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08:34:22

센니치 백화점 화재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20230324_190834.jpg
화재 당시 영상

1. 개요2. 사건 경위3. 사건 이후4. 여담 5. 유사 사례6. 관련 문헌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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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千日デパート火災

1972년 5월 13일 일본 오사카에서 일어난 대형사고.

한국의 대왕코너 화재사고[1]와 유사한데 3달 간격으로 발생했으며 똑같이 대형 화재사고였다. 대형 백화점에서 빚어진 참사라는 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 빗대는 경우도 있는데 센니치 백화점은 붕괴되지 않았다.

센니치 백화점은 엄밀히 말하면 백화점을 겸하는 일반 빌딩이었다.[2] 1958년 12월 1일 일본 드림관광이라는 회사가 신가부키극장의 개관에 맞춰서 개장했다. 지상 1층부터 지상 5층까지는 백화점과 수퍼마켓, 6층에는 게임센터, 7층에는 카바레, 지하 1층에는 유령의 집을 테마로 장식한 카페 사탄 등이 있었다고 한다.

2. 사건 경위

화마는 5월 13일 오후 10시 27분경 3층 여성복 매장에서 불길이 일면서 시작되었다. 불길은 5층까지 번진 정도였지만 유독가스가 빌딩 안에 가득 찼다. 피난시설이 미비하고 종업원들의 미숙함이 겹쳐서 사망 118명, 부상 78명이라는 일본의 빌딩 화재 중 최악의 피해를 냈다.[3]
파일:20230127_005708.jpg
파일:20230127_005625.jpg
당시 7층 캬바레의 모습

피해가 커진 이유는 7층 캬바레에 토요일 저녁이라 사람들이 많았는데[4] 엘리베이터도 정전으로 움직이지 못했고 1층으로 바로 통하는 비상구가 2개에 1~6 각 층으로 통하는 비상계단, 각 층 및 옥상으로 통하는 비상계단이 있었지만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1층 직통 계단은 먹튀를 못하게 잠갔다는 얘기도 돌았지만 화재가 발생하기 전부터 잠겨 있었다.[5] 어쨌든 탈출을 위해서 비상구를 열고자 했으나 열쇠를 보관해둔 사무실에 이미 연기가 가득 차서 접근이 불가능했고 문을 잠가 두지 않은 직통계단과 1~6 각 층으로 통하는 계단은 환기구 등에서 올라온 유독가스가 가득 차서 접근이 불가능했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중 여러 사람들이 막힌 통로 한쪽 편에 몰려 있었는데 이것은 점포 옆 볼링장과 연결되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화재 당시 이 통로는 공사 중이었고 커튼으로 가려놨는데 점원이 탈출로를 찾기 위해 이쪽으로 사람을 이끌었는데 커튼을 치우자 통로는 벽돌로 단단히 막혀 있었고 결국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질식해 죽었다.[6] 비상계단 3군데는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에 볼링장으로 연결되는 통로도 벽돌로 막혀 있을 때 유일하게 중앙 홀의 계단만이 남겨졌는데 계단이 옥상의 유원지로 통한 관계로 어린이들이 실수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셔터를 내려 뒀다.

유일하게 남은 출구라는 생각으로 셔터를 열자 셔터 밖에 가득 차 있던 연기가 한꺼번에 대량으로 유입되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비상 계단이 있긴 했으나 이쪽을 통해 살아난 사람은 단 두 사람의 여종업원 뿐이었다. 이 계단은 2~6층과는 차단되어있는 종업원 전용 직통계단인지라 실제로 1~5층까지는 연기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계단까지 가는 길이 연기로 꽉 찬 데다 무대를 장식하는 천 재질의 막에 가려져 있어서 접근이 어려웠던 것이 문제다. 첫 번째로 탈출한 여종업원은 우연히 계단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연기가 가득 차기 이전에 계단에 다다를 수 있었고 나중에 탈출한 여종업원은 화장실에서 손수건을 물에 적셔 코와 입을 막아 연기를 돌파해서 계단까지 간신히 다다른 것이다. 특히 이 종업원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이 계단을 통해 출근했기 때문에 계단 위치를 잘 알고 있어서 늦게 탈출했어도 성공했다. 실제로 이 계단을 이용하려고 했던 다른 여종업원들은 연기에 밀려 화장실로 들어가서 질식해 죽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화재 대책으로 시설로 천으로 된 구조용 미끄럼틀이 있었으나 정비불량으로 미끄럼틀을 1층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모래주머니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미끄럼틀이 1층에 닿지 못하고 공중에 휘날리는 사태가 발생해 소방대원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겨우 1층으로 끌어내리고 주변에 있던 시민들의 협력으로 설치에는 성공했으나 종업원을 비롯하여 미끄럼틀의 입구를 여는 방법을 아무도 몰랐다. 결국 괴로움을 버티지 못하고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사람도 속출했지만 뛰어내린 24명 중 22명이 골절이나 두개골 파열로 현장에서 즉사했을 정도였다. 뛰어내리지 않은 사람들은 7층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결국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피해자 중에는 연기의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변기물에 얼굴을 박고 익사한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 와중에도 탈출한 사람이 있었다. 캬바레 옆 볼링장 공사 현장에도 인부 6명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도 화재를 늦게 알아차렸다. 이 볼링장 공사 현장은 과거 극장이었던 곳을 개조하던 중이라 2개 층을 차지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인부들은 6층으로 내려와서 창문을 통해 외벽에 설치된 공사용 비계를 타고 5층까지 내려온 뒤 옆 건물 옥상으로 건너가서 탈출했다. 화재가 난 시간이 캬바레 폐점 시간과 가까웠문에 화재가 커지기 전에 애프터를 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가서 천운으로 화마를 피한 손님과 여종업원도 몇 사람 있었다.

공연을 하던 밴드는 대기실까지는 대피했지만 대기실 근처 계단이 이미 연기로 가득 차서 대기실에 갇혔는데 한 밴드원의 취미가 야구라서 야구 배트가 대기실에 있었기 때문에 배트로 창문을 깨고 모두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구조 사다리차가 올 때까지 버텼다고 한다. 실제로 오후 11시경에 사다리차를 이용한 구조가 시작되어 이 방법으로 살아난 사람도 있었지만 이 때는 화재가 난 지 30분이 지난 시점이라 유독 가스가 7층 전체를 가득 메워 이미 사망한 사람이 많았다.

센니치 백화점 빌딩은 오사카의 번화가에 위치했던 만큼 빌딩 주인은 많은 임대료를 얻어먹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를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관리주체가 복잡한 상황이었고 빌딩 자체가 1932년에 건립된 가부키극장을 개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소방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화재경보기가 설치되어 있기는 했지만 건물 전체에 경보가 울리는 게 아니라 1층 관리실에 경보가 울리면 관리실에서 관내방송으로 대피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1~6층이 건물주 회사에서 관리하고 있었고 7층이 계열자회사에서 관리를 했는데 양사간에 관리체제에 대한 협의가 제대로 안 되어서 건물주의 관리범위에 속한 1층 관리실의 관리범위는 자사가 보유한 1~6층 뿐인지라 7층에는 관리실의 방송 자체가 연결이 안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일본 드림관광은 바로 소방서에 신고하지 않고 직접 소화기를 들고 뛰어갔으나 이미 화재가 커져 버린 상황이라 소화기로는 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야 허겁지겁 신고한 지라 화재신고 접수가 늦어져서[7] 사건을 더 키운 요인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사후에 조사한 결과 원래 엘리베이터도 7층 직통인지라 화재가 발생한 2~4층과는 차단되어 있어야 정상인데 부실공사로 인해서 3층과 4층의 벽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엘리베이터 통로를 통해 급속도로 연기가 유입되고 피해가 극대화되었음이 알려졌다.

3. 사건 이후

센니치 백화점의 관리부 직원 2명과 화재 피해의 직접 원인이 된 7층 카바레의 실 소유주 회사의 대표이사와 카바레 관리인이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되었다. 관리부 직원 중 한명은 재판 중 사망해 공소기각되었고 나머지 3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검찰이 상고하여 최고 재판소까지 간 끝에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고 한다.

화재 이후 센니치 백화점 빌딩은 지진에 취약하다는 진단을 받아 철거 판정을 받았지만 세입자들이 이에 반발해 소송을 걸어 논란이 되었다. 빌딩 소유주 회사와 원고들간의 치열한 법정다툼 끝에 회사측의 과실이 최종적으로 인정되어 원고 승소했지만 법정다툼이 길어져 더 이상 건물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철거가 이루어지고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빌딩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회사가 자금난으로 인해 결국 재건을 포기하고 한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984년 다이에가 임차하여 쁘랭땅 난바라는 빌딩으로 완공했다고 한다. 다이에가 프랑스의 쁘랭땅과 제휴가 끝난 뒤에는 카테프리 난바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가 실적 부진으로 문을 닫고 2001년에 빅 카메라라는 회사에 임대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비상구 안내판의 식별이 힘들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비상구를 표시하는 픽토그램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4. 여담

이 건물은 상술했듯이 원래 가부키좌였으며 1932년 9월 28일에 준공된 당시 기준으로도 꽤 오래된 건물이었다. 가부키좌 시절에는 객석 수가 자그마치 3,000개에 달하는 초대형 극장으로, 1~4층이 통째로 극장이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부키가 급속도로 쇠퇴하여 객석을 모두 채우지 못할 정도가 되자 1958년 인근에 규모가 절반 수준인 신 가부키좌를 건설해 나가고 이 건물은 상업 건물로 개축하여 센니치 백화점이 되었다.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한 신 가부키좌는 가부키는 별로 상연하지 않고 다른 공연만 주구장창 상연하다가 건물이 너무 낡자 2009년에 문을 닫고 우에혼마치에 새 극장을 지어 2010년에 재개장했다. 신 가부키좌 건물은 몇 년간 남아 있다가 철거되었고 2019년에 "호텔 로얄 클래식 오사카"가 들어섰는데 하층부를 기존 극장 건축 디자인을 그대로 재현해서 외관을 꾸몄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만큼 이 사건도 여러 괴담도시전설이 횡행했는데 이 백화점 빌딩이 있던 자리는 에도 막부 시대에는 처형장으로 쓰였고 정확히 이 장소에서 화재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와 똑같은 118명이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실제로 에도 시대에 이 지역에 무덤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라고 한다. 다만 처형장이라는 소문은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화재가 일어난 빌딩 옆의 건물에서 유령을 보았다는 이야기와 근처의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 기사가 사람을 실었는데 실은 유령이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으며 쁘랭땅 남바가 개점한 후 유령들의 출몰로 장사가 안 되는 걸 막기 위해 지하에 신당을 차리고 직원들이 영업 개시 전에 신당에서 염주로 기도하고 영업을 시작하고 영업이 끝난 뒤에 신당에 경문 읊는 소리가 나오는 카세트 테이프를 틀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빅 카메라에 임대된 후 소문에 따르면 빅 카메라가 풍수지리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 건물의 에스컬레이터가 중간에 앞뒤가 바뀌도록 배치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영혼들이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비보효과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고바우 영감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에 화재 사고가 발생했던 대연각호텔자매결연하는 내용으로 풍자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2018년 5월 13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새로 각색되었다.

5. 유사 사례

6. 관련 문헌

7. 둘러보기

역대 일본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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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colcolor=#000>사망사건명
2022년 4월 23일
26 카즈 1호 침몰 사고
2021년 12월 17일
27 2021년 오사카 빌딩 방화 사건
2020년 9월 2일
43 걸프 라이프스톡1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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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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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8일
36 교토 애니메이션 제1스튜디오 방화 사건
[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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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JR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2004년 9월 7일
22 토리 아르디안트호 좌초 사고
2001년 9월 11일
2,996 24 9.11 테러
2001년 9월 1일
44 가부키초 빌딩 화재사건

[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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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2월 10일
20 토요하마 터널 붕괴 사고
1994년 4월 26일
264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
1991년 5월 14일
42 시가라키 고원철도 열차 충돌사고
[ 198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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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23일
30 나다시 사건
1988년 3월 24일
29 27 상하이 열차 붕괴 사고(1988년)
1987년 11월 28일
159 47 남아프리카 항공 295편 추락 사고
1986년 2월 11일
24 호텔 다이토우칸 화재
1985년 8월 12일
520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1985년 5월 17일
62 미츠비시 유바리 탄광 사고
1985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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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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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34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 충돌 사고
1983년 9월 1일
269 28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2년 2월 9일
24 일본항공 350편 추락 사고
1982년 2월 8일
33 호텔 뉴재팬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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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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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1월 20일
45 카와지 프린스 호텔 화재
1980년 9월 9일
44 더비셔호 침몰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79년 11월 28일
257 24 에어 뉴질랜드 901편 추락 사고
1977년 9월 27일
34 일본항공 715편 추락사고
1975년 1월 1일
24 아오키호 버스 추락 사고
1974년 11월 9일
33 다이쥬오 요마루 침몰 사고
1974년 3월 3일
346 48 터키항공 981편 추락 사고
1973년 11월 29일
103 다이요 백화점 화재
1972년 11월 28일
61 일본항공 446편 추락 사고
1972년 11월 16일
30 호쿠리쿠 터널 화재
1972년 6월 14일
86 일본항공 471편 추락 사고
1972년 5월 13일
118 센니치 백화점 화재사건
1972년 3월 19~20일
24 후지산 대량 조난 사건
1971년 10월 25일
25 킨테츠 오사카선 열차 충돌사고
1971년 7월 30일
162 전일본공수 시즈쿠이시 공중충돌 사고
1971년 7월 3일
68 동아국내항공 63편 추락 사고
1970년 4월 8일
79 덴로쿠 가스 폭발사고
1970년 1월 24일
24 캘리포니아 호 침몰사고

[ 196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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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사망사건명
1969년 4월 15일
31 미 해군 C-121 추락 사고
1969년 2월 5일
31 반코 호텔 화재
1969년 1월 4일
31 보리바아마루 침몰 사고
1968년 11월 2일
30 이케노보만게츠죠 화재 사고
1968년 8월 18일
104 히다 강 버스 추락사고
1966년 11월 13일
50 전일본공수 533편 추락 사고
1966년 3월 11일
30 키쿠후치 호텔 화재
1966년 3월 5일
124 영국해외항공 911편 추락 사고
1966년 3월 4일
64 캐나다 퍼시픽 항공 402편 사고
1966년 2월 4일
133 전일본공수 602편 추락 사고
1965년 10월 7일
209 마리아나 해역 어선 집단 조난 사고
1965년 6월 1일
237 야마노 탄광 가스 폭발 사고
1964년 2월 27일
20 후지 항공기 추락 사고
1966년 2월 4일
133 전일본공수 60편 추락 사고
1963년 11월 9일
458 미이케 탄광 폭발사고
1963년 11월 9일
161 츠루미 사고
1963년 2월 26일
47 토키와마루 침몰 사고
1962년 11월 18일
39 제1 무나카타 호 침몰 사고
1962년 5월 3일
160 미카와시마 사고
1962년 5월 3일
28 히에이산 버스 추락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58년 8월 12일
33 시즈오카현 전일본공수 추락 사고
1958년 3월 7일
26 미 해병대 C-119C 추락 사고
1958년 1월 26일
167 난카이마루 조난 사건
1957년 4월 12일
113 제5 키타가와마루 침몰 사고
1956년 10월 15일
42 롯켄 열차 충돌 사고
1956년 1월 1일
124 야히코 신사 사건
1955년 7월 28일
36 하시호쿠 중학교 수난 사건
1955년 5월 11일
168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1955년 4월 16~17일
73 아베 광업 보타산 붕괴 사고
1955년 2월 17일
99 성모의 양로원 화재 사건
1954년 10월 8일
22 우치우마루 침몰 사고
1954년 9월 26일
1159 토야마루 침몰사고
1954년 9월 26일
35 이와나니 화재
1954년 2월 1일
35 홋카이도 미 해병대 C-46D 추락 사고
1953년 8월 15일
107 다이쇼이케 댐 붕괴 사고
1953년 6월 18일
129 타치카와 미 공군 수송기 추락 사고
1953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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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2월 4일
80 신세이마루 침몰 사고
1952년 9월 24일
31 다이고타이요마루 조난 사고
1952년 4월 9일
37 일본항공 301편 추락 사고
1951년 11월 3일
32 오즈행 버스 화재
1951년 7월 15일
28 텐류가와 버스 추락 사고
1951년 5월 19일
42 오하라 극장 화재
1951년 4월 24일
106 사쿠라기초 사고
1950년 11월 7일
34 하시가와노 버스 추락 사고
1950년 9월 26일
23 미 해병대 C-54D 추락 사고
1950년 7월 26일
25 미 공군 C-47D 추락 사고
1950년 4월 21일
35 카타가와현 미군 C-54기 추락 사고
1950년 2월 11일
22 구마모토 버스 추락 사고
[ 194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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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사망사건명
1949년 9월 22일
29 이노타니 대교 붕괴 사고
1949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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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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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28일
188 죠오마루 조난 사고
1948년 1월 5일
36 메이테츠 세토선 열차 탈선 사고
1947년 5월 29일
41 미 공군 C-54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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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건 1차 화재 사건이다.[2] 백화점이라고 칭하지만 구 백화점법에서 명시하는 '백화점업을 운영하는 자' 혹은 '백화점업자'에 해당하지 않는다.[3] 사망자 명단에는 재일교포 3명도 포함되어 있다.#[4] 사고 당시 손님과 종업원을 모두 합쳐서 181명이 있었다.[5] 지금은 소방법이 개정되어서 처벌의 대상이 되지만 소방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평소에 쓰지 않는 비상구는 잠가두거나 문 앞에 짐을 쌓아두는 경우도 허다했다.[6]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벽을 부수겠다고 벽을 맨손으로 쳐대는 바람에 벽에는 수많은 빨간 손 모양의 핏자국이, 그 밑에는 손이 곤죽이 되어 버린 시체들이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한 이야기다.[7] 화재경보가 들어온 지 6분 후에야 소방서에 신고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