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사망자별 해상사고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참고: 비전시 사고만 기재함. 전쟁 중 일어난 선박 침몰은 제외. |
<rowcolor=#ffffff> 순위 | 이름 | 날짜 | 사망자 수 | 사고 원인 | 발생 위치 | 비고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1 | 도냐 파즈호 침몰 사고 | 1987년 12월 20일 | 4364명도냐 파즈 11명벡터 | 선박간 충돌 | 타블라스 해협, 필리핀해 | 비전시 해상사고 사망자 수 1위 20세기 해양사고 중 최다 사망자 |
2 | 르 줄라호 침몰사고 | 2002년 9월 26일 | 1863명 | 과적 정비 불량 | 감비아 연안 | 21세기 해양사고 중 최다 사망자 |
3 | 스파이스 아일랜더호 침몰 사고 | 2011년 9월 10일 | 1573명 | 과적 | 잔지바르 해협, 탄자니아 연안 | |
4 |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 1912년 4월 15일 | 1514명 | 빙산 충돌 | 북대서양 | |
5 | 태홍호 침몰 사고 | 1822년 2월 5일 | 1500명추정치 | 암초 충돌 | 벨비더 여울, 남중국해 | 19세기 해상사고 중 최다 사망자 |
6 | 술타나호 침몰 사고 | 1865년 4월 27일 | 1168명 | 보일러 폭발 | 미시시피강 | |
7 | 토야마루호 침몰 사고 | 1954년 9월 26일 | 1159명 | 악천후 | 쓰가루 해협 | |
8 | 제너럴 슬로컴호 화재 | 1904년 7월 15일 | 1021명 | 화재 | 이스트 강 | |
9 | 엠프레스 오브 아일랜드호 침몰 사고 | 1914년 5월 29일 | 1012명엠프레스 오브 아일랜드 2명스토스타드 | 선박간 충돌 | 세인트 로랜스 강 | |
10 | 알 살람 보카치오 98호 침몰 사고 | 2006년 2월 | 1012명 | 화재 | 두바 연안, 홍해 |
해상사고 요약도 | |||
일어난 날짜 | 1987년 12월 20일 | ||
유형 | 운항 중 유조선 벡터 호와 충돌 | ||
일어난 위치 | 필리핀 해상 | ||
탑승인원 | 도냐 파즈호 | 4388명 | <colbgcolor=#000080> 4401명 |
벡터 호 | 13명 | ||
사망자 | 도냐 파즈호 | 4364명 | 4375명 |
벡터 호 | 11명 | ||
구조자 | 도냐 파즈호 | 24명 | 26명 |
벡터 호 | 2명 | ||
선종 | 여객선 |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Do%C3%B1a_Paz_at_Tacloban.jpg |
1984년에 찍은 도냐 파즈 호 사진. (출처: 위키백과) 군데군데 녹슬었는데도 제대로 보수도 하지 않고 계속 운항한 흔적이 보인다. |
1987년 12월 20일 밤에 벌어진 필리핀 국적 여객선 '도냐 파즈 호'와 같은 필리핀 국적의 유조선인 '벡터 호'가 충돌한 해상사고.
무려 4375명이 사망하여 현재까지도 단연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여객선 침몰 사고로 손꼽힌다. 인재로 분류되는 해난사고 중 사망자 숫자 1위이자 비전시 상황에서 일어난 선박 사고 사망자 수 1위이며[1] 사망자 수 2위인 르 줄라호 침몰 사고와는 거의 3배 가까운 차이가 난다. 더불어 과적으로 인한 선박사고 사망자 1위라는 기록까지, 매우 불명예스럽고 비극적인 기록을 다수 세운 참사이다.
위키백과 정보 (영어)
사고 당시 KBS 9시 뉴스 보도
2. 도냐 파즈 호
MV(Motor Vessel, 동력선) Doña Paz히메유리마루 시절 (컬러사진)참고 |
돈 술피치오 시절 (흑백사진) 참고 |
1963년 일본의 오노미치조선소에서 만들어져 일본의 류큐해운(琉球海運)[2]에서 굴리던 배로, 일본에서 활약할 때 이름은 히메유리마루(ひめゆり丸)였다. 1975년 필리핀에 팔렸으며 처음 만들어질 당시 탑승 가능 인원은 608명이었다.
필리핀에서 처음 지은 이름은 돈 술리피치오호였고 개조를 거치며 탑승 가능 인원이 초기 설계의 두 배에 가까운 1,189명이 되었다. 1979년 6월 5일, 돈 술리피치오 호는 승객 1,164명을 태우고 가던 길에 화재가 일어나 반파되었으나 기적적으로 승객 및 승무원이 단 1명도 죽지 않고 모두 구조되었다. 문제는 이 배를 그대로 건져올려 고쳐서 도냐 파즈 호로 개칭하고 1981년부터 재운항했다는 것! 덤으로 탑승인원도 1450명으로 개조하였다.
그러나 지옥 같은 사건이 벌어지던 그 날은 정원의 4배, 진수 때의 7배가 넘는 4388명이 승선하였다. 바로 도냐 파즈 호의 소유주인 술피치오 선박회사가 불법으로 암암리에 표를 계속 팔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얼마나 막장인지 알기 쉽게, RMS 타이타닉과 비교해봐도, 타이타닉의 1/3 길이인 93m에 배수량은 20분의 1인 2324톤에 불과한 배에, 타이타닉의 2배나 되는 승선인원이 탑승하였으니 엄청난 막장인 셈이다.
3. 비극이 된 성탄절 항해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제작한 도냐 파즈호 사고 관련 다큐멘터리의 CG 사진.
1987년 12월 20일. 도냐 파즈호는 수도 마닐라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려는 승객들을 한 배 가득 싣고 레이테 섬을 떠나 마닐라로 향하던 중이었다.
대다수의 승객이 잠을 자고 있던 오후 10시 30분, 약 8800톤의 가솔린을 적재한 유조선 벡터호가 도냐 파즈호와 충돌하며 폭발했다. 벡터호에 실려있던 가솔린이 새어 나오며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했고 벡터호와 도냐 파즈호는 이내 화염에 휩쓸렸다. 근처 바닷물까지 화염 때문에 부글부글 끓어올랐고[3], 결국 모두가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 주간 여행은 생지옥이 되고 말았다.
3.1. 얼마나 타고 있었는가?
1987년 12월 22일자 MBC 뉴스 보도에서는오늘 당초 밝힌 1493명의 승선 인원에는 60명의 승무원이 빠져 있었다고 발표함으로써 침몰 당시 사고 선박에는 최소한 1553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라고 나온다. KBS 9시 뉴스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왔다. #이후에 최대탑승인원의 3배에 달하는 4388명이 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이 이리도 많았던 이유는 대충 구석에 틀어박혀 잠을 자는 입석표가 무척 값이 쌌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나 안전운행을 하는 다른 배의 삯과 비교할 수 없었기에 가난한 서민들이 엄청 몰렸으므로 사망자 대다수가 필리핀인이었다. 당시 승선객이 하도 많아서 타길 포기해 목숨을 구한 몇몇 관광객도 있었다.
그곳에는 일본인 관광객 5명 등 몇몇 외국인 관광객도 탑승했다.
3.2. 인재 중의 인재
불바다에 다이너마이트를 가득 싣고 들어가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던 운행 정황이 속속히 드러났다.- 구명조끼가 들어 있던 사물함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 배 모니터를 지키던 선원은 수습선원 한 명뿐이었다.
- 폭발이 일어나자 놀란 몇몇 선원은 아무런 말도 없이 전원을 내렸다. 그야말로 암흑천지가 되어버리자 사람들은 도무지 어디로 나갈지 몰라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했다.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하자 놀라 마구 나가다가 압사당하는 이들도 속출했다.
- 겨우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건만 구명정도 제대로 없었다. 승객들 일부가 불타는 바다 위로 뛰어내렸으나 기름이 붙은 바다는 유황불을 방불케 했다. 결국 사람들은 배에서 타죽거나 뜨거운 물에 빠져 즉사했다. 거기다가 당시 바다에 상어가 가득했다.
- 덤으로 도냐 파즈호와 충돌한 벡터호는 운항 허가도 받지 않았고 자격을 갖춘 선원조차 없었다.
이러다 보니 당시 외신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생존자가 있다는 게 기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3.3. 사망자
사진에서 유가족들의 분노를 느낄 수 있는데, 현수막에 이런 일은 결코 다시는 일어나선 안된다와 아키노 대통령, 정의를 보여달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도냐 파즈호에서는 4388명 중 단 24명(비율상으로 따지면 겨우 0.55%), 벡터호에서는 13명 가운데 2명만 살아남았다. 모두 4375명 사망. 그리고 생존자 모두 지독한 중화상을 입었다. 20세기, 아니 인류 역사상 벌어진 여객선 침몰 사고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은 참극으로 손꼽힌다. 사망자 수가 더 많은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사고나 우키시마호 사건 같은 참극도 있지만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인재였다. 도냐 파즈호 사건은 비전시 상황에서 가장 사상자가 많이 생긴 참극이다.
더 큰 비극은 이 바다에는 상어가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사건 이후 상어들이 몰려와 죽은 시체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하여 수색에 나선 수색대는 총으로 상어를 쏘면서 시체들을 인양해야 했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시체들은 화상으로 훼손이 심했고, 화상을 입지 않아도 펄펄 끓는 물에 죽은 시체가 가득했다고 한다.
생존자(여러 피부 이식 수술로 얼굴은 그럭저럭 회복됨)들이 증언하길 당시 어둠 속에 겨우 바깥으로 나와도 구명 정도 아무 것도 없이 그저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유조선이 폭발하면서 가솔린이 근처 바다를 뒤엎어 불바다가 되어버린 불지옥이었다고 치를 떨었다. 생존자 증언을 들어 보면 바다에서 사람이 타죽는 걸 봐 가면서 물 속으로 들어가며 그저 무조건 헤엄쳤는데 물 속이 펄펄 끓어서 팔이고 얼굴이고 타 들어가는 고통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렇게 헤엄쳐서 겨우 파편이고 뭐고 올라가서 살아남았지만 그대로 기절하여 나중에 병원에서 눈을 뜨니 온몸이 화상 투성이였지만 의사들이 그래도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는 말부터 했다고 한다.
3.4. 사건의 여파
벡터호나 도냐 파즈호나 선장 및 승무원들이 거의 죽은 탓에 두 선박업체와 감사에 소홀히 한 정부기관에게 책임 소재를 묻는 비난이 쏟아졌다. 사건 현장에서 벡터호 승무원 2명은 살아남았지만 그들도 중화상을 입은 채 사실상 죽었다가 살아난 상태였고, 땜질로 고용된 가난한 임시직 승무원들이라 이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그야말로 필리핀 건국 이래 최악의 대참사인지라 당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방송을 해야 했고 보상금으로 부랴부랴 2500만 페소(2010년대 미국 달러로 55만 달러)가 편성되었다. 필리핀에선 큰 액수이지만 보상금이라고 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돈이었으니 불만이 터져 나왔다.
결국 슐피치오와 벡터호 소유주이자 세계 굴지의 정유 회사인 칼텍스 그룹에게 소송이 제기되었다. 피해자들은 무려 12년이나 지난 1999년에서야 승소했다.
4. 여담
2009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세계 해난 사고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선 이 사건을 재현했다. 위에 도냐 파즈 닷컴에도 올라왔다.[1] 다만 전시 상황까지 확대해서 보면 순위가 확 떨어진다. 전시 상황 선박 사고 사망자 1위는 약 1만명 가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나치 독일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사고.[2] 해외에선 RKK해운으로 더 잘 알려짐.[3] 바닷물의 끓는점은 105도이다. 참고로 일반 물보다 끓는 점이 높은 이유는 순수물질인 물(화학, 열역학에선 물을 그 자체로 순수물질로 간주한다.)보다 여러 물질이 섞인 혼합물이기 때문에 조금 더 높은 것이다. 이를 끓는점 오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