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8-23 01:07:52

원도심(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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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 (인천 원도심)
東仁川 (原都心)
Dongincheon (Original Downtown)
파일:인천 원도심 (동인천).svg
<colbgcolor=#0079c1><colcolor=#ffffff> 광역자치단체 인천광역시
기초자치단체 제물포구
면적 21.8㎢
인구 99,299명[1]
인구 밀도 4,555.00명/㎢[2]

1. 개요2. 역사와 특징3. 미디어

1. 개요

인천 원도심은 인천광역시 제물포구[3]를 이르는 명칭이다.

원도심에서도 가장 중심지에 있던 전철역 동인천역에서 따와 동인천이라고도 부르며[4], 이 명칭이 대내외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인천역 부근을 하인천, 동인천역 부근을 상인천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동인천역의 과거 명칭이 상인천역이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상인천역이 동인천역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1950년대의 이야기인지라 상인천이라는 명칭은 현재 상인천초등학교, 상인천중학교, 상인천여자중학교 정도에서만 찾을 수 있다.[5]

이 지역은 구한말 인천항 개항과 경인선 철도의 개통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명실상부 인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을 정도로 상당히 잘 나갔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도심 공동화 현상을 겪고 인구의 대규모 유출과 잔존 인구의 고령화가 겹친데다 서울특별시와 다소 멀다는 게 아킬레스건이었고, 그러면서 도시는 나날이 쇠락해갔고, 현재 인천의 중심은 동부의 부평구, 계양구, 남동구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 풍경은 마치 인천 원도심과 비슷한 과정으로 도시가 형성됐던 저 멀리 부산광역시의 원도심에서도 똑같이 벌어진 바 있다.

2022년부터 유정복 인천광역시장이 추진한 인천형 행정체제 개편이 2026년 7월에 적용되기 이전, 제물포구 자치구는 내륙인 중구와 해안가인 동구가 있었다.

2. 역사와 특징

구한말 이전 조선시대까지 오늘날의 중구 원도심 일대인 제물포 지역은 그저 별 볼일 없던 서해안의 자그마한 포구에 불과하였다. 이 당시 제물포는 외부로 열리지 않은 포구였고 조수 간만의 차도 큰데다 수심까지 얕아서 작은 고깃배가 드나드는 것에 불과했다. 사실 조선 때까지만 해도 인천의 중심은 인천도호부 관아가 있던 관교동문학동 일대였다. 지도상 인천부의 영역을 보면 제물포는 서쪽 끝자락 동네였고, 관교·문학동이 중심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고 별볼일없는 포구에 불과했던 제물포가 일약 인천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 이후부터다. 조선과 일본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에 의해 부산 초량항 외에 2개 지역을 추가로 개항해야 했는데, 한성과 가까운 제물포항, 러시아와 가까운 원산항[6] 추가 개항지로 낙점됐다. 물론 이 당시에도 제물포는 수심이 너무 얕고 조수 간만의 차가 극심해서 무역항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기어코 개항을 강행했다. 1876년과 1880년 각각 개항한 부산항, 원산항에 이어 1883년 조선의 세 번째 개항 항구로 문을 연 제물포항 주변에는 일본인과 청나라인 등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형성됐고 일본 정부가 조계지 내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한 영사관을 응봉산 기슭에 설치했다.

도시 팽창의 기폭제가 된 것은 1899년 개통한 경인선 철도와 1900년대 중반 이후 가설된 경인수도였다. 경인선은 조선의 수부도시인 한성과 제물포항 입구를 직결하는 교통로의 역할을 했고 한강물을 제물포까지 끌어오는 경인수도는 제물포항 주변에 거주하던 외국인 거류민들의 식수와 생활용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했다. 항구가 외국으로 열리고 서울과 교통로와 식수 관로까지 연결되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제물포는 근대 도시로 팽창하기 시작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대개편으로 오늘날의 제물포구 일대가 인천부로 조정되고 이때부터 명실상부 인천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여담으로, 지금의 제물포구 지역은 20세기 후반 한때 북구와 남구 등 방향으로 나뉘던 시절로 치면 남구 지역을 서쪽으로 접해있었던 곳 답게, 위도상으로는 서울과 비교해도 공교롭게도 당연히 강북보다는 강남에 더 가까우며 특히나 60년대 이전에는 이 일대가 인천 전체 범위였기 때문에 서울 범위 전체를 고려했을 때 연수구를 제외한 나머지 인천 지역들이 전부 서울 이남에 못 들어가는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60년대에 강남이 서울로 편입되기 이전까지는 그냥 인천 자체가 지금의 경기 남부처럼 서울 이남 지역이였다.[7]

1932년 응봉산 기슭에 인천부청을 새로 지으면서 이 지역은 인천의 행정·정치·사회·문화·경제의 중심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특히 인천부청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면서 신포동과 인현동 일대가 인천의 경제 중심으로 번영할 수 있었다. 개항로로 일컬어지는 배다리~신포동 거리에 은행 점포가 유독 많았던 것[8] 역시 이와 연관이 있다.

이 지역은 인천의 최서단에 있으면서도 인천의 관문 역할을 했는데, 경인선의 종점인 인천역과 가장 많은 승객이 타고 내리던 동인천역은 서울과 부천에서 오는 승객으로 넘쳐났고 인천IC 인근 인천시외버스터미널[9]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또한 바닷길로는 연안부두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육지와 섬을 오갔다.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되고 직할시로 승격한 직후인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다. 인천광역시청을 비롯해 인천의 주요 행정·정치·경제·사회·문화 관련 기관이 중구에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각종 원만한 일처리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중구를 꼭 방문해야 했고, 도심의 관문이 되는 동인천역 일대는 인파 덕분에 늘 흑자였다. 그러나 1985년 남동구 구월동으로 인천시청 청사가 이전하고, 이후 주안역 일대와 부평역 일대가 인천의 새로운 부도심으로 성장하면서 이 지역의 영광은 조금씩 저물기 시작하고, 경제력도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한다.

'인천의 명동'으로 불리며 1990년대 중반까지도 어느 정도 생기가 돌았던 인천 원도심은 도심 공동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1997년 외환 위기 봉착 직후 악몽처럼 터진 1999년 가을의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가 몰락의 진정한 결정타가 되면서 이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급속도로 추락하게 된다. 1995년만 해도 17만명에 달했던 이 지역 인구는 30여년 뒤에는 10만명으로 엄청나게 쪼그라들었다. 특히 학령 인구의 지속적 감소로 인해 지역 내에 있던 학교들이 원도심을 떠나 연수구로 학교를 옮기며 자연스레 이 지역을 찾는 젊은 사람들도 줄어들게 되었고, 오히려 늙은 사람들만 들어오며 평균 연령도 나날이 높아져갔다.[10]

2010년대 후반부터 이 지역의 영광 되살리기와 평판 상승의 목적으로 '개항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의 폐건물들을 카페, 음식점, 기념품샵 등으로 재생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3. 미디어

도심의 이전으로 인해 사실상 지역 전체가 옛 모습 그대로 방치됐으나, 오히려 이 부분이 옛 동네의 모습을 그대로 품는 효과를 내면서 동인천 지역은 많은 작품들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이 지역이 주요 배경인 작품은 볼드 처리.

[1] 2026년 7월 기준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 통계[2] 2026년 7월 기준[3]중구의 내륙 지역 (중구 관할구역 중 도서 지역들인 영종도무의도를 제외한 곳), 동구 전역[4] 이 동인천이라는 명칭 때문에 외부인들은 '정작 여기는 인천 서부인데 왜 서인천이 아니고 동인천인가요?'라는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다. 상인천역이 동인천역으로 개칭되면서 그 일대도 자연히 상인천에서 동인천이 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동인천이라는 명칭은 인천부청(舊 인천광역시청, 現 인천 중구청)의 동부에 있어서 이 이름으로 칭하게 되었다. 서인천은 오히려 서구 전역만을 이르고, 중구와 동구는 따로 동인천이라고 부른다.[5] 다만 상인천 또는 동인천이라는 지명을 교명에 넣은 학교 중에서 진짜 상인천/동인천 지역에 있었던 학교는 개교 후 1971년까지 인천고등학교와 함께 중구 율목동에 있었던 상인천중학교 단 하나 뿐이다.[6] 물론 수도권과 비교했을 때나 러시아까지 비교적 가깝다는 소리이지 실제로 원산에서 러시아까지만 해도 직선거리로 최단 약 450km나 된다. 육로로는 약 550km에 육박할 정도이고...[7] 또한 원래의 서울은 위 20세기 후반 한때로 치면 인천 북구 위도에 해당하는 한강 이북 지역에 국한되었으며, 당시 강남은 시흥군, 부천군, 광주군 등 경기 남부 지역들에 속했기 때문에 인천 자체는 더더욱 위도상으로는 지금의 연수구처럼 그냥 경기 남부 지역과 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8] 20세기 대한민국 빅5 은행으로 꼽히는 조흥은행-상업은행-제일은행-한일은행-서울신탁은행 중 서울신탁은행과 한일은행을 제외하고는 개항로 위에 모두 점포가 있었다. 신탁은행과 한일은행 역시 개항로에서 멀지 않은 동인천역 인근에 점포를 뒀다. 특히 옛 상업은행 인천지점과 조흥은행 인천지점은 일제강점기부터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해왔으나 2000년대 초 나란히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9] 터미널의 위치는 남구 용현동이지만 횡단보도만 건너면 중구 신흥동이었고 터미널에서 내린 이들은 대부분 동인천 등 시가지로 향했다.[10] 원도심의 남녀 명문 고교로 이름을 높이던 제물포고등학교인일여자고등학교도 나란히 원도심을 떠나고자 계획을 세웠다가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며 원도심에 잔류했다.[11] 드라마의 작중 배경은 부산광역시였고 부산에서도 적지 않은 장면을 촬영했으나, 여러 여건상 부산 올 로케이션 촬영은 어려웠던 탓에 부산 원도심과 분위기가 가장 유사한 인천 원도심에서 많은 장면을 촬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