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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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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품 합체하면 이런 모양이 된다.

1. 개요2. 상세
2.1. 실상
3. 역사
3.1. 중국사3.2. 한국사
4. 미디어

1. 개요

丹書鐵券.

황제이 내리는 일종의 국가유공자 자격증이라 할 수 있다. 옥새를 찍어 반으로 갈라 하나는 종묘에 보관해두고 하나는 상대방에게 주었다.

2. 상세

고제는 처음 제후에 봉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단서' '철권' 을 하사하고 말하였다. "황하가 다 걷어 올려지고, 태산이 다 갈아 없어지게 될지라도, 한왕실의 종묘가 이어지는 한, 너희는 대대로 끊김이 없으리라!"
高帝初,封侯者皆賜丹書鐵券. 曰:"使黃河如帶,太山如礪,漢有宗廟, 爾無絕世."
태평어람 633 中
한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공신들 중에 분봉 받은 자가 백여 명[1]이었다. (중략) 태초(太初)[2] 연간에 이르기까지의 1백 년 동안, 작위를 보전한 자는 겨우 다섯 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법을 어겨 목숨을 잃거나 나라를 망쳐버리고 말았다.
漢興, 功臣受封者百有餘人. 至太初百年之閒, 見侯五. 餘皆坐法隕命亡國, 秏矣.
사기 고조공신후자연표 中[3]

금서철계(金書鐵契), 금서철권(金書鐵券), 단서철권(丹書鐵券), 단서철계(丹書鐵契) 또는 간단히 철권(鐵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참고로 철권(鐵券)이란 철로 만든 기왓장을 말한다.

단서철권은 적어도 전한 한고조 유방의 건국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시기에는 로 만든 기왓장에 단사라고도 부르는 주사로 글을 써서 완성했기 때문에 단서철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주사로 쓴 글은 생각보다 잘 날아갔다. 더 정확하게는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철은 산화철이 되면서 붉은 색으로 변하고, 주사도 황화수은이 불안정해서 검붉은 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어두운 붉은 색 바탕에 어두운 붉은 색 글씨가 되어서 글을 알아볼 수가 없게 변했다. 그래서 남북조시기의 국가인 나라에서는 을 주입해서 은권(銀卷)이 되었고,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수나라 때부터는 으로 글을 새겨넣으면서 금권(金券) 또는 금서(金書)라고 불렸다. 금서철권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때문이다.

훗날 죄를 지었을 때 형벌을 감면해주는 까방권 역할도 했다. 공신에게 하사하는 아이템이란 점에서 구석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2.1. 실상

하지만 단서철권 및 다른 면죄 하사품들을 소지했다고 해도 그걸 믿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의 권력으로 제어할 수 없는 존재를 군주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 또 신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든 처형할 구실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대놓고 단서철권 등을 무효화시키기면 명분상 문제가 존재하므로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서 숙청을 단행했다.
  • 예외 조항 설정하기 - 일반적으로 군주에게 반기를 드는 반역 등은 사면하지 않는다고 예외 조항을 남겨둔다. 명나라의 공신 이선장이 호유용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당할 때 단서철권을 내밀었는데 그 단서철권의 뒷면에 작은 글씨로 '역모죄는 사면하지 못한다.'라고 적혀있어서 데꿀멍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아예 역모죄를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를 숙청해버리는 방법도 있다.
  • 면죄 횟수 설정하기 - 무한정 면죄는 안되고 일정 횟수만큼만 면죄가 되도록 설정하는 것이다.[4] 그리고 해당 신하를 숙청하고 싶을 땐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죄목을 제시한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단서철권은 구석처럼 의미가 변질하여 황제와 신하의 미묘한 관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변하였다. 쉽게 말해서 단서철권을 하사할만한 신하라면 황제 입장에서 껄끄러울만큼 지위가 높아서 오히려 경계, 숙청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것. 그래서 당나라 때 이회광이라는 신하에게 황제가 단서철권을 하사하자 "신하에게 반란 혐의가 있을 때마다 단서철권을 하사하였는데 오늘 나에게 하사해서 반란하게 만드는구나!"라고 화를 내며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3. 역사

3.1. 중국사

원래 한고조 유방이 개국공신들에게 수여할 때까지만 해도 공신녹권에 가까웠다. 죄를 면제해준다거나 하는 의미는 없었고, 관직이나 봉토를 준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남북조시대가 되면서 북위효문제가 면죄부의 의미로 발급한 것을 비롯해서 면죄부로 흔히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게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 정도 되면 완전히 제도화되기 시작했다.[5] 대충 '이 사람의 조상은 이런이런 공적이 있으니 잘못을 저질러도 목은 치지 말 것'이라는 뜻이다. 비슷한 아이템으로 면사패(免死牌)가 있다.[6]

대표적인 예로는 수호전시진이 있다. 시진의 가문이 후주의 황족이었고, 송태조가 후주에 쿠데타를 일으킨 후 북송을 건국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서 시씨 가문의 대를 잇게 해주고 후대에도 반역죄 같이 큰 죄가 아닌 이상 웬만하면 사면해 달라는 의미에서 단서철권을 내려 그들을 보호해주었다.[7] 수호전에서 각종 호걸들이 시진의 집에 모여드는 이유가 시진의 집이 단서철권으로 보호받는 일종의 치외법권이기 때문이다.[8]

드라마 포청천에서도 시씨 가문의 죄인이 이것을 들고 나타나면 상방보검으로 현 황제의 숙부와 사촌마저 가차없이 박살내는 포청천조차 쩔쩔매며 상기한 대로 반역을 제외한 그 어떠한 죄라도 합법적으로 무죄처리 되기 때문에 사실상 처벌할 방도는 전혀 없다. 다른 황제도 아니고 건국의 시조인 태조 조광윤의 명이기 때문. 현위 황제의 명이라면 포청천도 사직 협박을 하고 깽판이라도 치면 명령을 거둘 수도 있지만 조광윤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명령을 거둘 수도 없다. 게다가 건국 시조인 태조의 명령과 후대황제의 명령 위상은 하늘과 땅 그 이상의 차이이다. 당연히 후대 황제들이 절대로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영역이다. 바꾸려고 시도하는 시늉이라도 내는 순간 건국이념과 황제 본인의 정통성에 치명적인 흠을 남기게 되기에... 결국 시문의가 악랄한 연쇄 강간살인마임에도, 단서철권 때문에 드라마에서조차 법으로 처벌할 수 없었으며 대신 벼락이 떨어져(...) 죽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다만 조광윤도 시씨 가문의 후손들이 깽판을 칠 가능성을 감안해서 후주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 시종훈 본인과 그 후손 중에 가문의 수장에게만 적용하도록 하였다.[9]

주원장도 명 건국 후 공신들에게 단서철권을 내렸다. 하지만 단서철권을 하사한 창업주라서 눈치볼 사람이 없는 주원장은 공신들을 숙청하기로 마음먹고선 단서철권의 면사패 기능 따윈 뭉개버렸다(…).

3.2. 한국사

고구려 전기의 무장인 (密)은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창을 들고 혼자서 연나라 군대에 맞서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왕에 봉해졌다. 밀은 왕으로 책봉되는 것은 사양하였으나 대신 고(高)씨 성과 금문철권(金文鐵券)을 받아 대대로 제후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삼국유사에도 등장한다. 백제가 660년 멸망하고 옛 백제 영토 일부는 당나라가, 일부는 신라가 점유하는 구도가 되었다.[10] 5년 뒤, 당나라의 사실상의 강요로, 옛 백제의 중심지였던 웅진성에서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주관하고, 옛 백제 태자였고 지금은 당나라의 관리가 된 부여융신라 문무왕과 만나서 신라와 백제 사이의 원한을 잊자고 하면서 맹세를 시킨 '취리산 회맹' 사건 당시 이 맹세문을 기록한 금서철계(=단서철권)를 만든 것이다. 즉 이미 멸망한 백제와 아직 멀쩡한 신라를 동격으로 놓아서 더이상 신라가 당나라가 지배하는 백제 영역으로 침투하지 말 것과, 여차하면 신라도 백제처럼 될 수 있다고 협박하는 메시지였다. 등장인물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웅진도독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고, 몇 년 뒤 나당전쟁이 터지자마자 신라가 옛 백제 지역의 웅진도독부를 대대적으로 공격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이후 이 단서철권은 휴짓장보다 가치가 없어졌다.[11]

고려사에도 기록이 있다. 홍규(洪奎), 인후(印侯), 윤석(尹碩), 한악(韓渥), 김부윤(金富允), 장항(張沆), 채하중(蔡河中), 이능간(李凌幹), 한종유(韓宗愈), 이제현(李齊賢), 손기(孫琦), 류숙(柳淑), 최영(崔瑩), 설장수(偰長壽), 조인옥(趙仁沃) 등은 그 열전에 철권을 하사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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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이 서유에게 내린 단서철권.

조선시대 선조는 임란 후 1605년 25의사와 5열녀의 가문에 단서철권을 내려 그 공적을 치하했다. 가끔 명가의 족보를 찾아보면 '~~년 왕이 우리 가문에 단서철권을 내리셨다.'하고 자랑하는 일도 가끔 있다. 다만 조선의 단서철권은 모든 죄를 면죄한다는 의미의 면죄부라기보다는 원래 한나라 시기처럼 공신녹권에 가깝고, 그 형태 역시 중국에서처럼 철판에 금입한 물건은 아니라 두루마리 문서 형태이다.

4. 미디어

판관 포청천뇌정노 편에서 단서철권이 아주 중요한 요소로 이야기 내내 주인공 포청천을 괴롭힌다. 뇌정노 편은 내용 전체가 이 아이템의 위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2022년 중국 드라마 <산하월명>에 등장한다. 개국공신 연안후 당승종, 길안후 육중형, 형양후 정우춘, 평량후 비취, 남웅후 조용, 의춘후 황빈, 하남후 육취가 황궁앞에서 상의탈의하고 면사철권을 들고 사직투쟁을 했다. 결국 모두 참수당했다.


[1] 143명[2] 한무제의 연호로 기원전 104년~기원전 101년에 사용했다.[3] 참고로 사마천은 태초 연간(기원전 104~101년)까지 기록했는데 그런데 이보다 이후인 기원전 91년에 벌어진 무고의 화에서 이 시기까지도 이어져온 조참의 가문도 끝장난다. 조참의 5대손인 조종이 연루돼 죽게 되고 봉국도 폐지된 것.[4] 타타라 잉굴다이가 참수 1회 면제권을 받았다고 한다.[5] 당시의 시대상과 기타 등등을 고려하면 강력한 귀족 및 호족 세력의 권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원장을 포함한 명나라나 청나라 시기 정도 되면 말 그대로 죽지만 않은 정도였다면, 호족들 권위가 강한 시기에는 무한 우대권 취급을 받았다.[6] 단서철권과의 차이는 단 한 번만 효력이 발휘된다는 점. 이는 드라마 포청천(1993년판) 음양판 편에 잘 나온다.[7] 이후 황실에만 비밀리에 전수하는 석각유훈(石刻遺訓, 돌에 새긴 유훈)으로 같은 내용을 대대로 전하게 했으며, 이 유훈에는 간언하는 신하를 죽이지 말라는 내용도 같이 담았다.[8] 그러나 이를 무시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고렴이었다. 이 때문에 시진은 창주 감옥에 갇혔다가 양산박 호걸들에게 구출당한 뒤 양산박으로 향해야 했다.[9] 아래에 묘사하겠지만 드라마 포청천에서 시문의가 자기 아버지에게 자결을 종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당연히 아버지가 가문의 수장이므로, 그에게는 단서철권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일반 사대부들처럼 처결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패륜 아들도 아들이라고 결국 살리기 위해 진짜로 자결해 버렸고, 포청천은 그걸 무시하고 법대로 처결하려 했으나 황제의 명으로 풀어줘야 했다. 이런 식으로 시씨 가문은 대단한 특혜를 받았고, 그에 대한 보답인지 시씨 가문은 남송이 멸망하는 애산 전투 때까지 송 황실과 운명을 함께 했다.[10] 이후 670년에 발발한 나당전쟁으로 당나라 세력을 모두 축출하게 된다.[11] 문무왕은 부여융에게 자기 누이를 죽였다며 얼굴에 침을 뱉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좋아서 단서철권 따윌 만들었겠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