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22:06:51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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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imus Junius Brutus Albinus
(기원전 84년/81년 ~ 기원전 43년)

1. 개요2. 생애3. 평가

1. 개요

고대 로마의 정치가, 군인, 장군이다.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갈리아 전쟁을 치렀던 군단장이자, 카이사르가 총애하던 인물이며 또한 배은망덕의 상징.

윌리엄 셰익스피어데키스 브루투스로 잘못 표기한 후 이쪽이 더 유명해지는 사태가 발생, 로마인 이야기에도 같은 오류가 있다.[1]

2. 생애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이다. BC 77년 집정관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아내[2]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에게 입양됐다. 하지만 양부의 성을 따르지 않고 브루투스라는 성씨를 유지한 채 양부의 성씨인 알비누스를 기존의 성 뒤에 더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등과 함께 젊은 시절을 보냈고, 갈리아 전쟁기에서 카이사르가 직접 애정을 표현한 2명의 군단장 중 한명[3]이기도 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갈리아 전쟁 수행 기간 동안 카이사르 휘하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 카이사르는 먼 친척인 그를 아들처럼 여기고 총애했다. 특히 카이사르군의 해전 전문가로 활약하여 갈리아 전쟁에서는 갈리아 베네티족의 함대를 괴멸시켰으며(모르비앙 해전) 카이사르의 내전에서는 폼페이우스 편을 든 마실리아(현 마르세유)를 봉쇄하고(마실리아 공방전) 폼페이우스가 보낸 구원 함대와 연힙한 마실리아 함대를 대파하는 등의 전공을 올렸다.(타우로엔토 해전)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이후 브루투스를 법무관 중에서도 군사 지휘권을 가지는 요직인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Praetor peregrinus)로 임명했고, 기원전 44년의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으로 내정하기까지 했다.[4]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당시 그는 중요 인물 중 하나로 참가했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에게 설득되었다고 하며, 아내의 악몽 등 기타 여러 징조로 원로원 회의 참석을 주저하던 카이사르가 예정대로 회의에 참석하도록 설득하거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른 곳으로 유도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카이사르 사후에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제 2 상속인으로 지명되었단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공화정 수호의 명분에 지지기반이 탄탄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 등과 달리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와 친척인데다 그의 휘하 부장으로 출세한 인물임에도 카이사르를 배반했기에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순간부터 몰락이 시작된다.

안토니우스와 암살자들 사이의 협상으로 암살자들에게 카이사르 생전에 내정되었던 직책들이 인정되면서 데키무스는 키살피나 총독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직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임기가 만료되고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지면서 당장 지휘할 군단이 더 필요하게 되었고, 그 목표로는 가장 가까운 키살피나의 데키무스가 적격이었다. 안토니우스는 데키무스에게 키살피나 총독직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데키무스는 이를 거절하여 갈리아 키살피나의 무티나에서 안토니우스에게 포위당했다.(무티나 내전) 로마의 키케로와 원로원이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집정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가 이끄는 로마 정규군이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하여 데키무스는 잠시 위기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하지만 두 집정관이 모두 전사하여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군을 장악했으며, 데키무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냉대당하고 상당수의 휘하 병사들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빼앗겼다. 데키무스는 남은 병력으로 갈리아 코마타[5] 총독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와 합세하여 안토니우스를 공격하려 했으나, 안토니우스는 히스파니아의 군단을 장악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손을 잡아 전력을 회복했고 이에 플란쿠스마저도 안토니우스 편으로 돌아섰다. 승산이 없어진 데키무스는 마케도니아의 마르쿠스 브루투스에게 합류하러 가던 중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갈리아 족장에게 붙들려 처형된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암살자들 중 가장 먼저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3. 평가

당시 로마 국체아이덴티티공화정을 지켜야 한다는 자기 신념에 따라 카이사르를 암살한 확신범이기 때문에 그래도 재평가를 받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달리 현대 사회에서도 그는 그냥 배신자 취급을 받고 있을 뿐이다.

본시 카이사르의 신임을 받는 무장에 제 2 상속자로 정해진 만큼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 안했다면 카이사르의 상속자라는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서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 등 카이사르의 후계자들과 경쟁할 수 있었을텐데 카이사르 암살에 참여한 순간의 판단착오로 여생을 제대로 망쳤다고 볼 수 있다.
[1] 한국어판에서 그렇게 나왔지만, 이는 번역한 김석희 씨의 잘못이지 원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잘못이 아니다.[2]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두번째 아내 셈프로니아는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셈프로니아와의 아들이라는 설도, 전처와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3] 또 한 사람은 삼두정치의 일각을 이룬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로, "솔개가 매를 낳았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아버지보다 여러모로 낫다고 평가받았으나 카르헤 전투에서 부친과 함께 전사했다.[4] 갈리아 키살피나는 오랜 로마의 지배로 거의 로마화가 완료된 부유한 속주였고, 그 총독직은 로마에서 가까우면서도 여러 군단을 지휘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5] 카이사르가 정복한 갈리아의 대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