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 v Dudley and Stephens1884년 영국에서 발생한 식인 사건을 다룬 재판. 긴급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살인 및 식인을 한다면 죄가 성립되는가를 다루고 있다. 법학이나 공리주의를 배울 때 나름 중요하게 다뤄지는 판례 중 하나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 강의에서도 등장한 일화이며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로 논의할 수 있는 주제 중 하나다.
2. 진행 과정
사건은 미뇨네트호가 난파된 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미뇨네트호는 요트 한 척을 영국에서 호주로 배달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배에는 모두 4명이 타고 있었는데 선장인 더들리와 1등 항해사인 스티븐스, 일반 선원인 브룩스, 그리고 잡무원이었던 리처드 파커였다. 이 중 리처드 파커는 고아였고 나머지 선원들은 부양할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출항 당시부터 이미 미뇨네트호는 오래되고 관리가 안 되어 부실했기 때문에 결국 항해를 시작한 지 7일만에 거대한 풍랑을 만나 침몰했다. 선원들은 난파된 배에서 구명정을 타고 급하게 탈출하였는데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이라곤 통조림 2개와 나이프 1개, 경도 측정 시계가 전부였다.며칠은 통조림과 바다거북을 잡아먹고 빗물을 마시면서 버텼으나 당연히 머지않아 바닥났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며칠을 버티던 중 더들리는 당시 선원 관습[1]에 따라 나머지가 살아남기 위해 죽을 한 사람을 정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브룩스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정은 유보되었으나 며칠 후 갈증을 참지 못한 리처드 파커는 다른 선원들이 잠든 틈을 타 바닷물을 마셨고 다음날 아침 더들리는 스티븐스와 공모하여 탈수증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던[2] 파커를 살해한 후 식인하였다. 이에 반대하던 브룩스도 더들리의 설득에 갈증과 허기를 참지 못하고 식인에 가담했다. 이들은 그로부터 4일 후 근처를 지나가던 독일 배에 의해 구조되었다.
영국에 도착한 후 더들리는 식인을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고 끝내 소송[3]을 당한다. 소극적이었던 브룩스는 검찰측 증인으로 나서 기소를 면하였으나 적극 가담했던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당시 여론과[4] 실제로 사형을 집행할 마음이 없었던 정부[5] 등 복합적 요인들에 의해 두 사람은 수감된 지 6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3. 기타
피해자 파커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나오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유래이기도 하다. 해당 소설에도 식인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1] 관습이라고 해도 당시에도 흔히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다.' 정도의 관습이었던 것. 이 사건이 일어나기 50여년 전에 쓰여진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아서 고든 핌의 모험'에도 표류하던 배에서 제비뽑기로 희생할 사람을 뽑는 묘사가 나오며 공교롭게도 이 소설에서 희생된 선원의 이름도 '리처드 파커'다.[2] 목마름이 있을 때 바닷물 같이 소금 농도가 높은 물을 마시면 역삼투로 인해 오히려 체액이 바닷물 쪽으로 흘러가 갈증이 더 심해진다.[3] 알려진 바에 의하면 더들리는 소송을 당한 걸 알고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한다. 더들리는 선장으로서 최대한 많은 선원을 살려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믿었기 때문에 4명이 다 죽을 상황에 파커 한 명을 희생시켜서 자신을 포함한 나머지 3명이 살아 돌아왔으므로 당시 상황에서는 이것이 선장으로서 최선이었라고 믿었다고 한다.[4] 피해자의 형이자 마찬가지로 선원직에 종사하던 다니엘 파커조차도 피고들을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이는 등 당시 여론은 압도적으로 생존자들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영국 사회는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식인 풍습이 있다는 이유로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영국 선원들이 식인했다는 것은 용납받지 못할 일이라고 여긴 검사측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유죄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5] 재판 당시에도 이미 배심원들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