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01:09:51

페닌술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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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페닌술라르에게 혜택이 주어졌던 이유3. 종말4. 크리오요와의 차이점

1. 개요

스페인 식민지의 인종별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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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닌술라르
(이베리아 반도 출신 귀족)
크리오요(=크레올)
(페닌술라르의 후예)
메스티소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
물라토
(백인과 흑인의 혼혈)
인디오(=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 흑인 노예
스페인어식민제국 시절 식민지 특권층을 부르던 단어.[1]

스페인미국 서부/서남부/동남부 및 라틴아메리카아메리카 신대륙 식민지를 다스리면서 유럽인과 원주민 혈통을 구분하면서 만든 계급 중의 하나로, 이베리아 반도(Península ibérica)에서 태어난 백인들을 말한다. 직역하면 "반도인"으로 여기서 반도는 당연히 스페인 본국을 뜻한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들은 따로 크리오요로 불렸으며 페닌술라르와 구분되는 보다 낮은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시절 라틴아메리카에서 개개인의 지위는 신분과 혈통, 그리고 어떤 모유를 마시고 자랐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여기서 인디오 유모나 흑인 유모의 모유는 순수하게 유럽적이지 않은 문화화를 상징한다.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350~1750

식민지의 주요 고위직, 특혜들이 다 페닌술라르 계층에게 할당되자 유럽인 혈통임에도 단지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식민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당한 크리올 계층이 혁명을 일으켜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아프리카에 식민지가 많았던 포르투갈의 경우 백인이 우대를 받기는 했어도 스페인처럼 엄격하게 페닌술라르와 크리오요를 구분하지는 않았다. 포르투갈의 인도 식민지와 봉신국 호르무즈 왕국의 주민들은 포르투갈 유럽 본토 주민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부유한 것도 있고 해서,[2] 함부로 이런 차별 제도를 만들기 힘들었다.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스페인어가 주요 언어로 자리매김한 것과 반대로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 내에서는 포르투갈어가 일반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상황이 아니었고, 이런 상황에서 포르투갈은 식민지 현지인들이 포르투갈어를 알건 모르건 가톨릭으로 개종만 하면 인종이나 언어 문제 따지지 않고 바로바로 군인이나 선원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2. 페닌술라르에게 혜택이 주어졌던 이유

페닌술라르를 우대하는 제도는 원래 스페인인 귀족들이 신대륙에 오는 것을 싫어해서 유인책으로 특혜를 주기 위해 만든 개념이었다. 19세기 이후 황열병말라리아 치료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들도 사망률이 엄청나게 높았는데,[3][4] 아무 재산도 없는 부랑자 출신 군인이나 선원, 혹은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 없는 하급 귀족 차남, 삼남이면 모를까... 중요한 노다지 식민지에 관료로 쓸 신하들을 별 다른 보상도 없이 보낸다면[5] 무슨 귀양보내는 것도 아니고 식민지에서 반란을 획책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식민지 가서 왕처럼 살아봐라, 근데 거기서 황열병 같은 거 걸려서 죽어도 우리는 모른다."는 식으로 "페닌술라르"라는 감투를 붙여서 보내준 셈이다.

스페인의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 등등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스페인 군인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들(메스티소)이 많았는데,[6] 반도에서 온 관료들과 이들 사이에서는 위계질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페닌술라레스를 우대하는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식민지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면서 현지에서 원주민이나 흑인과 혼혈되지 않은 순혈 백인들이 출산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백인 혈통이 7/8 정도 되어서 외양이 여타 백인들하고 잘 구분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냥 백인으로 취급되었다. 식민지 출생 백인들과 스페인 본토에서 온 백인들 사이에서도 위계 질서가 형성되면서 페닌술라르와 크리오요 역시 서로 다른 계급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상술한 것처럼 페닌술라르들이 가정을 꾸리거나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눌러앉으면 후손들은 순혈 유럽인이라도 크리오요가 되어버리므로 부인을 데려온 사람들의 경우 임기가 끝나면 대다수가 귀국을 택해버렸다. 스페인 제국 정부 입장에서는 파견보낸 관료들이 식민지에서 세습 군벌 왕조를 세우는 것도 막고 일석이조의 효과였다.[7] 물론 인간사가 종종 그렇듯이 미혼 상태로 왔거나 본국에 부인을 두고 온 경우, 당시 인터넷이나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현지처를 두어 임신시키고 본국으로 도망가서 연락을 두절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크리오요 중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인 후아나 데 아스바헤 수녀[8]가 이렇게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스페인에서 식민지로 파견된 스페인인들이 다 귀족 관료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항해시대 당시 선원 일은 매우 고된 것은 물론 사망률이 매우 높은 직업이었고, 스페인의 항구도시 세비야고아원에서 자라난 남자아이들은 8살(!) 정도가 되면 선원으로 투입되었는데, 식민지 본토에서 귀족처럼 으스대던 크리오요들 입장에서 자신들이 스페인에서 온 이런 문맹 서민들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자 불만을 품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스페인 제국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상술한 문제 이외에도 인력 보급 문제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웃나라 포르투갈의 경우 본토에서 식민지로 파견되는 사람들은 스페인과 같은 특혜가 없어서, 유럽 본토에서 파견된 병사들이 심지어 식민지에서 현지인들에게 구걸을 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받아낼 정도였고, 이렇게 푸대접받던 선원들과 병사들이 금방 소모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러다보니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급격히 소모된 인력을 다시 보충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국 전성기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밀려난다. 반면 스페인의 경우 가장 수익성이 좋았던 태평양 갈레온 무역에서 갈레온 선원 중 2/3 이상은 식민지 출신, 1/3 정도는 스페인 본토 출신으로 채웠는데 어릴 때부터 배를 타서 숙련된 스페인인 선원들에게는 배급 우선권이 주어졌고, 필리핀인 전쟁포로가 중심이 되는 미숙련 선원들에 비해 항해 도중 사망률도 낮았다. 숙련된 선원의 사망률이 낮아지면 운수 비용이 절감되는 것은 물론이다.

3. 종말

라틴아메리카의 은 광산들이 과도한 채굴로 서서히 고갈되고 영국이 스페인 대신 중국의 주요 무역 파트너로 부상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단 페닌술라르도 식민지에서 자녀를 출산하면 그 자녀는 크리올로 취급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크리오요들이 모순과 불만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19세기 초에는 스페인 본토가 나폴레옹에게 유린당하면서 유럽에서 파견된 페닌술라레스들의 권위 역시 과거와 다르게 크게 실추되었다. 크리오요들 역시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키고 차례차례 독립에 성공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도 있는데 크리올 백인에 의한 독립으로 독립국 지배층만 페닌술라르에서 크리올로 넘어갔으며 원주민과 흑인, 원주민 혈통이 짙은 혼혈인들은 여전히 억압과 차별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9]

여담으로 라틴아메리카 내륙 식민지들이 독립한 이후 쿠바의 상황을 보면, 페닌술라르와 크리오요 사이의 갈등과 전쟁은 필연적이기는 했다. 19세기 중후반 들어서 말라리아 약이 보급되고 스페인, 이탈리아의 빈농들이 쿠바 등지로 활발하게 이주가 시작되기 시작했는데도 불구, 다시 말해서 더 이상 페닌술라르들에게 특혜를 줄 이유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식민지 내에서 페닌술라르에 대한 혜택은 계속되었다. 최종적으로 19세기 말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스페인이 쿠바를 상실하면서, 페닌술라르라는 신분계급은 과거의 유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4. 크리오요와의 차이점

간단하다. 크리오요는 스페인 본국이 아닌 식민지인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백인 혈통의 주민들을 일컫는다. 쾌걸 조로의 주인공 돈 디에고 데 라 베가가 멕시코 태평양 연안인 캘리포니아 식민지에서 태어난 크리오요였다. 그러나 거기 나오는 주둔군 소속 곤잘레스 중사, 가브리엘 소위, 레이몬드 소령, 지킬 대위 등의 스페인 군인들은 전원 스페인에서 태어나 자랐다 식민지에 배치된 페닌술라르였다.

크리오요가 공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페닌술라르에게 비판을 가하는 행동은 엄연히 하극상으로 치부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서 총애를 받았던 수녀 후아나 데 아스바헤(크리오요 출신)가 스페인 본토의 비에이라 신부와 싸움이 났는데, 감히 크리오요 출신 수녀가 스페인 본토의 고위 성직자를 여러 차례 비판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면서 후아나는 책을 압수당하고 여생 동안 학문 연구가 금지당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


[1] 복수형은 페닌술라레스(Peninsulares).[2] 대항해시대 당시에도 포르투갈 본토 주민들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에 비해 훨씬 더 못살았다.[3] 초창기 파나마 식민지의 경우 수십 년 동안 질병으로 스페인인 사망자 4만여 명이 발생해서 완전 실패했고, 그다음에 스코틀랜드인들 역시 다리엔 갭 개발을 시도했으나 거의 다 질병으로 죽으면서 완전 실패했던 바 있다.[4]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로 19세기 초 아이티 혁명을 진압하러 간 유럽 출신 프랑스군이 정작 전투 사망자는 적었으나 황열병 때문에 10% 정도만 남고 전멸했던 경우가 있다.[5] 보통 그 정도 계급의 관료들은 스페인 본토의 토지나 저택과 같은 재산을 적어도 몇년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니...[6] 오늘날 메스티소들의 하플로그룹 분석 결과 부계 유전자는 스페인계가 많고 원주민계가 드물었지만 모계 유전자에는 스페인계가 드물고 원주민계 유전자 비율이 압도적이라고 한다.[7] 중세 압바스 칼리프조몽골 제국이 해체된 이유도 지방에 파견된 관료들이나 장수들이 현지에서 세습 왕조를 세우고,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면서 거대한 제국이 시나브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럽 본토 사이에 거대한 대서양을 끼고 있고 유럽과의 거리가 상당히 먼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라면 이런 위험이 더 컸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8] 멕시코 페소 화폐에도 나오는 위인이다. 바스크인 남성과 누에바에스파냐 유력 가문 처녀 사이에서 혼외자녀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후아나를 임신한 이후 아버지와 연락이 두절되었다 한다.[9] 이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극소수 백인이 부를 독점하고 대부분의 혼혈인과 약간의 원주민/흑인 등은 사회 하층민으로 사는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현재 라틴아메리카 국가 대부분이 빈부격차 문제가 심각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자세한 사항은 크리올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