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 | Τελώνια της Ψυχής |
영어 | Aerial Toll-Houses |
1. 개요
일부 신학적 전승과 성인들의 저술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겪는 과정을 다룬 동방 정교회의 개념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자신의 수호천사와 함께 하늘을 통과하여 하느님 앞에 가는 과정에서 마귀들이 영혼이 살아생전에 지은 죄를 두고 참소하는 과정이다. 정교회에서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마귀 무리를 통과하는 그들의 영혼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델로니아를 거치지 않고 곧장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영혼은 순교자와 성인들뿐이다.2. 세부 내용
서방 교회와의 대분열 이전부터, 교회 내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실천이 존재했다. 이와 관련하여 대분열 이후 가톨릭은 연옥을 비롯한 대사 교리 등을 발전시킨 반면, 정교회에서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에 대하여 신학의 법칙, 정식화는 하지 않았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델로니아는 정교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하는 교의는 아니다. 세계 공의회를 포함하여 정교회에서 큰 권위를 지니는 다른 지역 공의회들에서도 델로니아가 규정된 적은 없다. 다만 여러 성인의 증언과 지역 교회와 각지의 수도원들에서 폭 넓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존중받는 전승이다.정교회에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교리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에게 유익하며, 또 교회는 마땅히 그런 기도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렉산더 슈메만 대사제가 설명했듯이, 그러한 기도에 대한 동기는 논리적 추론에 의한 필요성[1] 등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죽은 이들에 대한 사랑이다.
성경에서 델로니아 개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은 없지만, 영혼의 사후 여정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은 있다.
야곱은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창세기 28장 12절
창세기 28장 12절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1-2절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1-2절
정교회 전통에서는 여기서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을 사탄과 그의 마귀들로 해석하며, 영혼이 사후에 그들의 참소를 통과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서간에서 사도 바울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에 그들을 대항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6장 11-13절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6장 11-13절
여기서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는 사람이 죽는 날이며, '하늘의 악령들에 대항하여 싸우다'라는 말은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서 하늘에서 악령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영혼이 천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악마들의 방해를 받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로스는 델로니아를 "사람이 죽은 뒤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그의 앞에 그를 데려가기 위한 하느님의 천사들과 그의 행적에 대해 비난하는 악마들이 서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을 본 인간 영혼은 악마들이 무섭고 두려워 천사들에게 보호를 요청한다. 그러면 천사들은 영혼을 보호하며 낙원(Παράδεισος)으로 데리고 올라간다. 그러나 영혼은 대기권을 지나면서 천국으로 가기 위한 길을 방해하는 델로니아를 만나게 된다. 각 관문에서 악마는 영혼에게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다. 관문에서 악마가 영혼을 유혹했지만 따르지 않은 죄 또는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해 고발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영혼의 수호천사가 영혼을 대변하여 악마의 고발은 거짓말이며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영혼을 다음 관문으로 데려간다. 관문을 모두 통과한 의로운 영혼은 낙원에서 영원히 선한 것들을 미리 맛보며 쉬면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천국이 아니라, 천국의 기쁨을 미리 체험하는 중간상태이다.
만약 생전에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고, 그 죄를 지불할 만큼 선행과 살아있는 자의 기도가 충분하지 않아서 영혼이 죄를 배상할 수 없으면 악마들이 영혼을 하데스(ᾍδης)로 끌고간다. 불의한 영혼은 하데스에서 영원한 고통을 미리 맛보게 되고 하느님과 멀리 떨어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정교회에서는 죽은 자들의 영혼에게 죽은 즉시 천국 또는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완전한 심판은 육신의 부활이 있고 난 후에 각 사람의 행적에 따라 최후의 심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영혼이 낙원에 갈지 하데스에 갈지 여부는 죽음 당시 영혼의 상태, 그리고 살아있는 자의 중재기도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델로니아를 지나기 위하여 정교회는 산 이가 죽은 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트라키아의 그리고리오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안드레아스 등 여러 성인이 본 환시에 따르면, 델로니아는 대략 20~23여개의 관문이 있다. 다만 정교회에서는 델로니아가 대기권에 있다거나 관문의 갯수가 몇 개인지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델로니아는 사심판에 대한 은유나 우화적 묘사로 이해된다.
3. 연옥과의 차이
흔히 가톨릭에서 이해하는 연옥과 정교회가 이해하는 델로니아가 별 차이 없는 교리이며, 심지어는 동일한 교리에 대한 다른 이해라고까지 표현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가톨릭에서 보나 정교회에서 보나 다소 오류가 있는 이해이다.델로니아와 연옥의 공통점은 그것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교회가 기도를 해주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델로니아를 통과하며 마귀들의 고발을 당하는 영혼이 조금이라도 쉽게 그곳을 통과할 수 있도록, 또 연옥에서 받는 정화와 하느님과의 단절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경감되도록 각 정교회와 가톨릭 신자들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바친다.
다만 차이점은 가톨릭 신학에서 설명하는 연옥이 죄는 용서받았더라도 남아있는 잠벌을 없애는 보속의 과정인 반면, 델로니아는 보속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교회 신학에는 죄와 잠벌의 관념이 없다. 회개와 고백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는다면 그걸로 그에 대한 벌도 완전히 없어진다고 믿는다.
사실 죄와 용서에 대하여 법정적인 표현방식을 발전시킨 서방 교회와는 달리, 정교회는 예전부터 죄를 질병으로, 하느님을 의사로 보는 관점을 심화시켜 이해했다. 따라서 대죄와 소죄, 잠벌 등의 신학이 발달한 가톨릭 신학에서 보는 연옥과, 이와 관련된 법정적 이해가 전무한 정교회 신학에서의 델로니아를 동치시키는 것은 분명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텔로니아는 ‘정화’라기보다는 사심판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4. 노자성체와 델로니아
죽음 직전에 성체성혈을 영하며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는 어떤 사건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그 사건은 라부라에 위치한 성 세르기오스와 성삼위의 수도원장인 안토니오스 신부의 삶에서 있었다.안토니오스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가 라부라에 있는 성 세르기오스와 성삼위의 수도원에 왔을 때 약간의 수도자들이 있었고 보제는 한 명도 없었다. 수도원장으로 부임한 얼마 후에 어떤 교구에서 보제 한명이 왔고 그는 다른 수사들과 잘 어울렸다. 그는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고 수도원에서 보조자로서 봉사하였다. 수도원의 축일이 있기 며칠 전 보제는 수도원장 안토니오스에게 집에 일이 있어 갔다올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 요청을 들은 수도원장은 갔다 오라고 허락하며 다시 말하였다.
"그러나 축일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누구와 같이 성찬예배를 집전할 수 있는가?" 그러자 보제는 "축일에 맞추어 도착하겠습니다. 빨리 돌아 오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축일 아침까지도 보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수도원장은 매우 초조하였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성찬예배가 시작되어 얼마가 지나자 보제가 도착하였고 그를 본 수도원장은 그에게 준비가 되었으면 성찬예배를 같이 집전하자고 말하였다.
성찬예배가 끝난 후 식사를 함께 하면서 어떤 수사가 보제의 목소리에 대해 "누군가가 집에 가서 그의 목소리를 두고 왔다." 하며 오늘은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고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보제는 신경이 예민해졌고 그들 사이에는 다툼이 오고 갔다.
그러고 난 후 보제는 그의 거처로 돌아가 물통을 들고 물을 길러갔다. 그러나 그는 통에 물을 가득히 채우고 그의 거처로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땅에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오스 수도원장은 매우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보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보제가 축일 전에 도착하라는 명을 듣고 급히 와서 성찬예배에 참여하여 고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수도원장은 죽은 보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모든 지역에 이 소식을 전하여 성찬예배에서 그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글을 써서 보냈다.
그가 죽은 지 사십일째 되는 날 안토니오스 수도원장이 그의 방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불을 켰고 그의 앞에 보제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께 감사드리러 왔습니다."하고 보제는 말하였다.
안토니오스: "왜지?"
보제: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기 때문이지요."
안토니오스: "나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수사들이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너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모든 곳에 너의 이름을 적어 보냈다."
보제: "내 이름은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수도원장은 누군가의 실수로 인하여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안토니오스: "델로니아를 어떻게 통과했느냐?"
보제: "마치 번개와 같이 통과하였습니다."
안토니오스: "어떻게 그렇게 통과할 수가 있었지?"
보제: "왜냐하면 죽기 전에 성찬예배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오스: "식사할 때에 다른 수도자와 다툰 것에 대하여는 어떻게 되었는가?"
보제: "주님께서 그것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에 다른 수녀원에서 수녀 한 명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수도원장은 보제에게 그녀는 어떤 상급을 받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저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하며 보제는 대답하였고 수도원장의 환시는 여기에서 끝났다.
[1] 예를 들어 "누군가가 천국에 갔다면 그를 위해 기도해 줄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천국에 갔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지옥에 갔다면 그를 위해 기도해 줄 필요가 없다. 한 번 지옥에 가면 다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상태도 지옥의 상태도 아닌 제3의 상태가 있을 것이다." 같은 식의 스콜라적인 논리 추론을 정교회는 발전시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