼의 움직임은 너무 이상했다. 상위 포지션을 잡고도 제대로 공격을 하지 않은 채 애매하게 타카다 노부히코의 허벅지만 두들겨댔고, 경기 후의 인터뷰에서도 "난 두 아이의 아버지다. 거절할 수 없는 오퍼였다"고 말하며 의혹을 증폭시켰다. 그 뒤 한 기자가 다시 한 번 마크 콜먼에게 이 시합의 워크 의혹에 대해 묻자 콜먼은 노코멘트라고 말하며 답변을 회피했다. PRIDE의 브라질 해설가는 중계 중 대놓고 이 시합이 워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마크 커, 호이스 그레이시 등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이고르 보브찬친에게도 패했지만 타카다 노부히코가 실전으로 치른 경기 중 제일 선전했던 경기였다. 조금이지만 그라운드에서 우위를 보였고, 1라운드 막판 스탠딩으로 전환한 이후 하이킥도 적중시켰다. 그러나 이고르 보브찬친은 하이킥을 허용한 후 순간적인 충격만 받았을 뿐이었다. 프로레슬러로 활동할 당시 하이킥이 피니시 무브였던 타카다 노부히코 본인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경기가 흘러갔고, 2라운드엔 그라운드 상태에서 파운딩을 당하다 부상으로 인한 서브미션패를 당하고 말았다.[5]

PRIDE 7에서 프로레슬러인 알렉산더 오츠카를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꺾으며 연패의 사슬을 끊긴 했으나 이 경기는 전후 사정으로 보나 경기 내용으로 보나 종합격투기를 표방한 프로레슬링 경기였다. 타카다 노부히코가 공식적으로 밝히진 않았으나 경기 중 프로레슬링스러운 움직임이 눈에 띄게 많았고 결정적으로 DVD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이 경기는 셔독 전적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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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에는 PRIDE 17에서 미르코 크로캅과 대결했는데 이노키 알리 포지션만 줄창 나온 끝에 무승부로 끝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1라운드에서 미르코 크로캅의 왼쪽 종아리에 오른발로 로우 킥을 시전했는데, 1라운드 종료 후에 가진 인터벌타임에서 타카다 노부히코의 오른발 발등이 야구공 1개의 크기로 심하게 부어있었다. 이후 타카다 노부히코는 TV 인터뷰에서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발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고, 경기 종료 후 의료진에 의해 전치 2개월의 진단이 떨어졌다.

타카다 노부히코의 마지막 MMA 시합은 2002년 11월에 PRIDE 23에서 타무라 키요시를 상대로 한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타카다 노부히코는 타무라 키요시의 펀치에 맞아 KO패를 당했다. 경기 후 타무라 키요시는 "감사합니다. 여러가지 잘못을 저질러 죄송하고 지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2년 동안 꿈과 감동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에 타카다 노부히코는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없다. 타무라 넌 최고의 악역이었다."라고 답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타무라 키요시를 부당하게 악역 취급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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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시합도 워크 의혹이 있다. 일단 KO 직후 타카다 노부히코의 표정이 이상했다. 패배를 맞은 선수의 표정이라기보다는 뭔가 충격에 빠진 듯한 어이없는 얼굴이었다. 타무라 키요시의 마이크 워크 또한 의혹의 여지는 충분하다. 훗날 팬들의 의견은 타카다 노부히코가 승리하는 각본이었는데 타무라 키요시가 일부러 엎어버린 것으로 모아졌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두 사람 사이에 UWF 시절부터의 알력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무라 키요시는 UWF 인터내셔널의 간판이었으나 늘 인기는 타카다 노부히코에게 밀려 있었다. 그래서 타무라 키요시가 마이크워크로 타카다 노부히코한테 진검승부로 붙고 싶다고 말한 적 있는데, 이는 각본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그러나 타카다 노부히코는 UWF의 인기에 힘입어 정계에 출마하게 되고, 선거 기간 동안 유세 활동을 하느라 UWF 인터내셔널이 개최하는 이벤트에 지속적으로 불참했다. 이에 갈등이 커질 대로 커지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타카다 노부히코가 낙선하게 되자 UWFi는 최악의 재정난에 봉착하게 되면서 결국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합동 이벤트를 개최했다. 이때 타무라 키요시와 타카다 노부히코의 갈등이 폭발하며, 타무라가 참전을 거부하자 타카다는 타무라를 제명시켰다. 그러자 K-1 측에서 타무라 키요시에게 패트릭 스미스와의 경기를 제안했고, 타무라가 승리를 거두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결국 타카다 노부히코는 어쩔 수 없이 타무라 키요시를 UWFi로 복귀시켰지만 타무라 키요시는 마에다 아키라의 단체인 Rings로 이적해 버렸다.

타무라 키요시는 패트릭 스미스에게 승리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프로레슬링은 강하다'는 가치관을 증명했다. 결국 단체의 상황, 증명된 자기 실력, 타카다 노부히코와의 갈등이 더해져 이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인 1997년에 사쿠라바 카즈시가 UFC Japan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두 선수가 같은 가치관을 증명하고 각자 서로 다른 단체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무튼 비하인드 스토리와 무관하게 당시로서는 자못 감동적인 은퇴전이었다.

3.2. 파이팅 스타일

U계 프로레슬링을 베이스로 한다. 실전을 지향한 프로레슬링이었으나 다른 대부분의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MMA에서 경쟁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UWFi 출신의 사쿠라바 카즈시는 U계 프로레슬링보단 캐치 레슬링을 베이스로 해 성과를 냈으며, 후지타 카즈유키는 아마추어 레슬링의 베이스가 있었다. 브록 레스너도 아마추어 레슬링의 베이스가 있는데다가 종합격투기 훈련을 따로 하는 등 MMA 종목에서 활약한 프로레슬러들은 프로레슬링과는 무관한 베이스가 있었다. 게다가 마에다 아키라는 일본 프로레슬링이 종합격투기로 변모하는 시기에 활동했지만 타카다 노부히코는 MMA가 어느 정도 정립된 시점에 활동했기 때문에 마에다 아키라와는 달리 참혹한 전적을 떠안게 된다.

타카다 노부히코의 MMA 실력은 저조하지만 MMA 시합에서 프로레슬링을 하는 쇼맨십 강한 스타일이 일본에서는 인기를 모았기에 스타 선수가 부족했던 초기 시절에 일본의 간판 스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후에 이러한 쇼맨십을 중시하는 스타일을 벤치마킹해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는 쇼맨십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서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하고 저조한 성적에도 높은 인기를 구가한 미노와 이쿠히사다. 반면 대표적인 실패 케이스는 지나치게 쇼맨십에 의존하려다가 막장테크를 타버린 타니가와 프로듀서 시절의 K-1이 있다.

4.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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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타카다 노부히코는 현역에서 물러나 PRIDE FC의 총괄본부장으로 취임했다. 총괄본부장으로 취임한 이후로도 PRIDE의 얼굴 마담으로 활동하면서 인기몰이에 한 몫 했다. 이 때 PRIDE의 연말 이벤트인 남제에서 태고를 치기도 했는데 당시 많은 외국인들에게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현역 종합격투기 선수로 활동하며 얻어터지던 시절보다 이때가 더 멋있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인데 미남형 외모에 큰 키, 프로레슬러로 활동하며 익힌 마이크워크 때문에 이쪽 방면으로는 최적의 인재였다. 하지만 타카다 노부히코는 PRIDE의 실세가 아니었고, 실세는 사카키바라 노부유키 대표였다. 그래서 경영 일선에서 활동하며 지분도 소유하고 있는 데이나 화이트와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

2015년 Rizin FF의 총괄본부장으로 취임해 2018년 RIZIN.14 대회 때까지 활동했다. 그 후 2020년 RIZIN.22 대회 때부터 Rizin FF의 「캡틴」으로 취임했다.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각종 일본 영화나 일본 드라마에 조연으로 종종 출연하고 있다.[6]

5. 기타

  • 이름을 영어로 표기하면 Takada Nobuhiko인데,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다카다 노부히코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타카다 노부히코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 현역 시절 일본에서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프로레슬러 시절에 쌓아놓은 흥행 스타 및 강자로 보이는 이미지 메이킹의 역량 덕도 있고, 종합격투기 경기에서 워크 의혹이 난무하긴 했지만 당시 일본 팬들은 타카다 노부히코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MMA의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이기도 했고 Rings의 마에다 아키라나 Pancrase의 후나기 마사카즈 및 스즈키 미노루도 프로레슬링이 아닌 실제 이종격투기 시합을 뛰었기 때문에 PRIDE가 출범하던 시절만 해도 일본에서는 프로레슬링과 실전 이종격투기의 구분이 희미했기 때문이다.
  • 제1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사와야카신당 비례대표 2위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비례대표 1위는 고바야시 시게루.
  • 벚꽃스캔들에 대해서 아베 총리의 대응에 대한 비판을 한 적 있다.

6. 둘러보기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레슬링 옵저버 선정 최고의 테크니션
후지나미 타츠미
(1986)
타카다 노부히코
(1987)
후지나미 타츠미
(1988)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레슬링 옵저버 선정 5성 경기 [★]
1984년
12월 5일
UWF
이어 엔드 스페셜
싱글 매치
_야마자키 카즈오_ vs 타카다 노부히코
1987년
3월 20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스프링 플레어 업
IWGP 태그팀 챔피언십 결정 도전자 결정전
무토 케이지 & 코시나카 시로(O) vs 마에다 아키라 & 타카다 노부히코(X)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MVP (최우수 선수상)
점보 츠루타
(1991)
타카다 노부히코
(1992)
텐류 겐이치로
(1993)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최우수 태그팀 상
학용 콤비([ruby(鶴龍, ruby=かくりゅう)]コンビ)
(점보 츠루타 & 텐류 겐이치로)
(1983 & 1985)
월경 태그([ruby(越境, ruby=えっきょ)]タッグ)
(코시나카 시로 & 타카다 노부히코)
(1986)
류겐포([ruby(龍原砲, ruby=りゅうげんほう)])
(텐류 겐이치로 & 아슈라 하라)
(1987)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노력상
코시나카 시로
후지와라 요시아키
(1982)
후치 마사노부
타카다 노부히코
(1983)
폐지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연간 최고 시합상 (베스트 바웃) [★]
1996년
9월 11일
UWF 인터내셔널
SUDDEN DEATH
~창설 5주년 기념 특별흥행 파이널~[9]
UWF vs WAR 대항 싱글 매치
텐류 겐이치로 vs _타카다 노부히코_


[1] 일본의 프로레슬링 단체인 HUSTLE에서는 타카다 총통으로 활동한 바 있다.[2] 종합격투기 선수로 활동할 때는 세이키마츠, 잉베이 맘스틴에게 테마곡을 제공받은 바 있다.[3] 둘 다 워크 의혹이 있다.[4] 근데 경기 내용으로 놓고 봤을 때, 일본 내에서 힉슨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보이긴 했었다. 다카다가 지리한 클린치 싸움 끝에 잠시나마 톱 포지션을 선점했기 때문. 그러나 다카다가 포지션이 굳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힐훅을 하려 했던 병크를 저지르자 쉽게 막히고 무난히 포지션이 역전되며 결국 이전 경기와 똑같이 암바로 패했다. 어쨌든 잠시나마 힉슨을 상대로 유리한 포지션을 점하는 장면을 연출한 덕분에 일본 내에서 힉슨을 잡기 위한 힉슨의 다음 경기 추진이 굉장히 활발했다. 그러나 후나키 마사카츠 전에서의 힉슨의 모습은 여전히 강했다.[5] 확실히 1라운드는 다카다의 우세는 분명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경기 당시 중계진들이 상당히 고무적인 텐션으로 중계했으니까.[6] 고독한미식가 시즌8 11화에 양고기집 점장으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9] 원문은 旗揚げ5周年記念特別興行ファイナ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