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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니치 백화점 화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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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당시 영상

1. 개요2. 사건 경위3. 사건 이후4. 여담 5. 유사 사례6. 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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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千日デパート火災

1972년 5월 13일 일본 오사카에서 일어난 대형사고.

한국의 대왕코너 화재사고[1]와 유사한데 3달 간격으로 발생했으며 똑같이 대형 화재사고였다. 대형 백화점에서 빚어진 참사라는 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 빗대는 경우도 있는데 센니치 백화점은 붕괴되지 않았다.

센니치 백화점은 엄밀히 말하면 백화점을 겸하는 일반 빌딩이었다.[2] 1958년 12월 1일 일본 드림관광이라는 회사가 신가부키극장의 개관에 맞춰서 개장했다. 지상 1층부터 지상 5층까지는 백화점과 수퍼마켓, 6층에는 게임센터, 7층에는 카바레, 지하 1층에는 유령의 집을 테마로 장식한 카페 사탄 등이 있었다고 한다.

2. 사건 경위

화마는 5월 13일 오후 10시 27분경 3층 여성복 매장에서 불길이 일면서 시작되었다. 불길은 5층까지 번진 정도였지만 유독가스가 빌딩 안에 가득 찼다. 피난시설이 미비하고 종업원들의 미숙함이 겹쳐서 사망 118명, 부상 78명이라는 일본의 빌딩 화재 중 최악의 피해를 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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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7층 캬바레의 모습

피해가 커진 이유는 7층 캬바레에 토요일 저녁이라 사람들이 많았는데[4] 엘리베이터도 정전으로 움직이지 못했고 1층으로 바로 통하는 비상구가 2개에 1~6 각 층으로 통하는 비상계단, 각 층 및 옥상으로 통하는 비상계단이 있었지만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1층 직통 계단은 먹튀를 못하게 잠갔다는 얘기도 돌았지만 화재가 발생하기 전부터 잠겨 있었다.[5] 어쨌든 탈출을 위해서 비상구를 열고자 했으나 열쇠를 보관해둔 사무실에 이미 연기가 가득 차서 접근이 불가능했고 문을 잠가 두지 않은 직통계단과 1~6 각 층으로 통하는 계단은 환기구 등에서 올라온 유독가스가 가득 차서 접근이 불가능했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중 여러 사람들이 막힌 통로 한쪽 편에 몰려 있었는데 이것은 점포 옆 볼링장과 연결되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화재 당시 이 통로는 공사 중이었고 커튼으로 가려놨는데 점원이 탈출로를 찾기 위해 이쪽으로 사람을 이끌었는데 커튼을 치우자 통로는 벽돌로 단단히 막혀 있었고 결국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질식해 죽었다.[6] 비상계단 3군데는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에 볼링장으로 연결되는 통로도 벽돌로 막혀 있을 때 유일하게 중앙 홀의 계단만이 남겨졌는데 계단이 옥상의 유원지로 통한 관계로 어린이들이 실수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셔터를 내려 뒀다.

유일하게 남은 출구라는 생각으로 셔터를 열자 셔터 밖에 가득 차 있던 연기가 한꺼번에 대량으로 유입되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비상 계단이 있긴 했으나 이쪽을 통해 살아난 사람은 단 두 사람의 여종업원 뿐이었다. 이 계단은 2~6층과는 차단되어있는 종업원 전용 직통계단인지라 실제로 1~5층까지는 연기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계단까지 가는 길이 연기로 꽉 찬 데다 무대를 장식하는 천 재질의 막에 가려져 있어서 접근이 어려웠던 것이 문제다. 첫 번째로 탈출한 여종업원은 우연히 계단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연기가 가득 차기 이전에 계단에 다다를 수 있었고 나중에 탈출한 여종업원은 화장실에서 손수건을 물에 적셔 코와 입을 막아 연기를 돌파해서 계단까지 간신히 다다른 것이다. 특히 이 종업원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이 계단을 통해 출근했기 때문에 계단 위치를 잘 알고 있어서 늦게 탈출했어도 성공했다. 실제로 이 계단을 이용하려고 했던 다른 여종업원들은 연기에 밀려 화장실로 들어가서 질식해 죽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화재 대책으로 시설로 천으로 된 구조용 미끄럼틀이 있었으나 정비불량으로 미끄럼틀을 1층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모래주머니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미끄럼틀이 1층에 닿지 못하고 공중에 휘날리는 사태가 발생해 소방대원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겨우 1층으로 끌어내리고 주변에 있던 시민들의 협력으로 설치에는 성공했으나 종업원을 비롯하여 미끄럼틀의 입구를 여는 방법을 아무도 몰랐다. 결국 괴로움을 버티지 못하고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사람도 속출했지만 뛰어내린 24명 중 22명이 골절이나 두개골 파열로 현장에서 즉사했을 정도였다. 뛰어내리지 않은 사람들은 7층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결국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피해자 중에는 연기의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변기물에 얼굴을 박고 익사한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 와중에도 탈출한 사람이 있었다. 캬바레 옆 볼링장 공사 현장에도 인부 6명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도 화재를 늦게 알아차렸다. 이 볼링장 공사 현장은 과거 극장이었던 곳을 개조하던 중이라 2개 층을 차지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인부들은 6층으로 내려와서 창문을 통해 외벽에 설치된 공사용 비계를 타고 5층까지 내려온 뒤 옆 건물 옥상으로 건너가서 탈출했다. 화재가 난 시간이 캬바레 폐점 시간과 가까웠문에 화재가 커지기 전에 애프터를 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가서 천운으로 화마를 피한 손님과 여종업원도 몇 사람 있었다.

공연을 하던 밴드는 대기실까지는 대피했지만 대기실 근처 계단이 이미 연기로 가득 차서 대기실에 갇혔는데 한 밴드원의 취미가 야구라서 야구 배트가 대기실에 있었기 때문에 배트로 창문을 깨고 모두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구조 사다리차가 올 때까지 버텼다고 한다. 실제로 오후 11시경에 사다리차를 이용한 구조가 시작되어 이 방법으로 살아난 사람도 있었지만 이 때는 화재가 난 지 30분이 지난 시점이라 유독 가스가 7층 전체를 가득 메워 이미 사망한 사람이 많았다.

센니치 백화점 빌딩은 오사카의 번화가에 위치했기 때문에 빌딩 주인은 많은 임대료를 얻어먹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를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관리주체가 복잡한 상황이었고 빌딩 자체가 1932년에 건립된 가부키극장을 개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소방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화재경보기가 설치되어 있기는 했지만 건물 전체에 경보가 울리는 게 아니라 1층 관리실에 경보가 울리면 관리실에서 관내방송으로 대피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1~6층이 건물주 회사에서 관리하고 있었고 7층이 계열자회사에서 관리를 했는데 양사간에 관리체제에 대한 협의가 제대로 안 되어서 건물주의 관리범위에 속한 1층 관리실의 관리범위는 자사가 보유한 1~6층 뿐인지라 7층에는 관리실의 방송 자체가 연결이 안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일본 드림관광은 바로 소방서에 신고하지 않고 직접 소화기를 들고 뛰어갔으나 이미 화재가 커져 버린 상황이라 소화기로는 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야 허겁지겁 신고한 지라 화재신고 접수가 늦어져서[7] 사건을 더 키운 요인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사후에 조사한 결과 원래 엘리베이터도 7층 직통인지라 화재가 발생한 2~4층과는 차단되어 있어야 정상인데 부실공사로 인해서 3층과 4층의 벽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엘리베이터 통로를 통해 급속도로 연기가 유입되고 피해가 극대화되었음이 알려졌다.

3. 사건 이후

센니치 백화점의 관리부 직원 2명과 화재 피해의 직접 원인이 된 7층 카바레의 실 소유주 회사의 대표이사와 카바레 관리인이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되었다. 관리부 직원 중 한명은 재판 중 사망해 공소기각되었고 나머지 3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검찰이 상고하여 최고 재판소까지 간 끝에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고 한다.

화재 이후 센니치 백화점 빌딩은 지진에 취약하다는 진단을 받아 철거 판정을 받았지만 세입자들이 이에 반발해 소송을 걸어 논란이 되었다. 빌딩 소유주 회사와 원고들간의 치열한 법정다툼 끝에 회사측의 과실이 최종적으로 인정되어 원고 승소했지만 법정다툼이 길어져 더 이상 건물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철거가 이루어지고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빌딩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회사가 자금난으로 인해 결국 재건을 포기하고 한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984년 다이에가 임차하여 쁘랭땅 난바라는 빌딩으로 완공했다고 한다. 다이에가 프랑스의 쁘랭땅과 제휴가 끝난 뒤에는 카테프리 난바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가 실적 부진으로 문을 닫고 2001년에 빅 카메라라는 회사에 임대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비상구 안내판의 식별이 힘들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후 비상구를 표시하는 픽토그램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4. 여담

이 건물은 상술했듯이 원래 가부키좌였다. 1932년 9월 28일에 준공된 당시 기준으로도 꽤 오래된 건물이었다. 가부키좌 시절에는 객석 수가 자그마치 3,000개에 달하는 초대형 극장으로, 1~4층이 통째로 극장이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부키가 급속도로 쇠퇴하여 객석을 모두 채우지 못할 정도가 되자 1958년 인근에 규모가 절반 수준인 신 가부키좌를 건설해 나가고 이 건물은 상업 건물로 개축하여 센니치 백화점이 되었다.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한 신 가부키좌는 가부키는 별로 상연하지 않고 다른 공연만 주구장창 상연하다가 건물이 너무 낡자 2009년에 문을 닫고 우에혼마치에 새 극장을 지어 2010년에 재개장했다. 신 가부키좌 건물은 몇 년간 남아 있다가 철거되었고 2019년에 "호텔 로얄 클래식 오사카"가 들어섰는데 하층부를 기존 극장 건축 디자인을 그대로 재현해서 외관을 꾸몄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만큼 이 사건도 여러 괴담도시전설이 횡행했는데 이 백화점 빌딩이 있던 자리는 에도 막부 시대에는 처형장으로 쓰였고 정확히 이 장소에서 화재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와 똑같은 118명이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실제로 에도 시대에 이 지역에 무덤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라고 한다. 다만 처형장이라는 소문은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화재가 일어난 빌딩 옆의 건물에서 유령을 보았다는 이야기와 근처의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 기사가 사람을 실었는데 실은 유령이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으며 쁘랭땅 남바가 개점한 후 유령들의 출몰로 장사가 안 되는 걸 막기 위해 지하에 신당을 차리고 직원들이 영업 개시 전에 신당에서 염주로 기도하고 영업을 시작하고 영업이 끝난 뒤에 신당에 경문 읊는 소리가 나오는 카세트 테이프를 틀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빅 카메라에 임대된 후 소문에 따르면 빅 카메라가 풍수지리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 건물의 에스컬레이터가 중간에 앞뒤가 바뀌도록 배치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영혼들이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비보효과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고바우 영감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에 화재 사고가 발생했던 대연각호텔자매결연하는 내용으로 풍자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2018년 5월 13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새로 각색되었다.

5. 유사 사례

6. 관련 문헌



[1] 이건 1차 화재 사건이다.[2] 백화점이라고 칭하지만 구 백화점법에서 명시하는 '백화점업을 운영하는 자' 혹은 '백화점업자'에 해당하지 않는다.[3] 사망자 명단에는 재일교포 3명도 포함되어 있다.#[4] 사고 당시 손님과 종업원을 모두 합쳐서 181명이 있었다.[5] 지금은 소방법이 개정되어서 처벌의 대상이 되지만 소방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평소에 쓰지 않는 비상구는 잠가두거나 문 앞에 짐을 쌓아두는 경우도 허다했다.[6]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벽을 부수겠다고 벽을 맨손으로 쳐대는 바람에 벽에는 수많은 빨간 손 모양의 핏자국이, 그 밑에는 손이 곤죽이 되어 버린 시체들이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한 이야기다.[7] 화재경보가 들어온 지 6분 후에야 소방서에 신고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