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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야마루 침몰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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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erdurabo10.tripod.com/toyamaru.jpg
토야마루 침몰 사고
공식 명칭 [ruby(洞爺丸事故, ruby=とうやまるじこ)]
일시 1954년 9월 26일 22시 43분
유형 태풍으로 침몰
발생 위치 일본 하코다테시 쓰가루해협
탑승인원 1,309명
사망 1,159명
구조 150명
기종 기차 수송 연락선

1. 개요2. 토야마루3. 전개
3.1. 사고 당일3.2. 태풍의 습격3.3. 출항3.4. 최후
4. 사고의 여파

1. 개요

일본의 배 토야마루가 태풍 마리(台風第15号 Marie)[1]에 의해 침몰한 사건. "일본 국철 전후 5대 사고(国鉄戦後五大事故)" 중 하나다.[2] 하지만 사망사 수나 사고 원인을 감안할 때 나머지 4개의 사고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토야마루

일본에서 운행한 기차 수송 연락선이며 이름은 홋카이도에 있는 토야코라는 호수에서 따 왔다. 제2차 세계 대전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세이칸 연락선이 죄다 미군의 폭격으로 침몰되거나 항행불능이 되어 여러 척의 연락선을 전후에 새로 건조하였는데 토야마루도 그 중 한 척이었다. 4천 톤급 선박으로 1947년에 만들어져서 아오모리에서 홋카이도하코다테를 연결하는 여러 페리들 중 하나였다.

3. 전개

3.1. 사고 당일

1954년 9월 26일 그 날도 토야마루는 아오모리에서 승객들과 철도차량 몇 량[3]을 실어서 쓰가루해협을 건너 하코다테에 도착했다.

3.2. 태풍의 습격

문제는 그 날 태풍이 쓰가루 해협을 지난다는 예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후 3시경 토야마루는 이 날 운휴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예보대로 비가 퍼붓고 파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오후 5시 비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도 잦아들었다. 이는 이날 오후에 하코다테가 태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상 예보와도 딱 맞아떨어졌다.

토야마루 호의 콘도 선장은 지금 토야마루 호는 태풍의 눈 안에 있고 당시 기상대 예보대로 오후 6시 30분에는 태풍이 잠잠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문제는 당시 하코다테는 태풍의 눈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본디 홋카이도에 형성된 폐색전선이 태풍에 휘감아 내려오면서 생긴 음영지대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 시절에는 인공위성이 없었고[4] 통신 사정도 좋지 않아서 태풍의 눈을 정확히 확인하기 힘들었다.

3.3. 출항

승무원들은 결국 출항을 결정했지만 이미 이때부터 불안한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으니... 태풍이 다시 강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시 하코다테 앞바다에는 많은 비가 내렸고 그만큼 바람과 파도가 강해졌지만 토야마루는 개의치 않고 그저 태풍이 물러갔다는 기상예보만 믿고 출항하였다.

오후 6시 39분 토야마루는 승객과 승무원 1,309명을 태우고 하코다테 항을 떠나서 아오모리로 항행하기 시작했지만 기상상태가 너무 악화되자 오후 7시 1분 하코다테 외항에 잠깐 정박하여 바다 상태를 보기로 결정하고 닻을 내린다.

3.4. 최후

하지만 태풍의 눈을 벗어난 뒤 다시 폭풍우 속으로 들아간 토야마루는 미칠 듯이 빨라져 있던 유속으로 인해 닻이 고정되지 않았다. 뒤이어 파도가 배를 강타했고, 갑판이 낮은 페리[5]의 특성상 바닷물이 그대로 갑판을 넘어서 증기 추진이던 엔진실까지 물이 들어갔다. 결국 동력을 잃게 된 토야마루는 3시간 넘게 하코다테 항 일대를 표류했다. 그 와중에 선장은 하코다테 인근 나나에 해변으로 피항하려고 했지만 엔진이 꺼졌기 때문에 소용없었다.

결국 22시 26분 토야마루는 SOS를 쳤지만 너무 늦었고 단 17분 후인 22시 43분 침몰하고 말았다. 타고 있던 승객과 승무원 1,309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150명. 무려 1,159명이 사망했다. 사망자들 중에는 선거 유세를 위해 자신의 선거구로 갔던 유력 정치인을 비롯해서 홋카이도에 배치되어 있던 미군도 소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잘못된 기상 예보로 가라앉은 배가 토야마루호 한 척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세이칸을 왕래하는 (열차)화물선 수 척이 침몰되었고 여객선인 토야마루에서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나와서 그렇지 이들 배의 승무원 사망자만 해도 무려 227명이었다.

4. 사고의 여파

일본판 타이타닉이 따로 없을 수준의 대참사로, 일본 사회는 그야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6] 당시에는 미국의 지원에 의해 달러가 많이 흘러들어와서 어느 정도 경제의 기틀을 잡고 슬슬 앞으로 전진했는데 이 사고로 인해서 엄청난 심적인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배를 건조하기까지 기다릴 수 없어 대타로 세이칸 항로에 투입된 연락선은 부관연락선으로 투입되었던 케이후쿠마루(景福丸/경복환)[7]였다. 케이후쿠마루는 1960년대까지 세이칸 항로에 투입되었고 퇴역 후에는 하코다테에서 선상호텔로 재활용되다가 해체되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세이칸 터널의 굴착이 결정되었고 1988년에 완성되어서 더 이상 유사한 사고가 벌어질 일은 없게 되었지만 아오모리와 하코다테를 오가는 페리는 아직 남아 있는데 카페리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아오모리나 하코다테 양쪽에서 매일 15회(!) 운항한다. 다만 홋카이도로 여행가는 대다수의 철도 동호인들을 포함한 외국의 여행자들은 JR패스를 이용해서 열차로 홋카이도로 진입하거나 비행기로 바로 삿포로로 찾아가는 편이지[8] 이렇게 아오모리에서 배로 올라가는 경우는 드물다. 아오모리 말고 오마와 하코다테를 오가는 페리도 있다.


세이칸 연락선 운항 마지막 날[9]아오모리역 풍경. 참고로 영상에 나온 핫코다마루는 아오모리역 근처에 가면 보존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1] 이 사고 이후 일본 기상청이 "토야마루 태풍(洞爺丸台風)"이라고 이름을 지었다.[2] 나머지는 사쿠라기초 사고,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미카와시마 사고, 츠루미 사고이다.[3] 당시 세이칸 터널은 계획 되어 있던 단계였기 때문에 도호쿠 본선을 따라서 도쿄에서 아오모리까지 운행한 후 아오모리 역에서 연락선에 기차를 실어서 하코다테로 건너가서 하코다테에서 다시 삿포로로 올라가는 식으로 열차가 운행했다. 지금의 아오모리역하코다테역이 바다 방면의 두단식 승강장을 취한 이유는 이것이다.[4] 인류 최초의 위성인 스푸트니크가 발사된 건 이 사건이 발생한 지 3년 뒤의 일이다.[5] 애초에 철도차량을 실어나르기 위해서 이 배의 갑판은 정말 낮았다. 해수면에서 겨우 몇 십 cm 가량만 높았을 뿐이었다. 구형 카 페리에서도 이런 경우가 종종 보인다.[6] 일기예보가 잘못된 것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한데 엔진에 물이 들어갔는데 3시간 동안 멍때리고 있었던 것은 심각한 문제다.[7] 서울의 경복궁의 이름을 따서 만든 배다.[8] 그 유명한 JAL123 참사 당시 대파당한 B747-100SR이 고정투입될 정도로 가축수송이 이뤄지는 중이다. 현재는 B777-300, A350-1000이 다닌다.[9] 1988년 3월 13일. 당일 세이칸 터널이 개통했다. 어떤 의미로는 희비가 교차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