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12:14:49

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

파일:스페인 국장.svg 스페인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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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 ~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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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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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네덜란드 전쟁
,1672 ~ 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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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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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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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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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 ~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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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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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친차이나 원정
,1858 ~ 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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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모로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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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차 제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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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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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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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스페인 전쟁
,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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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행군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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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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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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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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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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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리비아 내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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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포르투갈 국장.svg 포르투갈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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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분쟁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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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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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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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리비아 내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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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독립 원인3. 독립 직후, 19세기 중반
3.1. 카우디요 세력과 친영파 자유주의 세력의 대립3.2. 브라질의 노예 해방과 공화정 수립3.3. 먼로 독트린
4. 19세기 후반, 미국-스페인 전쟁5. 20세기 초반,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영향력 확대
5.1. 멕시코 혁명5.2. 좌파 미술의 발전
6. 20세기 중반(1941~1979) 좌파와 우파의 충돌 본격화
6.1. 과테말라 혁명과 과테말라 내전6.2. 쿠바 혁명6.3. 칠레 혁명6.4. 니카라과 혁명6.5. 엘살바도르 내전6.6. 68혁명6.7. 해방신학의 대두
7. 20세기 말(1980~2000)
7.1. 신자유주의의 대두7.2. 마약 카르텔의 번창7.3.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7.4. 미국의 파나마 침공
8. 21세기: 블루 타이드핑크 타이드9.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한계
9.1. 식민 잔재 철폐와 토지개혁 실패9.2. 독립운동 자체에 대한 비판9.3. 우파에 대한 비판9.4. 좌파에 대한 비판9.5. 미국, 유럽 등 외국 개입에 대한 비판
10. 참고문헌11.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라틴아메리카잉카마야, 아즈텍, 기타 중남미 원주민 세력들의 멸망 이후에는 스페인, 포르투갈을 대표로 하는 유럽 해양세력의 지배를 받았고, 먼로 독트린 이후 미국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사실,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남북으로 1만 3,000km, 동서로 5,000km, 육지 면적 2,000만제곱킬로미터[1]에 달하는 거대한 지역이고 인종구성과 지형지리에서 서로 상이한 지역이므로 서로 발전 과정도 상이하여[2] 하나의 '지역사'로 묶고 일반화하여 서술하기가 힘들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라틴아메리카는 로망스어군(스페인어, 포르투갈어)을 쓰고 경제적으로 1차산업 의존이 상당하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서로 다르다.[3] 그러므로 본 문서는 이러한 한계점을 유념하고 읽어내려야 한다.[4]

2. 독립 원인

19세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차례로 독립한 원인은 4가지를 요약할 수 있다.

2.1. 태동

스페인 식민지의 인종별 계급
파일:1F348158-89B5-4630-B02B-24AB8937E576.jpg
페닌술라르
(이베리아 반도 출신 귀족)
크리오요(=크레올)
(페닌술라르의 후예)
메스티소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
물라토
(백인과 흑인의 혼혈)
인디오(=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 흑인 노예

스페인포르투갈이 라틴아메리카 땅따먹기의 승자가 되었고, 식민지는 우리 좋으라고 있는 거야 라는 마인드로 운영하였다. 스페인은 식민지 내에서 자국 본토 지주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산업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올리브포도 재배를 제한한 것을 들 수 있다. 스페인은 미사용으로 사용되는 포도주 생산을 위한 소량의 포도 재배만 허락하고 그 이외에 포도와 올리브 재배를 완전 금지했는데, 당시 안달루시아 지주들의 주 수입원 중 하나가 올리브유와 포도주였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스페인은 본토에서 라틴아메리카로 수출되는 포도주와 올리브유에 고율의 관세를 매겼다. 누에바에스파냐의 미겔 이달고 신부가 돌로레스 교구 내 농민들의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스페인에서 배워온 올리브와 포도 농사를 농민들에게 가르치자, 누에바에스파냐식민 당국은 이를 제지하였고, 여기에 분노한 이달고 신부는 1810년부로 자신을 따르는 메스티소 10만여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당시 누에바에스파냐의 상층 크리오요들은 '돌로레스의 외침'이 자신들을 타깃으로 한 것으로 생각하여 식민 당국과 협력하여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차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브라질 식민지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브라질 식민지를 운영하던 포르투갈의 경우 페닌술라르크리오요를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정책을 시행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식민지 운영 및 무역으로 얻는 수입은 왕실이 독점하는 봉건적 구조가 유지되었다. 당연히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는 주식회사 등 근대적인 방법으로 투자와 운영이 이루어지던 네덜란드나 프랑스, 영국 식민지에 비해 매우 비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18세기 브라질 금광 개발 붐이 일자 포르투갈 본토에서 엄청난 수의 인구가 인생 역전을 노리고 브라질로 이주하였는데, 이 가운데 금광으로 때부자가 되어 포르투갈 본토로 금의환향한 인원은 소수에 불과하였고 결과적으로 금광 개척에 실패해서 브라질에 잔류한 대부분은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1776년 미국의 독립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우리도 독립해야 하는 거 아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1776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과 식민지 내 예수회를 전부 추방할 것을 명령하고, 이후 즉위한 카를로스 4세는 1805년부로 식민지의 성직자들의 여러 특권을 폐지시켰다. 당시 사회 인프라가 빈약하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성직자들은 교육계와 언론에 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축소시킨 스페인 정부에 불만을 쏟아내면서 라틴아메리카 사회를 동요시켰다.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은 크리오요와 페닌술라레스, 물라토와 메스티소, 흑인과 원주민 등을 그나마 서로 싸우지 않게 조정을 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스페인에서 이들의 권위를 축소시키자 가톨릭 성직자들부터 스페인 중앙 정부에 반항하기 시작했다.

성직자들 외에 라틴아메리카 주민들에게 독립 운동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사람으로는 독일인 훔볼트를 들 수 있다. 다재다능한 과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1799년에서 1804년 사이 오늘날의 멕시코와 베네수엘라, 쿠바에 해당하는 지역을 여행했으며, 이어 여행에서 기록한 것과 수집해 갖고 돌아온 물건들을 수십 년간 공들여 연구했다. 훔볼트는 식민주의와 노예제를 공개적으로 비도덕적이라 비난하는 것은 자신을 초청해준 스페인 정부를 고려하여 삼갔지만 그렇기에 그의 냉정한 분석은 더욱 날카롭게 실상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평가받았다. 주로 프랑스어로 쓰인 훔볼트의 방대한 저작에는 에스파냐 식민지 멕시코와 쿠바에 집중된 두 개의 중대한 연구가 있는데, 이는 사회학의 초기 고전으로 꼽힌다. 멕시코에서 훔볼트는 권력과 부, 피부색 같은 복잡하고 다양한 기준에 따라 층을 이룬 사회에 대면했다. 그는 유럽에는 없는 사회 형태를 연구하면서 20세기 사회학에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는 계급과 종족 간의 관계를 처음으로 다루었다. 다른 한편으로 쿠바에서는 (상술한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흑인 노예제가 지배적인 제도였다. 이는 훔볼트 이전에는 사실상 전혀 깊이 분석되지 않았다.

식민지의 현지 유력자 크리오요들은 본국 정부에서 자기들이 식민지를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 그렇잖아도 매우 불만이었다. 이를테면 쓸데없이(?) 원주민 보호 조치 따위를 만들어 이것저것 걸리적거리게 하거나 말이다. 이미 스페인 지배 시절 번영하던 누에바에스파냐나 누에바그라나다, 페루 부왕령 같은 지역에서는 솔직히 원주민 보호 조치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스페인 식민 지배 시절 저개발 상태였던 라틴아메리카 남부 지역이었다. 리오 데 라플라타 등의 크리오요들 입장에서는 원주민들을 싹 쓸어버리고 팜파스파타고니아 지역의 꿀땅을 개발하면 부자가 될 것이 확실한데, 괜히 스페인 본토에서 옛날의 약속을 들먹이며 원주민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막으니 열통이 터지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순순히 복종할 듯한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노예 세력도 점차 일어나 크리오요의 특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투팍 아마루 반란에, 아이티 혁명 등 원주민이나 흑인 세력이 크리오요를 다 죽여 버리겠다는 식으로 쓸어 버리려 했던 것까지, 똥줄이 타는 상황이 지나갔다. 부르봉 왕가카를로스 3세 시대부터 시작된 개혁을 통해 식민지 출신 스페인인들의 세력을 확 줄여 고위공직자로 가는 길을 막기 시작하고 있었다. 페닌술라레스(이베리아 반도 출신 스페인인)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2.2.스페인 크리오요 반란

1800년 초반, 나폴레옹이 스페인에 침입하여 스페인 왕을 갈아치우자 식민지의 크리오요들은 왕이 없으면 민중이 권력을 돌려받는 것이라면서 자치회를 결성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 민중이란 크리오요 귀족집단을 일컫는 것이지 원주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원주민은 안중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걸림돌로 여겼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원주민이 유럽인도 아니다. 이 땅의 합법적인 소유자와 스페인 침략자 사이 중간 쯤에 위치한 메스티소다. 태생으로는 아메리카인이며, 법적으로는 유럽인이다. 우리는 원주민과 소유권을 놓고 다퉈야 하는 반면, 침략자에 맞서 이 땅에서 우리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갈등 상태에 놓여 있다."

여하튼 그런 흐름에 힘입어 남쪽의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산 마르틴이, 북쪽의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시몬 볼리바르가 등장한다. 산 마르틴,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같은 이들이 만든 프리메이슨 조직 '로히아 라우타로'도 무시할 수 없다.

볼리바르가 지휘한 그란 콜롬비아의 독립을 시작으로 1821년, 멕시코의 독립을 통해 크리오요들은 카리브해 지역을 제외한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페닌술라레스 세력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스페인 왕이 법으로나마 지켜주던 원주민 땅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토지에서 자유롭게 해 주겠다면서 말이다. 스페인 왕과 협약을 맺고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스페인 지배권 밖의 원주민(이를 테면 마푸체 민족)들은 토착화된 크리오요 세력의 확장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원주민의 삶은 스페인 왕이 지배하던 시대보다 더 힘들어지게 된다. 멕시코 작가 리우스(Eduardo del Rio "RIUS")는 2010년에 낸 독립도 아니고 혁명도 아냐(Ni Independencia Ni Revolucion)이란 책에서 이러한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원주민은 오늘날도 금발벽안들을 '정복자'로 보며 믿지 않는다고 한다.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라틴아메리카 백인 입장에서 본다면 '독립혁명'이지만 원주민 입장에서 본다면 백인 귀족계급 내전에 지나지 않았다. 호세 데 산 마르틴은 라틴아메리카의 영웅이며 아르헨티나 5페소 지폐의 얼굴 마담이다. 하지만 볼리비아의 아이마라 역사학자 로베르토 초케 찬키(Roberto Choque Canqui)는 'Un hacendado mas(대지주 한 놈 더)' 라 가볍게 정리했다.

라틴아메리카 반군은 스페인을 견제하려는 영국과 유럽세력 축출을 원하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싸울 수 있었다. 특히 영국 예비군(전시에는 영국군으로 복무하고, 평화시에는 연금 조금을 받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상당수가 독립군에 고용되기도 했다.

크리오요인 시몬 볼리바르는 1807년, 미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라틴아메리카 합중국[5]의 원대한 야망을 품고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의 희망은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 전체를 통일하여 미합중국과 같은 하나의 단일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어권 지역의 총 면적은 독립 당시의 미국보다 7배는 넓었다. 다른 한편으로 독립 당시 미국은 북동부 지방을 중심으로 운하와 하천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어서 교통과 통신이 용이했던 것에 비해서 라틴아메리카는 고원 지대가 많은 것은 물론 하천 지대가 열대우림으로 뒤덮인 경우가 많아 교통이 불편하였다.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는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서로 회담을 갖지만, 합중국을 주장하는 볼리바르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산 마르틴의 의견 차이로 회담은 실패한다. 콜롬비아에서 볼리바르의 암살 시도가 있었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란 콜롬비아는 현재의 라틴아메리카 지도대로 사분오열되고 만다.

3. 독립 직후, 19세기 중반

(19세기) 라틴아메리카에 유입된 유럽 자본이 실질적으로 현지의 금융시장이나 금융기관을 구축하는데 투자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현지의 금융시장과 금융기관이 형성되었다면 그곳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본들이 그들 스스로 좀 더 광범위하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경제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는 이런 금융기관들이 없었기 때문에 산업 기반의 구축이 어려웠고, 멕시코 사례가 보여주듯이 심각한 기업 집중 현상이 초래되었다. 오직 소수의 부자만이 공장을 건설할 자금을 모을 수 있었기 대문이다. (기업 집중 현상은 심지어 비교적 적은 투자자금만 필요한 경공업 분야에서도 일어났다.) 기업 집중 현상은 심지어 미국과 유럽이 이미 앞서 나가던 제2차 산업혁명에 속한 산업 분야보다 훨씬 더 적은 자금이 필요했던 면직물 공장에서조차 발견되었다.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1750~1870


다만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해외투자처를 찾던 영국 자본 상당량이 들어오긴 했다. 대부분 쪽박치거나 투자사기라서 영국에 금융공황을 일으키는 결과로 돌아오긴 했지만...

3.1. 카우디요 세력과 친영파 자유주의 세력의 대립

이후 영국빠이자 비교적 반 가톨릭 교회 성향을 나타낸 자유주의 노선[6]과 남미 군벌세력인 카우디요의 보수주의 세력은 서로 내전 상태로 치닫게 된다. 자유주의 세력이 그란 콜롬비아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면, 자유주의자들이 원주민 공동체를 해체하는 정책을 펴는 것을 혐오한 원주민 세력과, 자유주의자들이 가톨릭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여 신교를 허용하려 하는 것을 혐오한 가톨릭 교회 세력을 등에 업은 카우디요가 쿠데타를 일으켜 전소시키는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이를테면 중앙아메리카에선 프란시스코 모라산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력이 원주민의 공동체 토지를 '자유화'해서 자기들이 빼앗을 수 있게 하고 유럽 이주민을 끌어들여 나라를 '하얗게 하얗게'하려 했으나 거기 반발한 원주민들의 힘을 등에 업은 카우디요에 의해 실패했다.[7]

반면 스페인 식민지 시절 비교적 개발이 덜 되었던 남미 칠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에서는 상황이 반대로 흘러갔다. 자유주의자들이 카우디요보다 우위에 있었고, 원주민들이 쓸려나간 빈자리에 유럽계 이주민들이 들어와 백인 인구 비중이 급증하였다. 캘리포니아에 골드러시가 한창일 당시 아직은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이었고 캘리포니아는 식량이나 비료, 생필품 상당수를 어쩔 수 없이 칠레에서 수입하였다. 이후 호주에서도 골드러시가 이어지며 인구가 급증하는데 이 과정에서 수요가 늘어난 생필품들은 영국 대신 칠레에서 수입되었고, 칠레는 대호황을 맞이하였다. 영미권과 교류가 급증한 칠레에는 일찍이 친영파 자유주의자들이 자리잡았다.
스페인 식민지에서 독립한 백인들 사이에서 스페인 전통에 대한 의견은 분명하게 나뉘어졌다. 대다수 히스패닉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악폐의 근원은 스페인에 있다고 규탄했다. 즉 식민 모국인 스페인은 종교의 자유에서부터 경제적 부, 정치적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근대 유럽이 대표하는 모든 것을 식민지에서 박탈했던 것은 아닐까? ... "스페인 군대는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는 않지만, 그 군대의 전통은 여전히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라틴아메리카 사회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유산과 절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19세기 초반 프로이센 왕국(오늘날의 독일)은 인구 과밀과 퇴역 군인들의 빈곤 문제가 심각했는데,[8] 전역한 장교들 상당수가 물려받은 토지가 없으면 연금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미국이나 남미로 향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비롯한 남미 신생국가 정부들은 독일인들을 통해서 프로이센의 근대적인 교육 정책 및 사회 제도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남미 지식인들은 스페인 문화 잔재를 낙후된 것으로 간주하고 19세기 들어서 강성해진 프로이센 문화를 자국에 도입하는데 열심히였다 프로이센을 모방하여 파라과이는 근대적인 형태의 징병제를 실시하였고, 파라과이와 3국 동맹 전쟁으로 붙은 브라질과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는 유럽 프로이센 등에서 전역했던 장교들을 불러와서 자국군대를 근대화시켰다.

프랑스 문화는 바스크계 이민자들에 의해 현지식으로 재해석되고 보급되었다. 스페인의 바스크인 거주 지역은 프랑스의 바스크인 거주 지역과 이어져 있었고 남미에 있는 친지들의 초청으로 이주해온 바스크계 프랑스인들은 남미 팜파스파타고니아의 온대 기후에 맞는 포도 재배 및 와인 양조 기술을 보급하여 현지 식문화를 개량함은 물론, 동시에 오페라를 비롯한 파리의 최신 문화 트랜드를 남미 각국에 알리고 보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3.2. 브라질의 노예 해방과 공화정 수립

포르투갈이 운영하던 브라질 식민지는 원주민 인구 밀도도 적은데다가 종주국인 포르투갈이 인구가 부족하여 그 대안으로 흑인 노예를 대거 수입. 16~19세기 동안 미국으로 388,000명, 스페인어권 라틴아메리카로 250만여 명의 흑인 노예로 수입되는 동안 브라질에는 400만여 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가 수입되었다.

당시 브라질 플랜테이션의 노예 노동 환경은 무척 가혹하였는데 과로에 영양 불균형으로 브라질로 수입된 남성 노예들은 브라질에 도착한 이후 7~10년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들에게 소나 노새한테 사료를 주듯 콩밥만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포르투갈계 브라질인 농장주 상당수는 문맹이었는데, 이들은 책상에서 서류를 만지는 일은 유대인이나 하는 일이라 경멸해서, 흑인 노예 중에 글을 읽고 쓸 줄 알던 사람들에게 새로 포르투갈어를 배우게 한 후 일을 맡기는 편이었다. 이렇게 서기나 마름 일을 맡은 흑인들은 말레(Malê)라고 불렸으며 일정 수준 이상의 자유를 보장받고 가정을 이루고 재산을 모을 권리가 암묵적으로 승인되는 등 비교적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9]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이후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으며, 1822년부로 브라질 제국이 되는 전후로 노예 무역이 영국에 의해 방해를 받자, 독립국 브라질은 1824년부로 독일계 이민자,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백인 인구 중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인구가 증가한 것을 계기로 말레들이 누리는 권리가 축소되었고, 말레들이 일으킨 봉기마저 진압당하며 이들 역시 브라질 내 여타 흑인 집단과 동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10]

유럽계 이민자들이 유입된 지 약 반세기 이후 흑인 노예 플랜테이션이 발달했던 브라질 북동부 지역에 지역 약화와 가뭄이 겹쳐 1877~1878년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다. 기근으로 많은 농장들이 파산하고 노예 수십만이 명이 굶어죽거나 농장을 탈출하여 브라질 각지를 떠돌았다. 여기에 19세기 초반부터 유럽 각국이 하나둘 노예제를 폐지하기 시작했고 남북전쟁을 계기로 미국까지 노예제를 폐지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마지막까지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브라질 내에서도 점차 노예제 폐지 운동이 거세졌다. 개인적으로 선량한 성격인 황제 페드루 2세 역시 노예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황제의 딸이자 후계자인 이자베우 공주 역시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여기에 이 상황에서 영국이 브라질 측에 노예 무역을 포기하면 투자를 늘리겠다고 회유하자, 페드루 2세는 이자베우 공주의 주도 아래 1886년에는 사라이바 코테지피 법을 통해 60세 이상의 노예들을 해방하고 1888년에는 노예제를 완전 폐지하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노예 해방에 분노한 플랜테이션 노예주들이 공화정을 원하는 브라질 군부와 손을 잡고 188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폐지하고 브라질 제1공화국을 건설한다.

그러나 황제를 몰아내고 새로 공화국을 세운 농장주들은 노예제를 원복하는데 실패하였다. 애초에 맞기 싫어서 눈치보면서 일하는 노예 노동이 임금 노동자들로 운영되는 플랜테이션과는 절대 경쟁해서 이길 수 없었고, 화풀이로 황제를 내쫒는데 성공한 대농장주들도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역행할 수는 없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영국과 네덜란드가 운영하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 카리브해 식민지의 플랜테이션은 쿨리 노동력을 바탕으로 생산성이 대폭 개선되었는데, 브라질의 대농장들은 바로 이들과 경쟁해야 했다. 브라질의 농장주들도 질 수 없다며 유럽계/아시아계 임금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연유로 19세기부터 개발이 시작된 브라질 남부에는 기존의 흑인/파르도 인구 대신에 유럽계/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브라질 북부의 경우 무더운 날씨 때문에 유럽계나 아시아계 이민자들에게 돈을 주고도 일을 시키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흑인 노예 노동력을 이용한 것도 있었지만 새로 개발되는 상파울루를 비롯한 남부는 온대기후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없었다. 브라질에서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던, 흑인 인구가 밀집한 북동부 지방은 황폐하고 낙후된 변방 지대로 전락하고,[11] 대신 해안 대도시 및 새로 개척된 남부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만연한 인종차별주의 사상(흑인은 우매하고 게으르다는 인식) 때문에 브라질 남부 개발에는 흑인이 사실상 배제되었고, 브라질의 흑인 노예 해방은 결국 미완의 개혁으로 남게 되었다.

3.3. 먼로 독트린

유럽에 빈 체제하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피해를 추스리고 시민혁명 확산을 방지하느라 집안단속에 급급하여 라틴아메리카는 아웃 오브 안중일 동안 19세기 초 신생독립국에 불과했던 미국은 미리 유럽의 간섭을 배제하고 라틴아메리카를 장차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둘 사전 포석으로 먼로 독트린을 발표한다. 유라시아 대륙에 미국은 관심없다. 그러니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도 관심 꺼라.

이렇게 시작된 먼로 독트린은 21세기인 현재도 사실상 유효하다.

누에바에스파냐 시절 멕시코는 비옥한 중부 고원지대에 인구가 몰려있었고, 북부의 건조지대는 점과 선 형태의 느슨한 지배를 유지되고 있었다. 같은 시대 미국 동부의 펜실베이니아나 뉴욕, 보스턴 등의 항구로 입항한 유럽계 이민자들은 새로 개척할 농지를 찾아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하였고 텍사스에 상당한 수의 독일계와 영국계, 폴란드계 이민자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멕시코 정부는 미국을 거쳐 자국에 들어온 이들 미국계 멕시코인들에게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개신교 대신 가톨릭을 믿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텍사스의 독일계 이민자들은 자신들이 실세(19세기 초 텍사스 인구의 90%가 미국을 거쳐온 이주민들이었다.)라는 점을 파악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시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는 텍사스 이주민 세력에 무장해제 이후 텍사스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텍사스 미국인들은 이를 무시하였고, 이후 미국계 이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출동한 산타 안나가 졸전 끝에 산 하신토 전투에서 텍사스 반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자세한 전개는 미묵전쟁 참고. 멕시코 측에서는 미국이 멕시코 중부로 내려오면 아이티 혁명 이후 아이티를 재차 침공했던 프랑스군마냥 질병으로 떼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애초에 배멀미를 앓으며 섬나라에 온 아이티 침공 프랑스군과 별 저항을 받지 않고 멕시코 북부 영토를 뚫고 들어온 그것도 보급체계가 잘 갖추어진 미군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전쟁 패배로 영토의 55%를 뜯기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멕시코는 이후 다시 미국에 대항하지 못했고, 현재도 미국의 충실한 앞마당 멀티로서 기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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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먼로 독트린을 묘사한 1896년 만평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 와중에, 프랑스가 멕시코에 빌려주고 떼먹힌 돈을 돌려받기 위해 제2차 프랑스-멕시코 전쟁을 일으키고 여기에 영국, 벨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면서 멕시코 제2제국이 성립되었으나,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는 멕시코 반란군들이 멕시코 제국 정부군을 공격하고, 프랑스가 미국 눈치 때문에 철군하면서 멕시코 제2제국은 붕괴하고 이후 멕시코 합중국 정부가 들어섰다.

4. 19세기 후반,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팽창은 19세기를 마감하기 직전 본격적으로 재개된다. 상대는 그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식민지를 간당간당하게 유지하던 스페인.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쿠바에서는 1895년 반란이 일어났다. 스페인 지휘부는 반란 당시 미국이 쿠바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과, 당시 스페인이 미국과 전쟁을 해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는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본토 여론은 반란에 대하여 강경 대응을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쳤고, 이 때문에 미국 측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쿠바를 미국에 순순히 매각했다가는 내각의 총사퇴나 쿠데타 등을 피할 수 없어보였다. 스페인 수상 카노바스는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페세타까지' 다 쏟아부어서라도 쿠바를 수호할 것을 약속했다.

스페인 정부가 이미 두려워하고 예상했던 대로 쿠바를 두고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1898년 12월 파리 조약의 결과 스페인은 항복하고 미국은 쿠바푸에르토 리코를 획득한다.[13] 이걸로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짐싸들고 퇴갤했다. 20세기 팍스 아메리카나를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미국은 형식적으로 쿠바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 처럼 포장은 했으나, 유나이티드 푸르츠 컴퍼니 같은 미국의 기업들은 쿠바의 온갖 자산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 유나이티드 푸르츠 컴퍼니는 사탕수수농장 190만 에이커를 에이커(1,224평)당 단돈20센트에 사들였고, 1901년 현재 베들레헴철강(Bethlehm Steel Corporation)을 비롯한 미국 회사들은 쿠바 광물자원의 80% 이상을 소유했다. 당시 쿠바는 미국의 기업이 그 나라의 주권과 경제를 좌우하는 상황에 있었다.

5. 20세기 초반,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영향력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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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 미멕전쟁으로 멕시코를 간단히 찍어누르고 19세기 후반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카리브 해까지 안마당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미국은 중미 지역 지배력 강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아직 20세기 초반 당시는 영국 자본이 남미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등에 영향력이 강하던 시점이어서, 미국이 섣불리 남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눈치를 봐야하는 시점이었다. 물론 2차대전 이후에 미국이 영국을 대체하는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면서 이런 판도가 깨지지만 카우디요들이 영국 자본을 거부하던 중미에서는 일찍이 영국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미국 기업가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군사력이 투입됐다. 미군은 부패하고 독재적인 정권들의 버팀목이 되어 현지인들의 혁명운동을 억압했다. 국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루트는 이미 1905년에 솔직하게 썼다. "남미 사람들은 지금 우리를 증오한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멸시하고 겁박하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00~1925년 미국은 여러 차례 라틴 아메리카에 군사적 개입을 감행했다. 온두라스에 군을 투입한 것은 1903, 1907, 1911, 1912, 1919, 1924, 1925년이었다. 쿠바에는 1906, 1912, 1917년, 니카라과에는 1907, 1910, 1912년에 군을 투입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1903, 1914, 1916년, 아이티에는 1914년 군을 투입했다. 파나마에는 1908, 1912, 1918, 1921, 1925년 멕시코에는 1914년, 과테말라에는 1920년에 미군을 투입했다. 더 자주 개입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아예 현지에 주둔하면서 장기간 점령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니카라과에는 1912~1933년, 아이티는 1914~1933년, 도미니카 공화국은 1916~1924년, 쿠바는 1917~1922년, 파나마에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주둔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36~37

미국은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해 1903년 콜롬비아에서 파나마 분리를 주도했고 1914년 운하가 완공하자 이권을 모두 독점한다. 이외에도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의 군벌인 카우디요와 지속적인 로비를 펼쳐 광물의 거의 대부분을 독점했고 베네수엘라석유를 독점했으며 맘에 안 드는 정치인을 갈아 엎고 암살을 주도하는 등 사실상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의 패자로서 등장한다. 즉 미국은 1914년 파나마 운하를 완성하기 훨씬 전부터 그 일대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투자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40년 파나마의 아르눌포 아리아스 대통령이 미국에 대항하여 파나마 운하의 사용권을 다른 강대국에 넘기겠다고 강짜를 놓자, 2차 세계대전에 세계가 정신이 없는 사이 해병대를 투입해 무력 쿠데타로 파나마의 정부를 갈아 엎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어느 누구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의 영향력은 확고했다.

5.1. 멕시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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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어 장기집권한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멕시코의 현대화를 위한 여러 개혁정책을 추진하지만, 이 과정에서 멕시코 국민들의 전반적인 반발을 샀다. 기존의 멕시코 농촌은 마을 주민들이 토지를 공동소유하고 공동경작하던 방식이라 생산성이 매우 낮기는 했다. 문제는 당시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기존의 공동경작되던 토지들을 미국의 농업 회사들이나, 아니면 정부와 인맥이 닿아있던 대지주들에게 헐값으로 파는 방식으로 재편했다는 점이었다. 한 편 미국 기업들은 멕시코의 광산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멕시코인 노동자들이 미국인 근로자들에 비해 급여가 작은 것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파업을 하자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하였다.

일련의 토지 집산화 과정에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것은 스페인 지배 시절 사실상 반독립 상태에 있던 멕시코 북부 원주민들이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부는 멕시코 북부 치와와 주, 소노라 주, 시날로아 주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일부러 들볶아서 반란을 조장한 후에, 원주민들이 봉기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14] 이후 원주민들로부터 강탈한 땅을 친지들이나 미국계 부동산 회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원주민들이 쫓겨난 땅은 중국인 쿨리들을 데려와 개발하였다. 멕시코 북쪽 끝 치와와에 거주하던 야키족은 인구 3만여 명 가운데 절반이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로 강제 추방당했다.
멕시코 혁명은 사실상 두 가지 성격의 혁명이었다. 첫번째는 북부의 판초 비야와 남부의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같은 민중 게릴라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혁명으로서 그 목적은 지방자치를 기반으로 한 사회정의였다. 두번째 혁명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지식인들, 농장주, 그리고 상인들이 이끌었던 것으로 그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정부를 축으로 근대적이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멕시코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농민운동의 지휘자든 중산층의 지도자든 그들은 포르피리오 디아스라는 한 개인의 장기 집권에 의해서 자신들의 희망이 얼마나 오랫동안 좌절되었는지 절감하고 있었다. 디아스는 1877년에서 1911년까지 대통령으로서 멕시코를 통치했다. 베니토 후아레스 밑에서 프랑스의 간섭에 맞서 싸웠던 이 용감한 게릴라 전사는 라틴 아메리카의 자유라는 깃발 아래 대통령직에 올랐다. 하지만 포르피리오적 개념에서 볼 때 그가 내건 “질서와 진보”라는 구호 속에는 민주주의나 사회정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엘리트층만을 우대하고 비민주적 수단을 정당화하면서 경제를 급성장시키는 것만을 의미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30년 장기독재에 반대하던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지지자들이 민심이 극도로 흉흉했던 바로 그 치와와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이로써 멕시코 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 과정에서 첫 빠따로 희생되었던 것은 중국계 멕시코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었고, 혁명 와중에 상당수의 미국인, 영국인들이 멕시코를 탈출하였으며 미국 기업 상당수가 멕시코에서 철수하였다.
파일:attachment/에밀리아노 사파타/Example.jpg
판초 비야에밀리아노 사파타멕시코 시티 입성 후 찍은 기념사진. [15]

멕시코의 도농갈등으로 인해 혁명은 복잡다단하게 진행되었으나 결국 혁명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주축으로 한 제도혁명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5.2. 좌파 미술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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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과 잉카, 마야의 벽화 문화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 이후 기독교 교리를 원주민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줄 모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림이 효과적이었다. 라틴아메리카 각국이 독립한 이후인 20세기 초반에도 메스티소와 물라토들의 문맹률은 여전히 높았다. 1920년 멕시코 대통령에 취임한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은 국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화가들을 포섭하여 1923년부로 "멕시코 혁명을 지지하는 화가, 조각가, 판화가 동맹"을 만들었다. 과거 가톨릭 선교사들이 벽화를 통해 원주민들을 선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좌파 지식인들 역시 벽화를 통해 민중들에게 좌파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파일:orozco-mural.jpg
오로스코의 벽화 <아메리카 문명>의 일부[16]
가장 위대하고 합리적이며 가장 순수하고 강한 그림의 형태는 벽화다. 벽화는 개인 소유가 될 수 없고 소수 특권층을 위해 감추어질 수 없으므로, 가장 평등한 형태의 그림이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

대표적인 멕시코의 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는 당시 멕시코 교육부 장관에서 멕시코의 역사를 통째로 그림으로 표현할 것을 요청받게 된다. 이에 리베라는 1930~1936년 멕시코 국립궁전 2층 계단 벽에 멕시코의 역사를 주제로 여러 그림을 그렸다. 당시는 민족주의의 시대로 그의 작품들의 주제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과도한 민족주의 성향을 비판받을 수 있겠지만, 그의 벽화가 기존 문맹 메스티소들을 일군의 멕시코 국민으로 교육시키는데 효율적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한편으로는 과격한 민족주의 운동가였으나 한 편으로는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레프 트로츠키가 멕시코로 망명을 결정한 이유에는 중에는 디에고 리베라프리다 칼로 부부의 존재도 있었다. 반골 기질이 강했던 리베라는 1933년 미국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서 그에게 정치성을 배제한 그림을 그려달라 요청하자 일부러 노동운동을 소재로 한 <십자가의 남자>라는 작품을 그리면서 작품 내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레프 트로츠키를 대놓고 그려넣었다. 록펠러 센터 측은 레닌의 얼굴을 익명의 인물로 대체하라고 요구하였지만 리베라는 이를 무시하고 록펠러재단 측은 해당 벽화의 제작을 중단시켰다.

파일:록펠러 센터 벽화.jpg
  • 문제의 벽화. 리베라는 1년을 투자하여 3분의 2정도 완성된 작품을 록펠러 재단의 요청에 따라 미련없이 폐기해버린 후 멕시코시티의 국립예술원에 같은 벽화를 다시 그렸다.

록펠러 재단의 요청을 무시하고 임의로 그림을 그린 이유에 대해 리베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한테 이 작업을 맡긴 사람은 (정치성을 배제한 그림을 그려달라 요청할 때부터) 이미 내 성향을 알고 있었다. (...) 개인적인 의견으로나 역사적 사실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는 레닌이다. 나는 그 벽화에서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으며, 노동자들의 진정한 지도자인 레닌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는 없었다.

좌파 이데올로기를 교육하고 홍보하는 리베라와 오로스코의 벽화는 후술되는 쿠바 혁명 이후 체 게바라를 아이콘으로 삼아 좌파 혁명을 홍보하는 용도로 라틴아메리카 각지에서 모방되었다. 디에고 리베라의 반골 기질은 록펠러 재단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같은 사회주의 운동가 그리고 자신의 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1925년 멕시코 공산당을 탈당했다가 1954년에 복당한 바 있는 그는 소련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를 모방하기를 거부하였다.

6. 20세기 중반(1941~1979) 좌파와 우파의 충돌 본격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구리, 주석, 고무, 육류, 양모, 에네켄의 가격은 상승했고, 라틴 아메리카는 대공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다수 마야 농민들은 성당에 가 이 전쟁이 영구히 지속되기를 무릎 꿇고 기도했던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수입을 줄이고, 국내의 산업을 육성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산업기반을 구축했으며, 한편으로 교육이나 사회복지의 확충을 시도할 수 있었다. 경제성장은 신흥중산층과 투자의 증가, 그리고 도시의 확대를 가져왔다. 교육은 국민에게 경제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물질적, 정치적으로 많은 것을 약속했다.

그 결과 각종 사회적 요구들은 정치와 경제가 실제로 대응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분출되었다. 그 결과가 어떤 때에는 사회를 억압하는 독재정부로, 어떤 때는 혁명으로, 또 어떤 때에는 민주주의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반란이나 억압, 민중운동, 대중주의, 선거 또는 혁명을 통해서 1960년대 신세계의 스페인의 옛 식민지들은 몰라볼 정도로 변모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20세기 중반 이후 중남미 여러 나라들에서 친미 정권과 반미 정권, 좌파와 우파 정권들이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였다. 근본적인 원인은 2차대전으로 유럽과 일본의 기존 선진국들이 전쟁의 참사에 휘말리며 그 빈자리를 채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유럽과 일본이 전쟁의 참사에서 수복해나가자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고[17] 각국의 대다수의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오르지 않는데 있었다.

여러 독재정권은 국민들의 생활수준 개선이나 경제 발전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민주정권에서도 미국이 스스로의 경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명목으로 쿠데타를 감행했다.

6.1. 과테말라 혁명과 과테말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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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6월, 과테말라를 철권통치하던 호르헤 우비코는 6월 총파업으로 사임한다. 히지만 우비코는 엉뚱하게 군부에게 권력을 이양했고, 과테말라는 군사독재에 시달리게 되던 중, 알다나 산도발, 프란시스코 아라나, 하코보 아르벤스라는 젊은 장교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의 중심인 폰세 바이데스가 사임하는데 이를 과테말라 혁명이라고 부른다. 쿠데타 세력은 빠르게 민정에 권력을 이양해 공정한 선거로 후안 호세 아레발로가 당선되었고 아레발로는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개혁을 진행했다. 이후 프란시스코 아라나를 비롯해 다수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하코보 아르벤스가 저지했고, 하코보 아르벤스는 다음 선거에서 민간인으로써 대선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1년 3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된 아르벤스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 과테말라가 가진 모든 부를 다 합쳐도, 대부분의 평범한 국민의 생명과 자유, 품위와 건강 그리고 행복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 부를 우리는 잘 분배해야 합니다. 덜 가진 사람들은 더 혜택을 보고, 더 가진 사람들도 혜택을 누리되 덜한 정도로 하자는 것이지요.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우리 국민이 처한 가난과 열악한 건강 상태, 교육의 결핍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34~435

아래는 비자이 프라샤드의 저서 <워싱턴 불렛>에 나오는 내용이다.
1951년, 하코보 아르벤스는 민주적 사명을 띠고 가난한 과테말라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농민 계급이 토지를 소유해 스스로를 해방시키기를 바랐다. 아르벤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이후 군에 입대한 사람이었다. 군에서 장교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독재자 호르헤 우비코가 농민을 탄압하고, 그들을 과테말라 유일의 최대 지주이자 미국인이 소유한 거대 기업인 유나이티드프루트를 위해 일하게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르벤스는 공산주의 지도자인 호세 마누엘 포르투니와 여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였던 배우자 마리아 빌라노바에게 영향을 받았다. 1950년 대선에서 승리했을 때, 그는 국민을 위해 토지를 이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61명이 정원인 의회에 공산주의자는 4명에 불과했고. 아르벤스 내각에 공산주의자는 단 1명도 없었다. 현실은 이랬지만, 공산주의 세력이 개혁에 끼친 영향력은 과장되었다.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85

이처럼 아르벤스의 개혁은 온건했다. 비록 아르벤스는 아레발로의 정책을 이었지만, 토지개혁은 좀 더 급진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르벤스는 900호 법령을 발표해 272헥타르보다 큰 비경작지, 그리고 91헥타르보다 크고 272헥타르보다 작은 토지 중 비경작지가 1/3 이상인 토지를 유상으로 몰수하기로 했다. CIA의 1952년도 비망록에는 과테말라의 상황이 "사회 개혁과 민족주의적 정책을 호전적으로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에 "미국의 이해와 상반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18] 아르벤스는 대규모 토지개혁 정책을 예고하고, 그 첫 단계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 토지 947㎢(2억8,646만 평)에 대한 국유화에 착수했다. 이 회사가 소유한 전체 토지 2,226㎢는 과테말라 전체 경작지의 약 1/5이었는데 이 중 85%가 놀리는 땅이었다.

과테말라의 토지 문제는 심각했다. 아르벤스가 집권하기 1년 전인 1950년을 기준으로 보자면, 당시 과테말라의 전체 토지의 72% 이상이 약 2%의 소유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1952년 6월 토지개혁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정부는 분배 가능한 토지를 대상으로 농님들이 직접 땅을 요구할 수 있도록 지역농민위원회를 결성하도록 했다. 개혁이 실시되는 18개월 동안 1,500여개가 만들어졌으며 당시 혜택을 본 농민의 수는 약 14만 명이었다. 1950년대 초 과테말라의 전체 인구가 약 300만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토지개혁의 성과는 단기간에 이루어진 셈이고, 적잖은 농민들이 토지분배의 혜택을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을 통해 사회의 가장 최하층을 이루는 무토지 농민이나 강제노동의 주요 대상이었던 원주민들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서 등장하는 계기도 마련했다.[19]

물론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도 그러지는 않고 싶었으나 파나마병이 바나나밭을 초토화시키고 있었고, 이를 막을 능력이나 새로운 품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벤스 대통령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에 보상금으로 6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회사가 앞서 소득신고서에 기재한 토지 가격을 기초로 산정한 금액이었다. 신고 토지 가격이 탈세를 위해 엄청나게 후려친 가격임은 말할 것도 없다.[20][21]

미국 입장에서야 이것도 정말 많이 봐준것이지만 파나마병으로 인한 바나나 공급 감소로 위기를 겪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가만히 눈 뜨고 토지를 몰수당하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었고, 곧 에드워드 버네이즈를 이용해 미국 본국에 찌르고 CIA를 이용해 1954년 아르벤스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22] 사실 미국이 주도한 과테말라의 쿠데타는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개시된 셈이었다. 이에 따라 진보적인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다. 1951년 6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과테말라라는 암 덩어리" 운운하며 "아르벤스 대령이 대통령이 된 지 2달밖에 안된 시점에 이미 과테말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과 환멸"이 넘쳐나고 있다고 주장했을 정도다.[23] 1951년 과테말라시 주재 미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 워싱턴으로 보낸 서한의 내용을 보자.
과테말라 정부가 과테말라 기업에게 강경하게 나가는 것이야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미국 기업을 상대로 강경하게 나온다면 그때는 우리가 관여해야 한다.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86

미국의 정치공작은 참으로 집요했다. 유나이티드 프루트는 과테말라가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다는 기사를 활용해 의회에 로비하는 데 당시 돈으로 50만 달러를 썼고, 이를 통해 미국 의회와 여론을 자신들 편으로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에 무기 공급을 중단하자 아르벤스 정부는 동구권 국가인 체코로 부터 무기를 사들였는데, 미국은 서구 언론사에 이러한 무기 거래의 영향을 과장해서 전달했다. 제10회 미주대륙회의에 참석하고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갔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과테말라를 강조하며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추진했으며, 결과적으로 과테말라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정치공작을 했다. 심지어 NBC 방송 중계는 과테말라의 붉은 정권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 댔다. 아르벤스 정부에 대한 미국의 공작은 이러한 여론 및 정치공작에 바탕을 둔 것이다.[24] 아래는 인도 역사학자인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워싱턴 불렛>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최고의 PR 전문가인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고용해 미국 의회에 공산주의 음모론을 퍼트리도록 했다. 그는 "공산주의 선전물에서 유나이티드프루트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를 미국으로 대체해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썼다. 버네이스는 유나이티드프루트와 미국이 유의어이며, 그렇기에 유나이티드프루트를 공격하는 것은 미국을 향한 공격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았다. 버네이스는 <시카고트리뷴>, <뉴스위크>, <뉴욕타임스>, <타임> 등의 기자들에게 유나이티드푸르트의 자금을 뿌려 과테말라의 공산주의자에 대해 보도하도록 했다.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1951년 7월 14일자 무기명 보도에서, 기사 작성자는 고산지대에 있는 고대 마을에 사는, 글도 모르고 주류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진 마야인이 공산주의가 또 다른 형태의 노예제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썼다. 이 기자는 고산지대에 사는 그 누구도 직접 취재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유나이티드프루트가 준 보도자료를 갖다 썼다.
워싱턴 불렛 p.88~89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아르벤스가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었다. 아르벤스는 좌파이긴 했지만, 공산주의와는 거리를 둔 상태였다. 그가 소속되어 있었던 혁명행동당(Partido Acción Revolucionaria , PAR)과, 과테말라 혁명단((Partido de la Revolución Guatemalteca, PRG))에는 공산주의자가 빠져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아르벤스의 개혁이 공산당의 마음에 들 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아르벤스가 1953년 8월 12일 2차 토지 수용을 단행한 후, CIA 작전조정위원회(Operation Coordinationg Board)는 아르벤스를 최우선 순위로 놓고 작전을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CIA는 300만 달러를 투입해 카스티요 아르마스[25]의 용병단을 훈련시키고 전체 군 수뇌부가 아르마스를 지지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했다.[26] 더 나아가 CIA는 1953년 9월 11일, 대과테말라 하이브리드 전쟁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경제적 압박이었다. 보고서는 과테말라 정부의 경제가 압박에 취약한 점을 고려해 석유 공급, 해운업, 주요 수출입 물품 등 가능한 부문을 겨냥한 비밀 경제 전쟁 방식이 적용될 것이라고 써 있는데, 아래에 후술된 칠레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의 닉슨 정부가 아옌데 정부에게 가했던 살인적인 경제제재 계획 및 국가 뒤흔들기 방식은 과테말라에서 선행학습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6월 CIA에서 훈련받은 용병들이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소재 기지를 떠나 과테말라로 침투했고, 미국은 항공지원을 해가며 이들을 도왔으며,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고자 했다. 6월 27일 아르벤스는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퇴했다.

쿠데타로 인해 지도자 자리에서 사임한 아르벤스는 고별 라디오 연설에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미국 고위층과 결탁해 벌인 일이며, 앞으로 20년간 피로 얼룩진 파시스트 독재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파시스트라는 부분만 제외하면 아르벤스의 발언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과테말라에서의 체제 전복이 성공한 이후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미국 대중에게 연설하는 자리에서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말이 안되는 발언을 하며 쿠데타를 극찬했다.[27][28] 쿠데타 이후에는 친미정부가 개혁을 깡그리 되돌렸지만 1960년부터 쿠바와 니카라과의 지원을 받은 좌파 반군들이 속속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1996년까지 자그마치 36년간이나 내전이 지속되었다.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는데, 이 보고서에 따르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29][30] 미국의 후원으로 대통령직에 오른 아르마스 대령은 곧바로 반공법을 제정하고 '공산주의자'는 6개월까지 재판 없이 임의 구속이 가능하도록 했는데, 실제 공산당원 수가 4,000명이었던 데 반해 정부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체포한 사람은 72,000명에 달했다. 1981년 국제사면위원회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보자.
희생자들의 시체는 계곡에 쌓이거나 길가에 방치되거나 한꺼번에 매장되었다. 수천 명이 고문으로 고통당했고 사망자 대부분이 목이 졸리거나, 비닐봉지를 뒤집어 쓴 채로 질식하거나 머리에 총탄을 맞고 죽었다.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168
물론 미국 정부는 당시 과테말라의 친미적인 정권이 미국이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국가라고 믿었지만, 문제는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만 보더라도 실상은 딴판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앤서니 루이스는 칼럼에서 소위 반공이라는 명분 아래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과테말라의 경우 정부군이 헬기를 타고 농촌 마을에 들이닥쳐 벌초용 칼로 여성들을 난도질하고 오두막을 불태우고 주민들의 눈알을 뽑아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는 보도를 상세히 소개했다. 루이스는 당시 과테말라 친미 정부의 게릴라 소탕작전을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학살로 규정했다. 뻔뻔스럽게도 미국은 이후 자신들이 세운 친미 정부 하에서 자행된 학살을 돕고 방조했지만, 자신들의 관여한 행위를 부정했었다. 아래는 <워싱턴 불렛>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르벤스가 타도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당했을 때 미국은 관련 책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전율했다.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주 온두라스 미국 대사 화이팅 윌로어에게 쿠데타(실제로 덜레스는 혁명이라고 불렀다.) 전문을 보냈다. 나중에 월로어는 덜레스가 보낸 전문이 사실상 나 아니었으면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1966년 제정된 정보공개법에 따른 언론인의 정보 공개 요청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활동을 은폐해 왔다.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그 어떠한 문서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서 공개 거부는 과테말라군이 반대 세력에게 자행한 학살을 미국이 조장하고 관여하며 공모한 것과 함께 이루어졌다. 미국 국무부의 바이론 바키는 1968년 3월 내부 비망록에 CIA가 과테말라에서 용인하고 자행한 폭력이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 우리의 이미지, 우리가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의 신뢰도 측면에서 지대한 문제를 가져다주었다고 적었다.
워싱턴 불렛 p.117~118
당시 과테말라에서 아르벤스의 개혁정치를 지켜보던 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체 게바라였다. 과테말라에 있던 체게바라는 쿠데타 군대가 학살극을 벌이자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를 지켜본 체 게바라는 무장투쟁의 길로 바꾸게 된다.

이렇게 토지를 지키기 위해 기만을 일삼고 선거를 통한 정권을 탈취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이후 웃기게도 본국의 반독점법에 걸려 중남미의 철도망과 과테말라의 토지 일부를 매각해야만 했다.

6.2. 쿠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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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 정부가 4년 동안 저지른 부패는 쿠바인 다수를 부정부패와 연고주의에 진저리치는 냉소주의자로 만들었다. 바티스타는 의회와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다. 독재자는 북아메리카의 자본이 쿠바 은행의 목을 조르고, 대부분의 설탕 정제소와 담배 회사, 철도 등 공익사업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미국의 갱들은 도박과 매춘, 포르노 산업을 지배했다.
카스트로의 쿠바 p.90~91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남미 국가에 대한 선린정책을 표방한 이후 미국은 직접적인 무력 개입은 자제했지만, 카스트로 혁명 이전까지는 쿠바 내 대다수 생산시설을 소유하는 등 경제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1950년대 말 미국 기업은 쿠바 소재 광산의 90%, 공공 서비스 부문의 80%, 제당 산업의 40%, 은행 예치금의 25%를 소유했다. 쿠바 경제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빈부격차와 도농격차도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총인구 600만 명 중 50만 명이 실업 상태에 있었고, 도시의 문맹률은 11%인데 반해 농촌의 문맹률은 41.7%에 달했다. 여기에 쿠바 수출의 80%를 차지하던 설탕의 가격이 1950년대 내내 요동치면서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요인들은 자연스레 혁명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였다.

1953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소수의 무장세력은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으며, 카스트로를 포함한 지도부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바티스타 정부 하에서 풀려났고, 3년 후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상륙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쿠바 혁명을 일으켜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냈다. 사실상 라틴아메리카 사회주의 혁명의 시초가 된 사건으로, 쿠바는 이 혁명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반미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에 맞서 즉시 교육제도 개혁과 토지 재분배에 착수했으며,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를 비롯한 3개 미국 회사의 땅 약 4,050km²를 몰수했다. 다른 한편으로 안마당인 줄 알았던 쿠바에 혁명으로 친소정권이 수립된 것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후술한 것처럼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몰래 후원하는 등 대라틴아메리카 외교 정책을 보다 공격적으로 변경하였다.[31] 당시 미국의 모습에 대해 프라샤드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1959년 쿠바 혁명은 거침이 없었다. 토지개혁부터 전기 및 주택 가격 통제까지,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신생 혁명 정부가 취한 모든 조치는 합리적이며 논리적이었다. 쿠바 정부가 취한 이러한 합리적인 정책을 하나씩 실현할 때마다 지주, 쿠바의 자산 소유자, 미국의 다국적 기업은 저항했다. 민중이 사회 발전을 시도할 때 사유재산이라는 끔찍한 편견이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했던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이 바로 이러한 저항으로 증명되었다.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70
이와 더불어 미국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주도한 쿠바 혁명이 성공한 시점부터 사회주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1960년 3월 17일 아이젠하워는 CIA에 쿠바인 망명자들로 "준군사조직"을 만들어 카스트로를 타도하라고 지시했으며, 그리하여 1년 뒤인 1961년에 일어난 것이 바로 피그스만 침공이었다. 물론 이 침공은 반공성향의 쿠바 망명자 1,500명을 투입한 것이었는데, 피그만 침공 과정에서 114명이 죽고 1,189명이 체포됐다. 넷플릭스에 있는 다큐멘터리 <쿠바 리브레 스토리>에 따르면, 쿠바 측 사상자는 이 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며, 수천 명 정도 될거라 한다. 그 이후에도 미국은 CIA를 통해 피델 카스트로의 암살을 여러번 시도했었다. 미국의 침공위협에 공포를 느낀 카스트로는 소련에 미국을 겨냥한 핵미사일 배치를 요구했고, 소련이 보낸 미사일 발사대를 미국이 발견하여 세계는 3차대전 발발 직전까지 간다. 이것이 바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다.

혁명 이후 쿠바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고질병으로 언급되던 빈부격차를 완화하고 치안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무상의료와 무상주택 및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룩해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쿠바 사회주의를 버티게 만드는 근간이다.

그러나 쿠바는 미국의 바나나 공화국에서 소련의 전초기지가 된 것에 지나지 않았고, 미국은 1962년 위기로 쿠바가 언제든 제 목을 겨누는 비수가 될 수 있단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니카라과 내전에서 쿠바의 지원을 받은 좌익 민족주의 세력 FSLN이 승리하고 엘살바도르도 내전에 휩싸이자 이런 시각은 더욱 강화되었다. 결국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쿠바 역시 필연적으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자기 안마당 앞에 위치한 반미국가가 가만히 발전하게 놔둘 이유가 없었고, 이런저런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쿠바의 산업 발전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이런 살인적인 경제제재는 2022년인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90년대 이후 쿠바의 커피 산업 완전 몰락을 예로 들 수 있는데[32] 소련 해체바르샤바 조약기구 해체를 전후하여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던 헝가리, 몰도바, 조지아의 와인 양조 산업이 부흥했던 것과는 별개로 쿠바의 커피 산업은 계속된 제재로 인해 원두 가공 기계를 개선하지 못하면서 급속히 도태되고, 같은 제2세계 국가였던 베트남에게 완전히 추월당했다. 1차산업 생산품인 커피 원두가 이럴진데[33]2차산업을 경쟁력을 키우기는 더 어려웠을 수 밖에 없다.

냉전시기 쿠바는 소련과의 관계에 많이 의존했지만, 소련과의 경제관계는 제법 양심적이었다. 1960년 2월 5일 소련의 지도자이자 옛 볼셰비키인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아바나에 와서 소비에트 과학, 문화, 기술 전시회 개막식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만났는데, 일주일 뒤 미코얀과 카스트로는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시장 가격으로 쿠바 설탕을 구매하고 자국 제품을 구매하도록 쿠바에게 신용을 제공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소련은 이후에 비록 소비시장에서 자국 내에서 사탕무 설탕의 공급으로 설탕이 충분했음에도 쿠바 설탕의 거의 모든 수확량을 구매했으며, 가격 변동이 있었지만, 대체로 쿠바는 미국 구매자를 대신할 경기적 구매자를 찾을 수 있었다. 소련은 또 쿠바 화학 산업 건설을 위해 1억 달러 이상의 신용을 제공했고, 소련에서 과학자와 기술자를 교육시켰다.[34]

이후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북한과는 다르게 이런저런 노력이 결실을 거두며[35] 석유 부국이 된 베네수엘라와의 공조로 부활하는가 싶더니… 2014년 후반 사우디와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유가치킨게임(국제유가폭락) 이후 우방국 베네수엘라가 파탄나고, 브라질의 극우 정치인 보우소나루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 인한 외교 정책 변경으로 다시 소련 해체 직후 수준의 데미지를 입은 상황이다. 2019년부로 휘발유 공급이 제한되고 20~21년에는 쿠바 국민들이 동요하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6.3. 칠레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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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구리 광산.
칠레혁명의 과정에서 보여준 이른바 칠레의 길은 총이 아닌 투표에 의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실현한, 그러나 곧 투표 아닌 총에 의해 그것이 좌절된 아주 희귀한 선례였다. 그러나 선거를 통하여 또 의회제도를 통하여 시도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이행의 실험이 성립된 지 3년만에 미국을 등에 업은 군부의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1973년 9월 11일 칠레 산티아고의 모네타궁이 군사쿠데타에 의해 공습을 받음으로써 칠레 3년간의 실험은 막을 내렸다. 칠레의 실험이 좌절된 후에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사회주의 이행을 둘러싼 많은 논쟁들이 제기되었다.
명불상 지음, 박현채·김홍명 엮음옮김, 『통일전선과 민주혁명 2 』, 사계절, 1988, p.329

1970년, 칠레는 격변했다. 민중연합이란 선거 연합의 후보인 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턱걸이로 당선되어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아옌데의 득표율은 옛날보다 더 떨어진 상태였다. 중도파와 우파가 지난 대선처럼 힘을 합치지 않아 표가 갈려 얻은 승리란 게 더 정확하다.[36] 취약점은 금세 노출됐다. 민중연합이란 선거연합은 대통령을 배출해 냈지만 의회에선 다수세력이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상당 부분 운이 좋아 집권한 아옌데 정권의 정책은 자신을 지지해준 여러 세력들(노동자/중간계급/자본가 일부)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합법적인 방법으로만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옌데가 집권할 당시 칠레는 좌익과 우익 양극의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대통령 집권기인 1968년, 칠레 노동조합연맹은 프레이의 파업금지령에 맞서 전국적인 파업을 단행하는 등 직접행동에 나섰다.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투쟁을 더욱 확산시켰다. 1969년에는 파업 1,939건에 참가자 23만 725명, 1970년에는 파업 5,295건에 참가자 31만 6,280명으로 늘어났다.

아옌데는 1971년부터 급진적인 개혁에 나섰다. 1971년 초 블루칼라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실질 최저임금을 각각 37~41%, 8~10% 인상하면서도 상품 가격은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다. 1972년에도 블루칼라 노동자의 실질 최저임금을 27% 더 인상했고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임금을 인플레이션에 연동했다. 이때 경제성장을 통해 임금이 올라가는게 아니라 칠레의 통화인 에스쿠도를 마구 찍어내서 노동자의 실질 최저임금을 인상했다. 그리고 7월 국유화조치를 통해 구리, , 질산염, 섬유산업 및 은행 등을 국유화했으며,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66% 인상, 400만 어린이에 대한 우유 무료급식, 실업자 구제, 토지개혁(3,300건의 대규모 토지몰수) 등 대대적인 사회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급진적인 사회주의 경제개혁은 이미 도시화율이 75%를 찍고 농업과 구리 광업, 외국의 투자에 의존하던 칠레의 연약한 경제구조를 도외시한 채로 진행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이는 피노체트를 위시한 군부의 쿠데타를 촉발하게 된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의 무력 쿠데타로 아옌데는 자살했고, 미국은 곧바로 피노체트 정권을 지지했다. 오늘날 이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여러가지 증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옌데의 사회주의적인 노선에 미국이 제재를 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리 국유화는 무효화되지 않았으나[37] 토지개혁은 거의 다 무효로 돌아갔다.

피노체트는 칠레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박멸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교육계에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줄줄히 축출됐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군부가 파견한 장교가 메웠다. 반군부 진영을 단합시킬 만한 인물, 예를 들어 빅토르 하라와 같은 인물들도 죄다 암살당했다. 노동조합 활동이 극도로 위축됐다. 또한 광업 부문을 외국계 업체에 개방했으며, 칠레의 여러 지하자원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수입 관세는 낮아졌다. 이때 진행된 경제개혁은 비록 등락이 상당히 심하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칠레가 라틴아메리카 주요국 중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함에 따라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38]

피노체트는 반대파 3,200여명을 처형했고, 수만 명을 구금하고 고문했다. 피노체트 정권의 공포정치는 죽음의 카라반(Caravan of Death)으로 알려진 칠레군 살인부대의 작전으로 시작됐으며, 닉슨 정부 당시 국무장관이던 헨리 키신저는 미국이 피노체트 정권을 신속히 인정하고 원조를 제공하도록 조치했다. 당시 키신저가 피노체트 앞에서 한 말은 "우리는 각하가 여기서 하시려는 일에 공감합니다"였다.[39] 피노체트 정부의 살인행위는 칠레 외부에서도 일어났다. 키신저의 칠레 방문 3개월 후 피노체트가 보낸 암살자들이 워싱턴에서 아옌데 정부 때 미국 주재 칠레 대사를 지낸 오를란도 레텔리에르 정책연구소 연구원과 레텔리에르를 돕고 있던 미국인 로니 모피트를 살해했다. 이들이 탄 자동차는 백악관에서 14 블록 떨어진 지점에서 폭발했다. 뿐만 아니라 칠레의 피노체트 정부는 미국 CIA가 벌이는 암살작전인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를 통해 반대파 암살작전을 폈다.[40] 결국 피노체트 정부는 이러한 폭압통치를 이어갔으며, 1990년 민주화로 물러날 때까지 17년간 칠레에서 군부독재를 했다.

6.4. 니카라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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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니카라과대서양태평양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니카라과의 주요 강들은 중부 산악지대에서 시작되는데 서쪽으로는 태평양이나 마나과호, 니카라과호로 흘러들며 동부의 강들은 카리브해로 연결된다. 즉 니카라과는 마나과호와 니카라과호를 통해 카리브해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자연히 니카라과는 영국과 미국의 관심과 개입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서부의 자유주의 정부와 동부의 보수주의 세력으로 나누어 내전을 치루던 니카라과는 1912년 아돌포 디아스(Adolfo Díaz) 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미국의 개입으로 내전이 종식되었다. 미국은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켰다. 니카라과가 안정화된 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미국이 니카라과의 내정에 깊숙히 개입하는 과정에서 니카라과인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미군의 개입과 소모사 정권에 맞서 투쟁한 산디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본래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온두라스와 과테말라에 있는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에서 일했었다.
1925년 무렵 나는 니카라과의 모든 것이 불모화되고 조국의 명예는 사라져버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매일 우리 동지들은 무력으로 니카라과를 점령한 미제국주의자의 침탈에 짓밟힌 우리의 민중에 대해서 토론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친구들에게 만일 나와 함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동지가 100명만 있다면 우리나라의 주권은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리우스 지음, 편집부 옮김, 만화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 오월, 1988, p.49
1926년 5월 16일 산디노는 직장을 그만구도 저축해놓은 돈 3,000불을 지니고, 동지 100명을 찾아 니카라과로 갔다. 그렇게 해서 그가 처음 모은 동지는 29명의 광부였고, 여기서 미국에 맞선 무장투쟁을 진행했다. 산디노는 1927년부터 게릴라들을 지휘하며 미 해병대에 맞서 싸웠다. 29명으로 시작한 산디노의 부대는 이후 30정의 총과 6,000개의 탄약통을 회수했고, 미국에게 협력한 니카라과 군참모장 몬카다에게 회의를 느낀 그의 휘하 군인 200명이 산디노 부대에 합류했다. 그렇게 해서 산디노의 부대는 수백 명으로 수가 증가했다. 산디노의 부대가 게릴라들을 모아 저항하자, 미군은 전투기 편대를 보내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다. 리우스의 <만화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에 따르면,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폭격으로 부녀자들과 어린이를 포함하여 폭격 당한 마을에서 최소 3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서 산디노 부대는 퇴각했고, 이 폭격 임무에 참여한 미군 병사들은 당시 미국의 쿨리지 대통령에 의해 백악관에서 훈장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장교로 참전했던 브라이언 윌슨(S Brian Wilson)[41]에 따르면, 1927년 11월 27일 미 해병대가 동원한 전투기 폭격으로 한 마을에서 32명의 여성과 11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도합 43명이 죽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참고자료[42]

미군의 개입하자 최소 800명 이상이 넘었던 산디노의 부대는 후퇴를 거듭했다. 1927년 엘오코탈에서 패배한 산디노의 부대는 산페르난도에서의 전투에서도 연이어 패주했으며, 1927년 6월 27일, 라스플로레스 전투에서 또 다시 참담한 패배를 맞보았다. 라스플로레스 전투에서만 최소 70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산디노는 엘치포테로 퇴각하고, 그곳에서 전열을 재정비하여 니카라과의 지형지세와 농민군에게 알맞는 새로운 전투방식을 도입했다. 바로 게릴라전이다. 북부 니카라과의 세고비아 지방에서는 친미정부의 억압에 반대하여 마을 주민들이 산디노의 부대를 지켜주었으며, 그 지역 농민들 또한 산디노의 게릴라 부대에 들어가 싸우기도 했다. 전쟁 초기 산디노의 부대가 미군과 친미정부군에게 밀렸던 것은 항공폭격을 동원한 막강한 화력과 군사력 때문이었다.

미국은 다시 해병대를 파병하여 1933년까지 주둔하면서 실질적으로 점령과 통치를 계속하였다. 친미 정권인 아돌포 디아스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으나, 아돌포 디아스 정권은 그리 뛰어난 정치력을 가진 정권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1936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소모사가 쿠데타로 대통령직을 차지하게 되며, 철권 통치를 이어나갔다.

1970년대 당시 소모사 일가의 재산은 대략 5~10억 달러였다. 니카라과의 경제 자체는 소모사 정권의 독재로 인한 정치안정과 미국 기업들의 니카라과 투자로 지속적으로 성장했지만[43] 동시에 소모사 정권은 족벌정치와 부정부패, 극심한 양극화로 인해 비판받았다. 급성장하는 경제에도 불구하고 니카라과의 인구성장률이 매우 높았으므로 노동시장이 공급되는 노동인력을 다 흡수하지 못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니카라과의 실업률은 점진적으로 상승하여 1977년 13%에 달했다.[44] 실업률 증가는 당시 노동자가 부양해야 했던 가족 수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 절실한 문제로 다가왔다. 수도 마나과 근교에는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이주민들이 사는 거대한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1977년 문맹률은 42%, 기대수명은 56세(세계은행 추산), 유아사망률은 1000명당 130.22명(UN IGME 추산)에 달했다.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런 지표들이 비참한 수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꾸준히 개선은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장 유아사망률도 1955년 207.99명에서 낮아진 것이다.

1959년에 성공한 쿠바 혁명에 영향을 받아 니카라과의 각계각층의 민중들은 1958년에서 1960년 사이에 최소 60회 이상의 무장봉기를 감행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봉기는 소모사 정부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됐다. 반소모사 투쟁을 주도한 것은 반독재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학생운동이었는데, 이들은 현실적으로 소모사 체제의 대체세력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으며, 니카라과 보수주의 세력과의 타협으로 인한 소모사 체제의 상대적 안정과 소모사 정권의 탄압 등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5] 대표적으로 1967년 1월 22일에는 마나과 중심가에서 소모사 세습 정권의 선거결과 조작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방위군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해 200여 명의 시위대가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 학살을 1월 22일 학살(Masacre del 22 de enero)이라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파업과 더불어 1950년대 후반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은 니카라과의 사회주의자들에 영향을 줬다. 민중들의 무장봉기 조직들은 초기엔 조직이 허술하고 무기가 취약하여 헌병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1961년 산발적인 소규모 무장봉기 조직들의 취약성을 깨달은 카를로스 폰세카(Fonseca)와 토마스 보르헤(Borge)가 주축이 되어 대대적인 게릴라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라는 혁명 조직이었다. 1970년대 들어서 교회, 군부, 지주 등 체제 내의 분열과 마나과 지진으로 인한 산업시설의 파괴, 인명 손실 등으로 인하여 3대에 걸친 소모사 족벌 체제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혁명적 무장투쟁을 해오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978년부터 대중봉기 노선을 채택하고 군사력을 급격히 확장하여 1979년 소모사 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43년간 3대 세습을 거쳐 해오던 소모사 철권통치는 막을 내렸다. 좌익 혁명 세력인 산디니스타를 비롯해 자유주의 우파까지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봉기하였으며, 쿠바 혁명과 함께 성공한 유이한 무장혁명이다.

내전 기간의 희생은 극심했다. 유엔의 보고서에 의하면, 내전을 통틀어 최소 4만 명 이상 사망하고, 가옥 20만 채가 파괴되었다. 고아는 4만 명이 넘었고, 75만 명이 기아상태였으며, 10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외채는 16억 달러에 달했고 국내 산업의 1/3이 파괴되었다. 사망자의 경우 4만에서 5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하며, 국경을 넘어 피난한 난민은 15만 명, 노숙자는 60만 명에 달했다. 1979년 니카라과 인구가 246만 2,000명 정도로 추산되니 니카라과 전체 인구의 2%가 죽고 1/3이 도피 상태에 빠졌던 셈이다. 거기다 1970년대 수도 마나과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각종 인프라들은 내전으로 남은 것들마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재산 피해는 무려 15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니카라과 내전과 콘트라 전쟁(War of Contras, 1979~1990)

따라서 이러한 니카라과의 열악한 현실은 산디니스타가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게 됐다. 초기 산디니스타 정권은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단행된 토지개혁을 통해 대략 7만 명의 농부들과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산디니스다 정권은 소모사 시절 부족하고 불평등 했던 의료복지를 늘리고자 의료시설을 설립했고, 무상의료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소모사 독재 정권 하에서 자행된 고문과 학살을 확인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1979년 7월 20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혁명 평의회는 포고 3호를 발하여 소모사 가족, 국가방위군의 고위 지휘관 및 정부 고위 관료들의 소유 재산을 몰수하였고, 동년 8월 8일에 개정 보완되어 공포된 포고 제38호에 의하여 소모사 독재정권에 협력한 자의 기업이나 사유재산의 소유권 이전 또는 점유 등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1979년 11월 23일에는 1,500개의 플랜테이션 약 80만 헥타르의 농경지를 무상몰수 했다.[46] 하지만 산디니스타 정권은 동해안에 거주하던 원주민의 인권을 무시하는 정책을 펴서 이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카터의 뒤를 이어 집권한 레이건 행정부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는데, 이 과정에서 불법적인 무기 대금을 지원함으로써, 이란-콘트라 스캔들을 터뜨리기도 했다. 사실 레이건이 이러한 전복 및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은 당시 그가 추진하던 반공주의적 정책에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은 콘트라 반군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 비유할 정도로 콘트라를 옹호했다. 콘트라 반군은 1980년대 내내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테러와 사보타주를 자행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물자보급과 훈련에 용이한 온두라스에 근거지를 두며 활동했다. 이들은 국경을 넘나들면서 농장과 마을을 습격하고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을 살해하는 등 잔학행위를 벌였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콘트라 반군의 난동과 소련의 지원 축소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고, 결국 1990년 선거에서 반FSLN 하나로 뭉친 빅텐트 선거연합 UNO에게 총선과 대선에서 패배하였다. 산디니스타는 2007년 선거로 재집권했다.

아무튼 현재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쪽 정치인인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에 취임했다.[47]

6.5. 엘살바도르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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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에서는 미국 정부가 앉히고 지원하는 독재자들이 국민을 억압·고문·살인하는 상황이 수년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지만, 여기 미국에서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 사실은 미국에서 한 번도 보도된 적이 없었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p.62
20세기 엘살바도르는 보수적 독재 정권과 반독재운동 그리고 쿠데타가 일어났었다. 1970년대 들어 엘살바도르에는 '민중조직'이라는 이름의 농민단체, 조합, 노조, 뒤에서 자립 단체로 발전하게 되는 교회 소속의 성경연구 모임 등이 성장했다.[48]

엘살바도르의 빈부격차의 실태를 보면, 과두집단의 계속된 토지집적으로 토지로부터 축출당한 농민들은 무토지 농민이 되어 농업노동자로 전락하였다. 공업부문도 농업과 마찬가지로 민중 역시 착취당했다. 1940년대 말 오소리오 정권은 마르티네스 정권 시기 채택된 반공업 법률들을 폐지하고 조세감면의 형태를 띤 강력한 투자유인을 중심으로 공업화정책을 추진했고, 1960년대 리베라 정권은 미국의 '진보를 위한 동맹'과 '중미공동시장' 정책을 통해 공업화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공업화정책으로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공업 비중이 1962년의 16.3%에서 75년에는 26%로 증가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중소기업에서 종사하는 노동자의 약 60%가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살았다. 엘살바도르 좌익의 봉기가 발발한 배경에는 군부 및 우익세력이 자행한 인권탄압이 있다. 엘살바도르의 우익 테러단체 중 대표적인 것은 1962년 엘살바도르 국가안보국(ANSESAL)을 설립한 출신 호세 알베르토 메드라노에 의해 창설된 민족민주조직(ORDEN), 백색전사연합(Unión Guerrera Blanca), 민족주의공화동맹의 창설자인 네오파시스트 로베르토 도뷔송 아리에타(Roberto D’Aubuisson Arrieta)가 80년에 결성한 죽음의 부대(Death Squad) 등이 있다. 이들의 이러한 테러 뒤에는 헌병군, 국립경찰, 재무경찰 등이 있었고, 이들 또한 테러를 조장 및 묵인했다.

1980년 2월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대주교는 미국의 카터 대통령에게 자국을 통치하고 있는 군사혁명위원회에 군사 원조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몇 주 뒤 그 대주교는 대중 앞에서 설교 중 암살당했다.[49] 암살 사건 전에 엘살바도르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자국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을 게시했다. 최초의 공격은 숨풀 강(Rio Sumpul)의 대규모 학살 사건이었는데,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군대가 벌인 이 학살로 최소 600명이 죽었다. 갓난아기들은 마체테에 토막이 났고, 여자들은 성폭행을 당한 뒤 강물에 던져졌으며, 그 사건 이후 며칠 동안이나 강물 위에는 동강난 신체의 일부들이 떠다녔을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이 전쟁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이들은 농민들이었다.[50]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비자이 프라샤드에 따르면, 신부와 수녀들이 빈민가에 자리 잡았던 엘살바도르에서는 종교적인 파시스트 준 군사 조직이 간경한 구호, 신부를 죽이고 애국자가 되자는 구호를 퍼뜨렸는데, 예수회 신부 루틸리오 그란데의 경우 수많은 살인이 자행되던 가운데 1977년 엘살바도르 보안군 손에 살해됐다. 이 같은 살육은 극우 암살단이 1980년 3월 오스카 로메로 산살바도르 대주교를 살해하면서 극에 달했으며, 1980년 12월 미국에서 온 수녀 4명이 엘살바도르 방위군에게 납치되어 성폭행 당하고 살해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부 측의 만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89년 미국으로부터 훈련받은 엘살바도르 육군 대대가 예수회 신부 6명과 가사도우미, 그리고 가사도우미 딸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51] 1993년 엘살바도르 진실위원회의 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 한 해 동안만 하더라도 국가폭력 및 암살 등에 의해 모두 2,579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52]

무튼 엘살바도르는 1970년대 들어 대중의 저항이 거세지면서부터 살인부대를 동원한 불법 살인과 학살이 급증했다. 1980년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암살당한 이후 다양한 좌파 게릴라 조직들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됐다. 1980년 말 FMLN이 공세를 벌이자 카터는 엘살바도르 독재정권에 대한 군사원조를 시작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1980년 3월 7일 발효된 계엄령으로 인해 자유롭게 연설을 하고 집회를 열 권리가 법적으로 중단되었다. 게다가 1980년 12월 3일 공포된 법령 507호는 증거나 혐의가 없어도 180일 동안 시민을 감금할 수 있는 권한을 군에 부여함으로써 사법체계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1982년 3월에 선거가 시행되기 이전의 30개월 동안, 그리고 1984년에 선거가 시행되기 직전에 수천 명의 시민이 붙잡혀 감금, 고문, 강간, 살해당했다. 모든 행위는 ‘반란’ 활동과 사상에 적용되는 법적 절차의 범위 밖에서 이루어졌다. 1982년 초에 접어들면서 계엄령은 경합을 벌이던 6개의 당을 대상으로, 선거를 앞둔 열흘 동안에는 엘살바도르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완전히 해제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민들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선거가 끝나면서 계엄령은 다시 발효됐다.[53]

1981년 레이건 행정부로 넘어오면서 엘살바도르 정부에 의한 인명 피해는 13,000명을 초과했을 정도였다. 사실 미국 지도부는 베트남 전쟁 이후 엘살바도르를 반정부 게릴라를 소탕하는 새로운 전술의 시험 무대로 삼아 미군의 개입을 최대한 줄이면서 민중봉기를 진압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엘살바도르 친미 정부의 군대의 규모를 키우고 장비를 현대화했으며, 1983년에 이르러 병력의 정부군 병력의 규모가 5만 3,000명으로 증강됐다.[54] 이들 중 다수는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 기지나 미군이 운영하는 파나마의 아메리카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아래는 카터 행정부와 레이건 행정부에서 파라과이 대사와 엘살바도르 대사를 지낸 로버트 화이트가 의회에 출석해 발언한 증언이다.
50년 동안 엘살바도르를 통치한 것은 부자와 군부 연합체였습니다. 이들은 부패했고, 잔인했습니다. 1979년 젊은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 연합체를 깨려고 했지요.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극우 세력을 다시 지원했습니다. 이들이 뭉쳐서 국민공화연맹(National Republican Alliance/ARENA)을 결성한 것입니다. 그 지도자로 소령 출신의 로베르토 도비손이 부상했습니다. ARENA(아레나)는 폭력을 일삼는 파시즘 정당으로 나치와 일부 혁명 공산조직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아레나를 결성하고 지원하는 핵심 세력은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거점으로 삼고 있는 부유한 엘살바도르 망명자들과 엘살바도르에서 활동하는 민간인 활동가들입니다. 아레나의 군사조직에는 엘살바도르 정부군 및 보안군 장교, 사병들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 대사관에서는 상당한 자원을 투입해 우익 폭력행위의 진원지와 마이애미 소재 접선자들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마이애미 6인으로 일컬어지는 인사들은 국가 재권을 위해서는 먼저 국가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경제가 결딴이 나고 실업률이 극대화되고 군사평의회도 축출해서 좋은 장교들이 권력을 잡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교들은 싹쓸이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30만이 죽어나갈지 40만이 죽어나갈지 50만이 죽어나갈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미치광이들은 과연 누구이며 어떤 식으로 움직일까요? 핵심 인물은 지주 출신 갑부 6명입니다. 이들은 음모를 꾸미고 지속적으로 회합하면서 도비손에게 지침을 내리고 있습니다.
엘살바도르에서 일하던 카톨릭 신부 다니엘 산티아고(Daniel Santiago)는 예수회 잡지 <아메리카>에 엘살바도르 군사 훈련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살인 특공대가 사람을 그저 죽여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내어 창에 꽂아 놓고 토지의 경계 표시로 사용하였다. 엘살바도르 재무 경찰도 남자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생식기를 잘라내어 시체들의 입에 물려 놓기까지 했다. 방위군들은 여자들을 강간하고 난 다음 자궁을 베어내어 그것으로 그녀들의 얼굴에 덮어 놓았다. 그들은 어린이들까지도 단순히 죽이는 데 만족치 않고, 시체의 살이 뼈에서 다 떨어져 나갈 때까지 철조망 위로 질질 끌고 다니면서 부모들에게 그 광경을 지켜보도록 강요했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p.70
1981년 12월 또 다른 잔혹한 학살행위가 자행됐다. 미군에게 훈련받고 미군 장비로 무장한 엘살바도르 정부군 아틀라카틀(Atlacatl) 대대가 엘 모소테 마을 주민 767명 전원을 학살한 것이다. 학살당한 희생자 중 358명은 13세 미만의 어린이었다. 희생자들은 칼로 찌르고 목을 자르고 기관총에 난사당해 죽었으며, 소녀와 성인 여성들은 강간당했다. <뉴욕 타임스> 특파원인 레이먼드 보너는 실상을 폭로하려고 애썼지만 <월 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한 친 레이건 성향의 신문들은 보너 기사의 신빙성을 맹렬히 물고 늘어졌으며, 미 행정부 관리들은 학살극을 은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55] 이 아틀라카틀이라는 조직은 1981년 3월에 미 육군 특수부대 학교가 반게릴라전 전문가 15명을 엘살바도르에 파견함으로써 창설되었는데, 창설된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심지어 미국 교관들조차 이 군인들이 "유별나게 잔인하며 우리 교관들은 포로들의 귀만 잘라오지 말고 산 채로 잡아오라고 설득하는 데 항상 애를 먹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아틀라카틀은 엘 모소테뿐만 아니라 1980년대 내내 수많은 마을들을 폭격하고, 민간인에게 총을 쏘거나 물 속에 빠뜨리는 등의 방법으로 또 다른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이었다.[56][57]

엘살바도르에서 1982년 3월에 선거가 시행되기 전의 2년 동안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는다면 군대와 독재정치에 어떤 식으로든 도전할 대중과 시민단체가 격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1979년 후반 이후 군정이 추진한 주요 정책의 하나였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수천 명이 살해되었고 수많은 단체가 붕괴되거나 지하로 쫓겨났다. 교원노조는 수백 명의 회원이 살해되면서 그 수가 크게 감소했고, 군대의 점령으로 짓밟힌 대학은 문을 닫았으며, 학생과 전문직 단체는 체포와 살해로 붕괴되었다. 심지어는 AFLCIO(미국노동조합총연맹-산업별회의)의 지원을 받는 농민조합마저 주동자 100명 정도가 1979년과 1982년 3월 사이에 살해되었다.[58]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엘살바도르의 암살단은 군대와 비밀경찰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활동했다. 1982년 선거가 시작되기 이전의 30개월 동안 살해된 민간인은 매달 평균 700명 정도였다. 이 희생자들 중 다수가 강간,고문 신체 절단을 당했다. 더욱이 법의 심판을 받은 사건은 단 한 건도 없었고, 유일하게 4명의 미국인 여성을 죽인 사건만 미 의회의 압력에 못 이겨 모종의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심지어는 미국 자유노동발전연구소에 몸담고 오랫동안 미국의 엘살바도르 정책을 지지해온 윌리엄 도허티 (William Doherthy)조차 의회의 한 위원회에서 "이 나라에는 제대로 돌아가는 사법체계가 없다고 발언했다." 이로부터 얼마 후에는 엘살바도르의 전 토지개혁 책임자인 레오넬 고메스가 같은 위원회에서 "국가 테러는 대중을 두려움에 떠는 무저항 상태로 밀어넣었다"고 증언했을 정도다.[59]

아무튼 이러한 미국의 대외원조를 통해 엘살바도르는 무려 50억 달러 가까이를 지원받았다. 그와 동시에 엘살바도르에서 일어난 친미정부의 백색테러와 학살로 최소 5만 명 이상의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50만 명에 가까운 엘살바도르 국민이 미국 이주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결국 이 내전은 1992년에 멕시코시티 차풀테펙(Chapultepec) 성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종결됐다.

미국은 이 엘살바도르 내전에 깊숙이 개입했다. 1979년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이 혁명정권을 수립하자, 엘살바도르에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1980년 미국이 본격적으로 엘살바도르에 개입하면서 엘산바도르의 군대는 양적으로 급증했다. 미국은 엘살바도르에 1981년 3,500만 달러, 1982년 1억 1,600만 달러, 1983년 7,600만 달러 등의 군사원조를 제공했고, 연평균 1억 3,000만 달러 이상의 무기를 제공했다. 또한 미국은 엘살바도르에 최소 100명 이상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엘살바도르 정부군을 지휘했다. 1981년에는 엘살바도르 정부군 1,500명을 교육했다.

6.6. 68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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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마오쩌둥, 체 게바라, 호치민을 아이콘으로 서구권에서 좌파 운동이 문화적으로 새로운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이 강해지고 종교 근본주의에 대한 냉소, 제3세계 문화에 대한 재해석, 록 음악의 재발견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68혁명은 냉전 체제에 대한 염증을 바탕으로 기존 사회의 권위와 억압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의 히피들을 중심으로 과거 "미개한 히스패닉이나 피는 물건" 정도로 인식되던 마리화나가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으며, 유럽에서도 역시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톱리스 같은 개방적인 성문화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소련이 배후에서 암약하여 해당 국가의 좌파세력을 지원했으나, 사회보수주의 성향이 있던 소련 공산당의 배후 조종은 곧 유명무실해지고 곧 68혁명은 순수한 민중 혁명으로 발전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하던 68운동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다시 재해석되고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은 좌파 성향으로 급격히 기울게 되었다. 이를 전후하여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르헨티나의 마누엘 푸익,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가들이 명성을 떨쳤다.

같은 시기 대한민국에선 이 시점부터 장발족이 생겨났고 미니스커트가 도입되었으며, 일본에선 적군파의 반체제 무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군사정권 시기였기 때문에 별다른 반향이 일어나지 못했고, 일본에서도 요도호 납치 사건이나 산장사건 등으로 무장운동의 급진성과 폭력성 때문에 인기를 잃으면서 몰락하고 만다.

6.7. 해방신학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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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는 1945년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과 도시화가 엄청난 빈부격차를 초래했다. 저명한 라틴아메리카 가톨릭 신학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기독교의 의무임을 다시 역설한 새로운 기독교 해석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1980년에 암살당한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추기경과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브라질의 레오나르두 보프 신부와 동생 클로도비스 보프 신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신학자들은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실천해 온 자선사업에만 머물지 않고, 고삐 풀린 자본주의와 억압적인 정치적 권위가 결합된 라틴아메리카 정치체제를 공공연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대안으로 최저 생계 수준의 보장을 통한 인간 존엄성 보존과 기독교 윤리에 따른 부의 재분배를 전제로 하는 체제를 요구했다. 정치적으로 좌파인 이 신학자들은 노동 기준의 향상과 산업 규제를 요구했고, 외국 투자자, 주로 미국 투자자들의 권한 축소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형평성 증대를 위한 운동의 대가로 바티칸의 검열을 받았고, 고국에서는 박해를 당했다.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1945 이후 / 서로 의존하는 세계 / 4부 세계 문화

7. 20세기 말(1980~2000)

1980년대는 동구권이 몰락하고 공산주의 개념이 급격히 사그러드는 등 제2세계가 무너지면서 제3세계 각지 좌파들의 입지가 취약해졌다. 라틴아메리카는 기존의 반 카우디요, 반 미국 정서가 흔들리고 현실을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당시는 동아시아의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중진국 함정을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잡아타던 시점이었다. 일제 가전제품과 자동차, 오토바이가 서구 시장을 휩쓸고 뒤이어 중국이 핑퐁외교, 흑묘백묘론을 통해 세계의 공장으로 거듭나는 가운데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제대로 된 2차 산업 육성이 실패했다. 국민들의 평균 교육 수준이 올라갔는데도 불구 체감경기는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혹은 후퇴하는 상황이 되자 라틴아메리카 각국 국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미국발 신자유주의의 시험대로서 라틴아메리카가 올라왔다는 것이기도 했다.

7.1. 신자유주의의 대두

칠레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피노체트는 국민에게 채찍과 함께 던질 당근으로 경제를 선택했고,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다. 3년 뒤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도 비슷한 정책을 실시했다. 1982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중남미 각국으로 투자된 외국인 자금이 속속 이탈하기 시작하면서 경제위기가 찾아오자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는 속속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외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차관을 요청하자 미국과 국제금융기구(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 등)들은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조언해서 긴축재정, 공기업 민영화,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가 강도 높게 추진되었다.

이 정책은 칠레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나[60] 아르헨티나에서 처절하게 실패하게 되는데 중남미 각국에서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민주정부가 속속 들어서면서 이러한 외채위기가 덪이 되었고 독재정권 당시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외채가 지속적으로 불어나는 상황 속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쿠바를 빼면 죄다 굴복하는 처지[61]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사회복지예산은 줄어든데다가 실업률과 빈곤율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소득분배는 후퇴하게 되었고 이는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환멸만을 키우는 작용을 하게 되었다.

7.2. 마약 카르텔의 번창

대항해시대 페루 부왕령포토시 은광은 세계에서 가장 은 채굴량이 많던 광산으로서 포토시에서 채굴된 은은 유럽 전체의 가격 혁명을 일으켰다. 다른 한편으로 누에바에스파냐 사카테카스에서 채굴된 은은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수출되어 명나라와 청나라에 은본위제도가 확립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볼리비아인들 입장에서는 약오르게도 라틴아메리카 각국이 독립한 시점에서 은광 상당수가 고갈되었으나... 대신 포토시 은광산에서 일하던 원주민 광부들이 애용하던 코카나무 이파리가 새로운 자원으로 떠올랐다. 코카나무 이파리를 가공해서 만든 게 바로 비싼 마약 코카인이다.

1960년대 후반부라 콜롬비아는 공산 반군 FARC와의 내전 상태에 돌입하면서 정부의 지방장악력이 느슨해졌고, 이 틈을 타서 범죄조직들이 코카인을 재배해서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마약 카르텔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통하는 파블로 에스코바르메데인 카르텔이었다. 에스코바르는 기존의 콜롬비아 반군 M-19와 세력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콜롬비아 각지에 흩어져있던 마약 카르텔들을 통합하여 메데인을 중심으로 거대한 군벌 집단을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1980년대 미국 빈민가에 크랙 코카인의 보급되면서 코카인 수요가 늘어나면서 콜롬비아와 볼리비아, 페루의 마약 카르텔들은 돈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어느새 콜롬비아 최고 부자가 된 에스코바르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의 기사를 작성하는 언론인들을 마구 보복살해한 것은 물론 아비앙카 항공 203편 폭파 사건을 일으키고도 별 다른 처벌을 받지 않는 등 콜롬비아의 제왕으로 군림했으나, 결국 너무 눈에 띄게 나댄 나머지 1993년 미합중국 법무부 마약단속국에게 사살당했다.

공교롭게도 콜롬비아와 미국 코카인 밀매 루트의 중간 교역로에 해당하던 멕시코는 1980년대 크랙의 등장으로 코카인 수요가 늘어날때 즈음 모라토리엄에 빠지면서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상당수의 멕시코인들이 마약 카르텔에 가담하였는데, 중진국 함정을 극복하지 못한 멕시코는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빈부격차 해결이 실패하고 결과적으로 카르텔을 통제하는데 실패하였다. 미국과 인접한 멕시코 북부 국경지대는 카르텔들의 자치 지역으로 전락하였고 멕시코의 유명 관광지는 카르텔들이 호텔을 관리하면서 잡범들로부터 미국인 관광객들의 안전을 책임지게 되었으며,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는 세계에서 인구 수 대비 경찰 수가 가장 많은 도시로 어렵사리 치안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7.3.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사파티스타는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장 언론 집단으로, 반정부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엄연한 테러단체이다. 1994년 발흥한 이 집단의 특이점은 지금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무장 봉기와는 여러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친미 정권(칠레의 피노체트 등)과 반미 쿠데타 or 민중봉기 정권(쿠바의 카스트로 등)으로 크게 둘로 나뉘어 있던 라틴아메리카 정치사에서 벗어나 있던 단체라는 것이다. 이들은 친미도 반미도 아닌 반세계화와 반신자유주의를 들고 나왔으며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낙후된 사람들을 위한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아나키즘을 표방했다.

둘째로, 이들은 평화혁명과 민주주의 선거 방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 페루의 아주 유명한 농민게릴라조직인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빛나는 길)라는 무장집단은 폭력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복 폭력을 자행하면서 원주민 농민들로부터 고립되어 쇠퇴하고 만다. 마약 게릴라, 납치 게릴라라고 불리는 콜롬비아혁명군(FARC)은 지도부가 사실상 궤멸상태로 치달았다. 민중은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며 무장쿠데타를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파티스타는 자신의 입장에 맞는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평화가두행진을 진행하고 인터넷과 PC통신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퍼트려 나갔다.

셋째로 이들은 정권을 노리지 않았다. 애초에 이들은 무장 봉기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1994년 1월 1일 봉기한 것도 이목끌기식 쇼일 뿐, 바로 정글과 산악지대로 후퇴한 후 눈에 띄는 게릴라 활동이라곤 하지도 않았다. 멕시코시티로 진군하겠다고 으름장을 논 1999년의 멕시코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소규모 원주민 자결주의를 원하며 2007년에 드디어 무장을 포기하고 민간단체로 회귀한다.

민주주의에 실망하여 우익 정권이 큰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던 남아메리카에 사파티스타와 같은 무장집단은 상당한 충격이었고, 곧이어 21세기 선거혁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7.4. 미국의 파나마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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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미국은 마약 범죄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법정에 세운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파나마를 침공했다. 사실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노리에가는 미군이 운영하는 아메리카학교에 두 차례 입교해 훈련을 받았으며, 1960년대부터 CIA의 돈을 받고 하수인 노릇을 했다. 부패하고 파렴치한 노리에가는 콜롬비아의 메데인 마약 카르텔의 편의를 봐주고 이익을 챙기는가 하면 마약 밀매에서 자신과 라이벌 관계인 메데인 카르텔의 거물들을 미국 마약단속국에 밀고하기도 했다. 또한 니카라과 반군을 지원함으로써, 윌리엄 케이시, 엘리엇 에이브럼스, 올리버 노스 같은 레이건 행정부 고위급 관리들의 비호를 받았었다.[62]

그러나 그런 노리에가가 1988년 미국 법무부에 의해 마약 혐의로 기소됐고, 1989년에는 파나마 대통령 선거 결과를 무효화해 미국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자 아버지 부시는 노리에가를 버리기로 결심했으며, 미국의 부추김 및 사주를 받은 파나마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시도했고, 결국 12월 대규모 미군 병력을 동원한 파나마 침공으로 이어졌다.

8. 21세기: 블루 타이드핑크 타이드

21세기 들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된 정권의 90% 이상은 전부 좌파 집단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첫째는, 신자유주의의 인기가 시들했기 때문이다. 절대빈곤은 심화되고 빈부격차는 답이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었으며 국내의 자본은 모조리 유럽과 미국으로 빠져나갔다.

각종 국유시설을 모조리 민영화하다보니 물값이 기름값보다 비싼 상황이 되었으며, 칠레와 베네수엘라는 생필품 등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받지 못해 1989년부터 2000년까지 헬게이트가 열렸다. 라틴아메리카는 이번엔 총보다 선거 용지로 자신들의 의지를 피력하였으며, 21세기 라틴아메리카는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진보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차베스를 계승한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은 실시간으로 헬게이트를 갱신하고 있으며 201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좌파의 인기가 식어가는 추세다. 그 유명한 반미국가 베네수엘라도 2019년부터 친서방과 반서방 성향의 인물들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파 정권들의 집권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진 못했는데 도널드 트럼프 정권 이후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대외정책이 대거 흔들리기 시작하고[63] 생활 물가 인상으로 인해 오히려 기껏 들어선 아르헨티나의 우파 정권이 다시 좌파 연립정권에게 대선에서 패배했고 칠레에서는 대중교통 요금 상승 등의 경제 문제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볼리비아, 브라질의 경우에는 연이은 우파 대통령들이 지리멸렬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한심한 리더십을 보여주면서 역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19 대 유행 이후에는 더더욱 타격이 커서 볼리비아는 결국 다시 좌파가 정권을 탈환했고 브라질은 주정부들이 보우소나루 정권의 신뢰를 철회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며 다시 흔들리고 있다.

최소한 2020년대 이후의 시점에서 볼 때, 미국과 서방권의 설레발과 달리 라틴아메리카의 우파 정권은 왜 21세기 초에 좌파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무능력함을 바로 보여주며 위기를 맞이하였고 여기에 우파 세력을 지원하던 미국이 트럼프 정권의 줏대없는 행보로 인해 스스로 영향력을 갉아먹으면서 코로나 19 판데믹 이후에는 오히려 라틴아메리카 우파 세력이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다. 핑크 타이드 참조.

8.1. 브라질, 룰라

파일:attachment/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017.jpg

00년대 초반 한국 보수 언론 중 하나인 중앙일보에서는 '룰라는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상당히 좌파적인 공약을 내세웠으나 당선 이후에는 보수적인 정책으로 브라질 경제를 부흥시켰다'고 칭찬하였는데,# 해당 주장은 진영논리 입장에서 어느정도 편향된 주장인 것은 배제하더라도 그만큼 룰라의 브라질의 약진이 대한민국 보수층을 비롯한 세계 각계 각층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도좌파 출신 룰라는 진영 논리를 배제하고 부정부패와 낭비를 상당부분 근절하였으며, 이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복지를 확충하고 교육 인프라 투자를 대대적으로 개선하였다. 룰라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후 집권한 같은 노동당 출신 지우마 호세프가 대통령 자리를 잇는다. 그러나 하필 2014년 미네이랑의 비극에 뒤이어 2014년 유가 치킨 게임(이란과 베네수엘라 등 후발 산유국 및 러시아와 알제리 같은 제2세계 국가들을 겨냥한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이 주도한 국제 유가 폭락)의 영향으로 브라질 경제가 개판이 된 영향으로 급속히 인기를 잃고 탄핵되었다. 게다가 룰라마저 2017년 돈세탁과 간접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면서 2018년 대선 출마가 가로막힌다. 하지만 이는 연방판사 세르지우 모루의 사법 쿠데타, 혹은 사법 사기라고 불리는 공작이었고 2022년 룰라는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선다.

호세프 이후 집권한 중도우파 성향 미셰우 테메르의 부패와 실정을 거쳐 자이르 보우소나루라는 극우성향의 대통령이 들어섰다.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브라질의 빈민가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수천여 명 규모의 쿠바 출신 의사들을 '빨갱이는 필요없다'며 모조리 추방하는 패기를 보였었다.# 그러나 자이르 보우소나루 집권 이후 오히려 브라질의 경제는 계속 악화되고 있는데, 룰라 퇴임 직전 1만 달러대까지 간신히 올려놓았던 브라질의 1인당 GDP는 2020~21년 기준 7~8000 달러대로 추락해서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우소나루가 룰라처럼 재선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고, 결국 보우소나루는 막판 지지층 결집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실패했다.

여담으로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코로나 19가 심각해진 2020년 5월부로 자신이 추방했던 쿠바 의사들을 다시 브라질 의료 현장에 투입하면서 조롱을 듣기도 했다.#

8.2.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2000년대 초반 우고 차베스는 세계 뉴스 토픽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로서 조지 W. 부시의 미국일방주의를 비판하는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상전인 줄 알았던 미국에 큰소리 뻥뻥 치고 다니면서 세계인들의 이목을 끄는 차베스에게 열광했다. 쿠데타의 음모도 잘 막아냈다. 차베스 정부는 미국의 살인적인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여러 성과들을 달성했다. 우고 차베스가 집권하기 이전 베네수엘라는 빈곤층이 총 인구의 80%에 달하는 나라로 기초적인 상하수도 시스템조차 제대로 보급이 안 되어 있던 나라였다. 오늘날 나이지리아와 마찬가지로 차베스 집권 이전 베네수엘라의 의료비는 일반인들 소득 수준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았는데, 차베스는 쿠바에 석유를 공급하고 대신 쿠바로부터 의사를 파견받으면서 의료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하였다. 쿠바 의사들의 평균 수준이 객관적으로 뛰어나다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기존에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는 베네수엘라 일반 국민들에게 기본적인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우고 차베스는 노동자가 주인인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조합장과 조장을 직접 투표로 선출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민주적인 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그 결과 2006년 베네수엘라에는 10만 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생겨났다. 아무튼 이런 협동조합의 증가로 1999년에 16.6%였던 실업률이 2007년 1월에는 11.1%로 감소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차베스는 예산 중 상당 부분을 무상의료, 무상교육과 같은 사회사업을 위해 사용했다. 그리고 201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석유국유화 배째라 전략과 무지성 복지 정책의 부작용으로 경제를 몰락시키고 말았으며,[64] 현재에도 후임 니콜라스 마두로가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에는 차베스의 근시안적 경제정책, 니콜라스 마두로의 무능에 있지만 또 다른 결정적인 원인으로는 고강도 경제제재 그리고 오바마 행정부와 사우디가 주도하여 2014년부터 시작된 유가 치킨 게임에 있다. 유가 폭락을 통해 미국의 잠재적 적국인 러시아와 이란, 베네수엘라의 약화를 기도한 것인데,[65] 여기에 더해 러시아와 이란, 베네수엘라를 대상으로 강도 높은 경제제재가 가해졌다.

2차대전 이후 현대 사회에서 인권 탄압국이나 독재 국가 중 경제제재를 맞고나서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된 사례는 아직까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세르비아가 유이하다.[66] 서방의 제재를 받았던 베네수엘라 등등이 과연 경제파탄 이후에 정상적인 민주주의가 자라잡았는지 생각하면, 이 경제제재가 제재 대상국의 민주주의 정착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바꿔 말해서 대한민국의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돕겠다고 경제제재를 가해서 경제성장을 막고 1950년대 수준으로 한국 경제를 되돌려놓았다면 과연 한국에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면 빠르다. 2019년에 들어서는 이른바 2019년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라 하여 후안 과이도가 마두로 정권을 뒤집으려 했으나 실패한다.[67]
경제정책연구센터(Centre for Economic and Policy Research)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8월부터 베네수엘라에서 트럼프의 제재로 인해 4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식료품과 의약품 접근성이 떨어졌다. 이러한 제재는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
워싱턴 불렛 p.191~192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유가가 폭등하자 미국에서 다급하게 태도를 바꿔 베네수엘라 측에 석유 증산을 요구한 상황이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베네수엘라 정유 시설은 미국이 원하는 (기존에 러시아에게서 수입하던) 수요의 일부만 대체 가능할 뿐이다.#

8.3.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

모랄레스는 2000년대 중반 미국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민중들의 바람을 받아 당선되었으며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가까이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했으며[68] 경제정책 등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2019년 부정선거 의혹으로 실랑이를 벌인 끝에 사퇴하였다.

8.4. 페루, 페드로 카스티요

2010년대부터 페루 정치는 부패와 스캔들로 인해 임기를 제대로 마치는 대통령이 없었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러던 와중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피해를 심하게 입었고, 특히 교육은 코로나 여파가 더 심했다. 이에 25년 경력의 교사였던 극좌 성향의 페드로 카스티요는 이러한 현실에 분노를 느끼고 출마한 뒤,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운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성공한다. 당선 1년 후 탄핵당했다.

8.5. 칠레, 제헌의회[69][70]가브리엘 보리치

2017년 당선된 보수파 정치인 피녜라는 칠레를 남미의 코로나 진원지로 만들 정도로 한심한 대응능력에, 경제상황도 좋아지지 않았다. 결국 지하철 요금 30페소(50원) 인상으로[71] 민심이 폭발했고, 잇따른 반정부 시위 끝에 결국 칠레는 군사정권 말기에 제정되었던 기존 헌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제헌의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새로 선출된 제헌의회에는 기존 보수파 정치인이 대거 낙선하고 좌파와 무소속 의원이 대거 당선되었다. 또한 2020년 10월 피노체트 헌법을 국민투표로 폐지했다.

더 나아가 2021년 12월 칠레에서는 좌파연합 후보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당선되면서, 다시 한번 좌파의 바람이 불고 있다. “신자유주의 요람 칠레, 이젠 그 무덤 될 것” 집권 이후에는 우파도 안배하는 내각을 구성했지만 그보다 한 술 더 떠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로 내각을 채우다시피 했고, 무엇보다도 전술했듯이 제헌의회의 제헌 헌법이 2022년 7월에 통과되면 어차피 선거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는지라 국내외 지지자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8.6. 콜롬비아, 구스타보 페트로

2022년 콜롬비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구스타보 페트로는 역대 콜롬비아 대통령 중에서 첫 좌파 대통령이 된다.[72] 콜롬비아는 우파 정권이 집권했던 역사가 길었지만, 이번 만큼은 좌파의 물결을 피하지 못했다.

9.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한계

9.1. 식민 잔재 철폐와 토지개혁 실패

북쪽의 이웃한 앵글로아메리카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이유에는 인종(영국계/독일계), 종교(개신교) 같은 요인보다는, 유럽/아시아와 다르게 전통 기득권층(토지귀족, 관료화된 성직자 계급)이 없었던 사회적 요인,[73] 이용 가능한 토지가 사실상 무한대였던 지리적/경제적 요인이 더 컸다. 미국의 경우 갈려나간 아메리카 원주민을 제외하면 사실상 무주공산이었고, 토지귀족에 그나마 가까웠던 남부 지주들은 남북전쟁 이후 갈려나갔다.[74] 그리고 홈스테드 법이 제정되어 미개발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았다.[75]

반면 라틴 아메리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이던 시절 유럽의 전통적 기득권 체계(토지귀족, 관료화된 성직자 계급)가 그대로 넘어왔다.[76] 게다가 유럽보다 더 견고한 인종에 기반한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카스트 제도(La Casta)가 확립되면서 산업혁명 이후에도 "백인 > 메스티소 > 원주민 > 흑인" 사회 구조가 고착화되었다.[77] 페닌술라르의 크리오요 차별에 분개하여 들고 일어난 크리오요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흑인과 원주민들을 소외시켰으며, 식민지 시절 주어진 특권을 이용하여 족벌 기득권 체계를 구축하는데 열심히였다. 비교하자면 19세기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독립국들은 서로 영토를 노리고 전쟁을 벌이기 일쑤였다면, 미국과 캐나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국방 문제 하나만큼은 서로 완전히 협력하는 상황이었다. 즉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의 지도층들의 멘탈리티는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보다는 군벌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원이 아무리 남아돌아도 효율적으로 활용되기 어렵다. 근본적인 사회 구조가 이 모양인데 당연히 좌파가 집권해 국유화와 복지를 하건, 우파가 집권해 경제개방과 민영화를 하건 무언가가 나아질 턱이 없다.[78]

인종차별 구도는 확고했는데 그렇다고 유럽계 백인 인구라도 활용을 잘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대서양 횡단 배편이 저렴해지고 의료 기술의 발달로 사망률이 감소하자 유럽에서 미국/캐나다로 대량이민이 일어나던 시점에서도 라틴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 인구는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1백여 년이 넘는 기간동안 600만여 명이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로 넘어갔는데 그 중 절반이 아르헨티나로 갔고 나머지는 브라질, 우루과이, 쿠바로 향했다. 물론 600만 명이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비슷한 기간(1850~1930년대)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인구는 2,500만여 명이에 달했다. 즉 당시 유럽 백인들 입장에서도 라틴아메리카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미국/캐나다만 못한 곳이었다.[79]

9.2. 독립운동 자체에 대한 비판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운동은 미국과 유럽에서의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식민 지배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력과 위신이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개박살이 난 것을 계기로 본토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자기 나와바리를 마음껏 지배하겠다는 식민지 출신 지배층들의 욕망으로 인해 벌어진 독립이었다. 당연히 독립 이후 이들 대지주들이나 정치귀족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지고 이들끼리도 뭉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싸우거나 이합집산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부정부패가 극심해지며 쿠테타를 비롯한 혼돈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었다.[80][81]

게다가 이들은 스페인이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해 세운 칙령을 무력화했는데 여기에는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칙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나마 멕시코와 같이 원주민들이 식민지 건설에 적극적인 도움을 준 경우 그나마 원주민들의 정치세력이나 문화가 남을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들은 제어해야 할 제국 본토세력이 소멸하면서 신생 국가들의 공격에 무방비 노출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결국 신생 독립국들에 의해 대부분이 말살, 추방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라틴아메리카가 독립하기 직전 1810년 스페인 식민지 인구는 1800만여 명에 달했는데 이 중 원주민 인구는 800만여 명, 흑인 인구는 100만여 명에 달했다. 독립 직전까지만 해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인구 그룹이던 원주민들은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독립 이후 원주민 토벌전 및 혼혈이 강제되면서 소수자로 전락하였다. 라틴아메리카 독립 이후 이어진 원주민 학살은 미국과 비교해서도 잔인함이 떨어지기는커녕 더 악독하고 심한 경우도 있었으며,[82] 이들 독립세력은 혼혈 여부와는 별개로 스스로를 백인으로 생각하였기에 인종차별주의가 라틴 아메리카에 만연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83]

9.3. 우파에 대한 비판

9.4. 좌파에 대한 비판

중남미 내의 잘못된 사회적-정치적 구조의 폐단을 외면한 채, 무조건 미국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비교하자면 2021년 미얀마 쿠데타의 원인을 100% 중국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실 강대국들은 원래 주변국들이 컨트롤하기 만만한 약소국으로 남는 것을 선호하며, 같은 맥락에서 주변국들이 민주 국가가 되는 대신에 독재 국가가 되는 편을 선호한다. 왜냐면 독재 국가는 독재자와 친인척 및 그 측근만 매수하면 손쉽게 조종이 가능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경우 약소국이라 하더라도 강대국이 마음대로 조종하는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연히 강대국에 이웃한 약소국이라도 성공적으로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나라가 없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의 이웃 국가 조지아, 몰도바의 경우처럼 국민 소득은 개도국 수준에다가 주변에 딱히 강력한 우방국도 없지만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사례가 있다. 외압에 시달려서 자국 내 독재자를 인정하고 옹호하는 것은 해당국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초강대국 미국과의 관계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미국의 매판자본이 했더라도, 어차피 외국 자본은 국가 경제의 필수요소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무조건 미국서방은 나쁘다는 식의 인식은 단순히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고립만 심화할 뿐이다. 물론 외국 자본도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하게 받아들여야 의미가 있는거지 정경유착 등으로 인해 쓸개까지 다 빼주는 식의 외국 자본 도입은 국가 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 좋다는 외국 자본 받아들인 쌍용자동차가 뭔 꼴이 났는가. 다만 그렇다고 적대적으로 나오는것도 나쁜결과를 초래하는데 2007년 우고 차베스가 오리노코 벨트의 개발을 원하는 해외 석유 기업들을 전부 내쫓고 국유화한 일은 10년 뒤 베네수엘라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최악의 자충수로 판명났다. 베네수엘라/경제 항목 참조.

특히 베네수엘라우고 차베스 정권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였다. 여기서의 고립은 외교적인 고립이 아니라 자본적인 고립에 가깝다. 사실 국제적인 고립이라고 그러기엔 남미지역에 좌파가 다수정부를 구성한지라 굳이 고립정책을 펼 필요도 없다. 자칭 '미제에 맞서는 차베스'는 개헌을 동반한 독재정치로 변하여 독재와 인권탄압을 저질렀다. 그는 자기 권력을 위해 베네수엘라의 제2의 국민돌격대를 만들었으며, 의회를 친 차베스파로 대체했다.[84] 베네수엘라에선 누군가가 정권을 비판만 하면 전부 다 미제의 꼭두각시로 일관하여 탄압한다. 차베스와 후임인 마두로도 비슷해서 권력욕만 넘치는 독재자이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실제로 차베스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 2%였다.[85] 선심성 복지와 포퓰리즘의 결과다. 물론 우고 차베스 이전에도 석유 의존도가 엄청난 수준이었으며 빈부격차가 엄청났으며 1960년대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을 정도로 경제가 막장인 상태였지만, 우고 차베스는 2000년대의 고유가로 활황을 맞이해 복지 정책을 이것저것 추진했음에도 빈부격차 해소와 나쁜 치안사정이 해결되지 않았다. 차베스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여당은 2015년 총선거에서 의석의 2/3를 야당에게 내주는 대패를 당했다. 그러나 마두로는 현재까지 기어이 정권은 틀어쥐고 있는 중이다. 그냥 일개 정당의 선거 참패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현재의 베네수엘라는 단순히 '어려운 환경' 따위로 표현할 상황이 아니다. 국민은 난민이 되어 이웃나라들이나 해외로 달아나고, 돈은 휴지조각으로 전락해 공예품 용도로나 사용되는 지옥을 겪고 있는 중이다.

2015년 들어 유가하락과 경제불황이 본격화되면서 석유를 비롯한 자원에만 지나치게 의존했던 남미 국가들은 하나같이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룰라의 정치적 후계자인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2016년 2월, 지지율 5%를 기록하다가 탄핵당하여 파면되었으며 이후 정치적 혼란을 거듭한 끝에 다시 우파 정당이 집권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권의 경제정책 비판에 대해서는 포퓰리즘의 거짓 약속- 라틴아메리카, -희망에서 좌절의 대륙으로- 라는 제목의 책을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저자 세바스티안 에드워드는 칠레에서 태어나 칠레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Chicago Boys이며, 에드워드 가문은 19세기부터 칠레 은행가와 언론가를 주물러 온 칠레 최상류 계급의 대표다.[86]

9.5. 미국, 유럽 등 외국 개입에 대한 비판

소위 현실주의자라고 자뻑하는 인간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근시안적인 착각과 음모에 심취하여 장기적인 판을 말아먹는다
토니 주트가 헨리 키신저를 비판하며 남긴 말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미국이 벌여온 공개적·비공개적 개입의 길고도 대개 수치스러운 역사는 20세기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차대전 이전에는 이런 개입이 주로 미국의 사업상 이익을 지키기 위해 행해졌는데, 여기에는 심지어 니카라과와 아이티에서의 장기적 군사점령까지 들어 있다. 냉전 시의 개입은 좀더 은밀해졌지만 여전히 무자비했다. 라틴아메리카 경제와 국제관계사를 전공한 저명한 학자인 존 코츠워스의 계산에 따르면, 1948년에서 90년 사이에 미 정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적어도 24개의 정부를 전복시켰는데, 4건은 직접적으로 미 군대를 동원해서, 3건은 CIA 주도의 반란이나 암살을 통해서, 그리고 17건은 미국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그 지역의 군대나 정치세력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대개는 군사적 쿠데타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p.93~94[87]

물론 미국이나 유럽 열강들도 현재의 라틴 아메리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영전쟁 이래 외침이 덜 했던 미국[88]과 달리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해방 이후에도 이 지역을 탐낸 영국,[89] 프랑스,[90] 스페인,[91] 독일[92] 등 내로라 하는 유럽 열강들은 독립전쟁 시절에도, 독립 전쟁 이후에도 내전에 개입하거나 이권과 영토를 요구하며 침공해 오는 등 라틴아메리카 권역 국가들을 계속 공격했다. 특히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이리저리 개조해 가며 라틴아메리카 권역을 자신들의 베타적 이익지대라고 삼았고, 원교근공 외교 정책 하에 카리브 해와 중앙아메리카 권역 국가들을 필리버스터[93]연합 과일 회사 등을 동원하여 군사적, 경제적으로 공격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굴복한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도 원주민의 인권 문제나 보호에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당장 미국부터가 자국의 원주민들을 보호구역으로 추방해가며 성장한 국가였고 유색인종이나 원주민 거주 지역이 미개발지가 많았던 데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는 암묵적으로 백인우월주의가 대세였기 때문에 유색인이나 원주민을 탄압하는 정권들을 지지했다. 이 때문에 원주민, 유색인종, 혼혈 인구가 많은 국가일수록 일반 국민들의 반미정서가 매우 강하다. 특히 미국은 현재까지도 사관학교 유학생 출신 장교진들과 CIA, 식량기업 등으로 연결된 커넥션이 작동하고 있으며 현재진행형으로 라틴아메리카 정세에 개입중이다.

냉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칠레의 경우에는 어지간한 유럽 국가와 비교될 정도로 안정적인 정치로 유명한 국가였으나 아옌데가 좌파라는 이유만으로 쿠테타를 압박했고[94] 이를 거부한 칠레 군부가 저항하자 피노체트를 앞세워가며 저항을 분쇄하고 강제로 정권을 뒤집고 이를 시작으로 다른 라틴아메리카 정권의 쿠테타를 지원하고 국민들을 탄압하는 것을 적극 협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미 CIA 지부는 많은 라틴 아메리카 인들을 탄압하는 데 적극 협조했으며 카르텔과 결탁해 마약을 재배해 미국에 팔아먹는(!) 행위를 일삼았다.

냉전 이후에도 이는 다르지 않아서 멕시코는 NAFTA로 인해 가맹국 중 가장 피해를 보는데도 불구하고[95] 워싱턴은 멕시코의 사회적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을 방기하거나 조장했고 이는 마약 카르텔의 성장과 미국으로 입국하는 라틴 아메리카 인구의 증가를 낳게 된다. 중미랑 남미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존 볼턴이 폭로했던 2019년 베네수엘라 정권 전복 시도부터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던 미국의 전형적인 라틴아메리카 정권 전복 절차를 그대로 밟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96]

일각에서는 좌파 정권의 극단적인 반미주의가 라틴 아메리카 발전의 저해물이라고 하는데, 사실 좌파 정권이라고 해서 미국과의 현실적인 친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외교를 한 것도 아니다. 여러 라틴 아메리카 좌파, 포퓰리즘 정권은 미국과의 힘의 격차를 인지하고 있었고, 미국이나 유럽과의 관계 개선도 꾸준히 시도하기도 했고 실제로 성과를 거둔 경우도 있었다. 미국이 좌파정권이 맘에 안 든다고 앞뒤 안 보고 밟았을 뿐.[97] 물론 미국은 남미 말고도 베트남에게도 이 짓거리를 행한 적이 있었다.[98] 이란에서도 모사데크 정권을 무너뜨려 이전까지 이란 내에 있던 친미를 불식시키고 반미정서를 확산시켰다. 그리고...

게다가 라틴아메리카는 무조건 소련이나 중국을 좋아했던것은 아니다. 쿠바 혁명의 주도자들중 한명인 체 게바라라는 말년에 소련의 계속된 내정간섭에 불만을 품고 소련도 미국과 다를 것이 없는 제국주의 국가라고 비난을 했으며[99] 이 때문에 소련 눈치만 보던 피델하고 갈등을 격기도 했으며 결국 그는 행동 장소를 아프리카로 옮겼다. 다만 중국에 대해서는 당대의 중국은 강대국이 아니라 그런지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직접 나서서 라틴아메리카를 밟아버리는 미국과 미국이랑 다를게 없이 구는 소련의 행각에 질려버렸을 뿐이다.[100]

10.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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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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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면적이다.[2] 예를 들어 오늘날 멕시코는 고원지대에 인구가 집중되어있고 주민 대부분이 메스티소이며, 미국 바로 옆에 있는 지리적 이점과 풍부한 저가 노동력을 토대로 공업화를 어느정도 진척했으나 농업에 불리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공산품과 석유가 수출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르헨티나는 평원지대에 인구가 집중되어있고 주민 대부분이 백인이며,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데 비옥한 팜파스 평원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곡물과 축산물이 수출 대부분을 차지한다. 멕시코의 수출과 무역상대국, 아르헨티나의 수출과 무역상대국에 대한 OEC 자료를 참고하라.[3] 심지어 역내 왕초로 인식되는 미국에 의존하는 정도도 서로 다르다. 애초에 미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하면 라틴아메리카만 미국에 의존한다고 폄하하기도 그렇다.[4] 물론 보다 거시적으로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도 서로 공통점을 공유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사라는 보다 거시적인 맥락에서 찾은 공통점이므로 지역사에 부합하는, 즉 다른 지역에서 관찰되지 않고 라틴아메리카 역내 국가들이 가진 공통점이라고 보긴 힘들다.[5]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식 명칭이었던 남아메리카 합중국과는 다르다.[6] 당시 자유주의 노선이 영국빠였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는데, 영국에서 새로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신생국들에 대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독립 이후 영국 자본의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자국 내 남아도는 소고기를 냉동해서 해외로 수출하는 인프라가 확립되었다. 이런 자유주의자들 입장에서 인프라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원주민은 그저 제거대상일 뿐이었다.[7] 특히 모라산과 정면대결했던 라파엘 카레라는 그 자신이 원주민, 백인, 흑인 혼혈인 메스티소였다. 실제로 카레라는 원주민에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1871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자유주의 세력과 크게 대비되었다.[8] 19세기 초 독일에서 영국으로 이주해온 이주노동자들은 영국인들이 받는 급료의 절반만 받고 일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9] 이들은 대개 풀라족, 하우사족 무슬림들로 포르투갈어 라틴 문자가 아니라 아랍 문자를 배워온 사람들이었지만, 아예 글을 읽고 쓴다는게 뭔지 아예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다른 언어로 글을 읽고 쓰던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편이 더 빨랐다.[10] 말레는 대개 무슬림이었으나 오늘날 브라질 흑인/파르도 인구 중 무슬림은 거의 없다.[11] 19세기 중반 이후 브라질 북동부는 사탕수수 농사를 지으면 카리브해의 영국, 네덜란드 플랜테이션과 경쟁이 안 돼서, 대신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서만 재배 가능한(다시 말해서 해안 섬 지대에서 재배하기 힘든) 커피 농사에 집중하게 되었다.[12] 현재 텍사스나 콜로라도, 캘리포니아, 오리건, 애리조나, 유타, 아이다 호, 네바다, 뉴멕시코 등을 당시 미국이 접수하게 됐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영토를 독일이 멕시코에게 참전요구조건으로 걸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세한 건 치머만 전보 사건을 참고하라.[13] 이 전쟁에서 아시아/태평양에서는 필리핀 득템.[14] 원주민들의 사기를 꺾을 목적으로 치와와 원주민 부족 지도자들을 사슬에 묶어서 태평양 앞바다에 던져버렸다.[15] 독수리 의자에 앉은 사람이 비야, 모자를 잡은 사람이 사파타이다. 멕시코 혁명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로, 두 혁명가의 표정이 다르며 관련 일화가 있는데, 멕시코 시티에 입성한 뒤 비야는 이 자리에 앉아 본 후 사파타에게 앉아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사파타는 "나는 이 자리를 원한 게 아니라 토지를 얻기 위해 싸웠다. 우리는 모든 야심을 없애기 위해 그 의자를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16] 앵글로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를 비교대조한 그림이다.[17] 마셜 플랜으로 서유럽/남유럽 경제가 급속히 복구되고 아시아에서는 일본 경제가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던 파이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18] 노엄 촘스키, 김보경,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한울, 1996 p.81[19] 정이나, 「과테말라 36년 내전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고찰: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중남미연구』 3,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 2015, p.143~144.[20]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p.435[21] 댄 쾨펠, 김세진, 바나나: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이마고[22] 아르벤스가 대선에서 승리했을 당시, 61명이 정원인 의회에 공산주의자는 4명에 불과했고, 아르벤스 내각에는 공산주의자가 단 1명도 없었다. 쉽게 말해, 미국의 CIA는 아르벤스 정부의 영향력을 반공이라는 구실 아래 과장한 것이다.(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85)[23]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p.435[24]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89[25] 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의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다.[26]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92[27]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p.440~441[28] 덜레스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한 영국 관리는 덜레스의 거짓말에 구역질이 난다면서 덜레스의 연설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해, 또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에 대해 했던 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많다고 지적했을 정도다.[29]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168~169[30] 촘스키와 허만에 따르면 1978년부터 1985년까지 과테말라에서 우익들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 숫자만 최소 10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했다.[31] 아옌데의 경우 대외적으로 피델 카스트로와의 관계에 많이 의존했다.[32] 냉전 시대 쿠바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 설탕과 커피를 수출하였다. 설탕은 소련 내에서도 사탕무를 사용해서 어느정도 자급할 수 있었지만 커피는 확보가 어려웠다. 쿠바가 소련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원조를 받은 줄 아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 쿠바는 제2세계의 커피 수요를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워서 쿠바 국민들에게 커피 원두에 완두콩을 섞어 볶아 공급해야 했다. 뭐 카카오 재배 농부들이 카카오가 초콜렛 만드는 재료라는 것조차 모르는 서아프리카 카카오 산지보다야 낫지만[33] 쿠바에서 자랑하는 유기농 농업 진흥 정책 역시 미국의 제재를 뚫기 위한 궁여지책에서 나온 것이다. 해당 정책이 아니었으면 쿠바의 농업은 아이티 수준으로 미국 농산물에 대한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을 수도 있다.[34] 비자이 프라샤드, 원영수, 제3세계의 붉은 별, 두번째 테제, 2018 p.137~138[35] 북한에서는 소련이나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이 보내준 물건들 대금을 뜅까먹는 일이 많았던 반면, 쿠바는 그래도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는 국가인 것도 해도 양심적으로 무역하던 편이었다.[36] 선거 개표 초기 우익들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익들은 김칫국부터 마셨다가, 패배하여 실망하기에 이르렀다.[37] 아이러니한 사실은 피노체트하에서 다른것은 민영화가 착착 진행된 반면에 구리 국유화만큼은 변하지 않아서 이후로 칠레 정부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38] 1975년부터 2022년까지 칠레의 달러 기준 1인당 GDP는 연평균 3.9% 성장했다. 같은 기간 콜롬비아는 2.4%, 브라질은 1.5%, 페루는 1.4%, 멕시코는 1.1%, 아르헨티나는 0.7%였다. 또한 1975년 칠레의 1인당 GDP는 미국의 12.8%에 불과했으나 2022년 22.9%까지 증가했다.[39]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86[40]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87[41] 참전 이후 반전운동을 전개했으며, 1980년대 이란-콘트라 스캔들 당시 로널드 레이건이 니카라과로 보내는 물자를 막기 위해 반전시위를 하다가 두 다리를 잃었다. 현재도 미국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몇권의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42] 브라이언 윌슨이 현재 운용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다.[43] 니카라과 경제는 양극화가 문제였지 극빈국은 아니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내전으로 막장이 되기 전 1977년 1인당 GDP가 737달러였는데 당시 중상위소득국가(UMIC)의 1인당 GDP가 697달러였다.[44] The End And The Beginning: The Nicaraguan Revolution(2019), John A. Booth, Routledge; 1st edition[45] 이범준 외 지음, 사회주의 실험: 쿠바와 니카라과, 인간사랑, 1992, p.185[46] 정명기, 니카라과 혁명사, 한마당, 1986 p.190[47] 현재 산디니스타는 다소 보수화 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산디니스타는 현재 많이 우경화되어 낙태를 불법화 하는 것에 동조하고, 다니엘 오르테가가 '기독교인'임을 강조하며 표를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비범죄화를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48] 노엄 촘스키, 김보경,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한울, 1996 p.62~63[49] 이 암살의 배후는 로베르토 도뷔송으로 추정된다.[50] 노엄 촘스키, 김보경,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한울, 1996 p.64[51]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 테제, 2022 p.126[52] 노용석, 「엘살바도르 내전과 냉전의 상처 엘모소떼(El Mozote) 학살의 진실과 의미」, 『민주주의와 인권』 11:2,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1, 286쪽.[53]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194[54]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171[55]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173[56]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p.67[57] 반면에, 친미정부에 맞서 싸우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이 저지른 테러는 말 그대로 미미했다. 심지어 유엔 조차도 FMLN 좌익게릴라가 내전 기간 동안 민간인 살해의 5%에 책임이 있는 반면, 모든 민간인 살해의 약 85%는 엘살바도르 군대와 암살단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추정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우익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 90%였던 것과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관련자료 1관련자료 2[58]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201~202[59]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210[60] 무리한 고정환율정책과 막대한 외채로 1982년 경제위기를 맞이한 것을 제외하면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비해 장기적으로 더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와 함께 가장 부유한 국가이며, 밀턴 프리드먼은 칠레의 성장을 가리켜 "칠레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다.[61] 사실 쿠바도 굴복만 하지 않았지 1990년대 초반 동구권 붕괴와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서 교역이 꽉 막히면서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어 실질적으로 구조조정 작업을 시행한 것은 마찬가지였기는 했다. 단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복지제도의 붕괴와 실업자 양산만 되지 않았을 뿐.[62]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232[63] 사실 트럼프 자신의 관심이 없는 분야는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우파 세력에 대한 지원이 끊겼다.[64] 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는데 차베스 이전 베네수엘라는 오늘날 유럽 난민 사태에서 주요 난민 배출국으로 지목받는 나이지리아의 상황(주요 산유국임에도 불구하고 석유 수출 이익이 국민에게 제대로 분배되지 않아서 생기는 치안 부재와 사회 갈등, 기초적인 사회 인프라 부재)과 놀랍도록 유사했었다. 우고 차베스는 멀쩡한 나라를 파탄낸 게 아니라, 파탄 국가에 가까운 나라를 개혁하려는 과정에서 얼마간의 성과를 내다가 실패했다고 봐야한다.[65] 하나 더 하자면 지금이야 많이 가라앉았지만, 201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셰일 가스 혁명 운운하며 설레발을 치던 때가 있었다. 실제로 셰일이 유가 폭락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피터 자이한 같은 고립주의 우파는 이 참에 아예 세계 경찰이고 미중 대결이고 뭐고 손 떼고 셰일로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자는 설레발을 잇따라 내놓았다. (사실 아예 손을 떼자는 건 아니고 이제 그런 역할은 한국, 일본, 유럽 등 동맹국에 넘기자는 것이었다.) 물론 셰일 거품이 꺼진 후에는 과거 이야기지만.[66] 그리고 이 둘 다 일반화가 안 되는 특이 사례인데 남아공은 인종차별 때문에 보이콧을 받은 거지 반공 진영에서는 암묵적으로 추인받았고 세르비아는 전신 유고슬라비아 시절 때도 서방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즉 인권 탄압이나 독재 운운하지만 제재 국가의 절대 다수가 반미 정권임을 감안하면 경제 제재로는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추동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도리어 제재는 경제적 살인이라는 말(고 램지 클라크 전 미 국무장관)처럼 해당국 국민의 반감만 불러일으킬 뿐.[67] 우고 차베스의 집권 시절 차베스의 독재 및 장기집권 낌새가 보이자 반대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은 주로 대학생이나 고학력 전문직 직종 종사자들이었는데,# 베네수엘라 경제 위기가 본격화된 2016년 전후하여 이들 상당수가 콜롬비아나 브라질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 대학생들이나 고학력 화이트 컬러 직종 계급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68] 물론 북한이나 시리아의 독재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등 어느 정도 선은 지켰다.[69] 개헌과 제헌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기존 체제 내에서 현행 헌법을 수정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국민 주권에 기반하여 아예 제헌의회에 대한 국민 신임으로 헌법을 원점에서부터 재작성함으로서 제헌 이전의 기존 체제는 원천적으로 초기화 시켜버리는 것. 즉 사실상 제2의 건국이다. 대외적으로나 기존 국가 그대로 간주되는 거지.[70] 이 전술의 원조는 살바도르 아옌데의 실패(여기도 뒤늦게 제헌의회를 소집해서 정국 위기를 돌파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버렸다.)를 극복하려던 우고 차베스. 결국 제헌의회로 푼토 피호 시절의 권력 체제를 모조리 초기화시켰고 이에 대한 어용노조와 군부의 반혁명 쿠데타를 버텨내면서 그제서야 본격적인 21세기 사회주의를 천명하게 된다. 사실 차베스가 얼핏 보기에는 장기 집권한 것 같지만 자기 구상(그 21세기 사회주의라는 것도 청사진이 명확했다고 보기에는 어렵지만)대로 정권을 온전히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넓게 잡아도 2005년 무렵 이후이고, 그 이후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야당의 반대와 대선 출마, 국민투표 등등을 모조리 돌파해야 했다.[71] 칠레 지하철 요금은 인상한 요금 기준으로 830페소(1370원)으로 한국과 비슷하지만 국민소득은 한국의 절반이고 실제 노동자들의 소득은 1/4 수준으로 낮아서 엄청나게 비싸다.[72] 더 놀라운 건 청소년기 M‐19 게릴라 출신이라는 것이다![73] 이러한 환경이 미국 특유의 반지성주의를 일으키는 부작용을 불러오기도 했으나 경제와 사회 발전 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가 매우 컸다.[74] 물론 여기에는 이들에 대항할 수 있던 세력도 있음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애초에 미국은 크게 보면 남부와 북부라는 2개의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상공업과 교육, 자영농에 기반한 북부가 남부와는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 그래도 남부의 지주에 대항할 세력을 만들었고 이들이 결국 남북전쟁에서 이겨 남부 지주들을 몰락시킨다.[75] 물론 이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대거 학살당했지만 이 점은 남북아메리카 모두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라틴아메리카는 메스티소라는 원주민 혈통이 어느정도 인구를 가졌지만 북미의 원주민들은 그런것도 아니다.[76] 물론 성직자 계급은 미국의 주류종교(개신교)와 남미의 주류종교(가톨릭)이 다르다는 점이 한몫 했지만 미국도 세일럼 마녀 재판 시기만 해도 관료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사들이 할거하여 종교왕국 비슷하게 있었다. 허나 세일럼 마녀 재판부터가 이런 신정주의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던 때에 마녀재판이라는 카드로 다시 회귀하려는 코튼 매더 목사의 선택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기에 남미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건국의 아버지들은 상당수가 프리메이슨 이신론자인 등, 그다지 신실하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77] 그나마도 식민지 시절에는 피부색보다는 종교를 더욱 중시한 (즉,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원칙적으로는 원주민도 신민으로 받아주는) 본국 정부에 의해서 이런 차별이 어느정도 자정되기라도 했지 독랩해서 본국 정부마저 없어지고 현지 백인들이 완전히 권력을 잡게 되자 이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78] 중남미 정치 세력들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던가 라틴아메리카 사례를 국내에 적용해야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좌파 정책이건 우파 정책이건 중남미에서는 그 정책 자체보다는 대지주 위주의 기득권 사회구조가 개선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많다.[79]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만도 한게 앞서 보듯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낼 수 있다면) 땅을 공짜로 주었고 그렇기에 지주에게 시달리면 그냥 멀리 이주해서 농부가 되면 그만이다. 그나마도 지주들도 남북전쟁 이후 몰락하고...(그리고 지주들이 있던 시기에는 남부보다 북부에 이민자가 더 많았다.) 즉 미국은 이민자가 선택할 길이 중남미에 비해 더 많았다. 캐나다는 추워서 미국보다 입지는 적지만 그래도 (이민자들 입장에서) 빈 땅은 많았다. 반면에 미국에 맞먹을 정도로 넒은 브라질은 의외로 농업에 불리한 땅이 대부분이다.[80] 정말 심각했던 것이 백인 정착지가 주로 동에서 서로 확대된 역사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미국과 캐나다는 적어도 국가가 분열될 위기는 미국에서 남북전쟁, 캐나다에서 퀘벡 독립운동 등 단 한건밖에 없는데 그란콜롬비아는 콜롬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까지 차지하고 있었는데 단합하지 못하고 내적 분열로 4개국으로 공중분해되었고,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해있던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역시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등 총 5개국으로 분열되었다.[81] 사실 미국도 독립운동이 따지고 보면 이런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수는 없지만 그래도 건국의 아버지들은 나름대로 새 국가에 대한 비전과 이상이 있었고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일례로 조지 워싱턴은 후대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3선을 권유받았음에도 2선까지만 하고 물러났다. 물론 이때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예시:노예제)이 후대에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을 일으켰지만 남미에 비해서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편이었다. 즉 미국은 그 나름대로의 건국명분은 있었고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상류층들이 많이 해먹긴 했지만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알겠지만 앤드루 잭슨잭슨 민주주의 이후로는 가문의 배경보다는 개인의 능력으로 자수성가한 대통령이 훨씬 많다.[82] 캐나다의 경우 원주민들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모피를 구매하고 총과 술을 팔아서, 캐나다인들과 교역하던 원주민들이 근처의 모피 자원이 고갈되면 이웃 부족들을 침략하게 되는 방식으로 수를 감소시켰다. 직접 원주민들을 쓸어버린 칠레, 아르헨티나나 원주민 사이의 전쟁을 유발한 캐나다나 뭐 결과는 똑같지만...[83] 거기다 그러면서 독립 이후에는 아즈텍이나 잉카, 마야, 마푸체, 과라니 같은 자신들이 속한 나라에 존재하였고 그들이 멸망시킨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과 부족들의 후예를 자처하기도 했다(...).[84] 헌데 이건 1999년 제헌의회 소집건이라면 모를까 2005년도 총선 때의 야권 보이콧은 그냥 야당의 자충수에 가깝다.[85] 하지만 2002-2003년도의 쿠데타 미수사건과 자본파업으로 까먹은 몫이 엄청나다보니 그만큼의 경제성장률을 까먹어서 실질적으로 그보다 높다.[86] 물론 비판하는 쪽에서는 미국이 평소 라틴 아메리카의 '후진성'을 비난하는 것을 답습한다는 평이 많았고, 실제로도 그런 내용이 많다.[87] 하버드 대학교에서 미일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은 매사추세츠 공대 역사학 교수인 존 다우어가 2017년에 쓴 책이다.[88] 물론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보다 미국의 내정이 훨씬 안정적이었기에 외세가 개입할 건덕지가 적었던 것에 가깝다.[89] 해방 이후부터 끈질기게 코노 수르와 카리브에서 영향력을 늘리려 시도했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지속적으로 충돌했다.[90] 아이티에게 독립으로 인한 손해 배상을 요구해 기어이 관철시켰고 멕시코 제국 건설을 시도하는 등 지속적으로 개입했다.[91] 스페인은 진지하게 이 지역을 자신들의 '국토'로 생각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다시 수복하려고 시도했다.[92] 독일은 통일 이후 카리브 해역에 식민지를 확보하려 시도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참전을 결정한 것도 독일의 신대륙 영향력 확보 시도로 인한 갈등이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폭발했기 때문이다.[93] 카리브 해역 일대에서 해적질을 하던 미국인들의 사설 무장 조직으로 의사 진행 방해 행위를 이 해적집단에 빗대서 부른 게 오늘날의 필리버스터라는 정치 용어가 되었다.[94] 아옌데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이 나오고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가 칠레 헌법에 의거한 법적 정당성을 어긴 적은 없었으며 그를 선거나 다른 법적 절차도 아닌 쿠테타로 숙청한 것은 당시 국제적으로도 손 꼽을 수준이었던 칠레의 민주주의를 탄압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옌데의 경제정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반사회주의 입장에서 봐도 당시 미국의 행동은 아옌데를 순교시키고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한계를 겪었을 사회주의에 정당성을 심어주는 행위에 불과했다.[95] 멕시코가 여전히 농업과 광업 같은 1차산업 종사 인구가 많은 국가인데도 미국과 캐나다의 농작물이 너무 싸게 들어와서 농민들이 큰 피해를 입는 상황이다.[96] 당장 에보 모랄레스를 축출한 볼리비아 쿠테타부터가 베네수엘라 쿠테타 계획과 똑같이 흘러갔다.[97] 그레나다 침공 당시 그레나다의 공산 정권은 과거 영 연방 소속이었던 점을 이용해서 영국과 캐나다의 지원을 받고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으며, 영국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라나다를 밟아버렸고 꽤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영국이 미국을 막을 힘이 없었고 미영 양국의 외교적 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에 묻혔다.#[98] 사실 한국도 직접 밟히지는 않았지만 12.12와 5.18은 미국의 묵인이 있었기에 일어날 수 있었다. 왜 미국이 나오는가 싶겠는데 4.19와 6월 민주항쟁 당시 독재정권이 무너진 것은 미국이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5.18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신뢰하던 민주세력들은 일부가 반미로 돌아서기도 했다. 물론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이라 함부로 건드리면 위험한 한국에서 중남미에 부린 것 같은 패권주의 패악질을 휘두른 건 아니고 1980년 당시 미국에 외교적인 여유가 없어 순종적인 전두환을 눈감아줬다는게 중론이다.[99] 다만 체 게바라가 쿠바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쿠바는 소련 편인 제2세계가 아닌 미국이나 소련편도 아닌 제3세계 진영에 있었을 거라 보기는 힘든 게, 냉전기의 미국을 상대할 수 있는 나라는 소련 뿐이었기에 국가의 존망을 생각한다면 소련에 대한 비난과는 별개로 소련과 외교적으로 거리를 두는 건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난 이후 쿠바의 경제가 상당히 힘들어졌으며, 쿠바보다 소련에 덜 의존적이던 북한도 고난의 행군이라는 위기를 겪었다. 물론 이러한 이유에는 미국의 경제제재도 한몫하지만, 소련의 원조 및 경제협력도 상당부분 경제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100] 하나 더 덧붙이자면 체 게바라는 흐루쇼프 당시 소련의 정치경제학 편람을 비판하며 이 따위로 하다가는 자본주의로 회귀할 것이라고 예언할 만큼 반수정주의 경향이었고 당시 소련은 평화공존론을 내세우며 중국과 수정주의 논쟁 중이었다. 중국은 아직 미국과 데탕트에 들어가기 전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