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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기우스

성인
레미기우스
Remigius
파일:레미기우스.jpg
<colbgcolor=#f9ecd5><colcolor=#4b494c> 출생 437년경
로마 제국 갈리아 관구 피카르디아 세르니앙랑누아
사망 533년 1월 13일 (향년 95~96세)
프랑크 왕국 샹파뉴 랭스
종교 기독교
직업 성직자(주교), 법조인
재임 기간 제14대 랭스교구장 주교
459년~533년 1월 13일
초대 프랑크 왕국 대법관
496년~533년 1월 13일
성인명 레미지오[한국가톨릭]
[언어별 명칭]
라틴어: 레미기우스 (Remigius)
영어: 레미지어스 (Remigius)
프랑스어: 레미 (Remi)
독일어: 레미기우스 (Remigius)
스페인어: 레미히오 (Remigio)
이탈리아어: 레미지오 (Remigio)
상징물 비둘기, , 등불
축일 1월 13일[2]
1월 15일[3]
10월 1일[4]
10월 14일[5]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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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가톨릭 랭스대교구장
13대 14대 15대
벤나기우스 (?~459년) 레미기우스 (459년~533년) 로마누스 (533년경~5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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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랭스의 주교가 되다2.2. 클로비스 1세의 세례2.3. 로마 교회를 위한 공헌과 죽음
3. 기타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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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크족의 사도
Apostolus Francorum
프랑스주교, 법조인, 선교사.

당시 프랑크 왕국의 국왕 클로비스 1세를 세례해 개종시킴으로써 서유럽 지역에 만연했던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몰아내고 로마 교회의 정통파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는 데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가톨릭, 정교회, 그리고 성공회에서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가톨릭 축일은 1월 13일, 성공회 축일은 10월 1일, 정교회 축일은 10월 14일이다.

2. 생애

2.1. 랭스의 주교가 되다

레미기우스는 437년경 프랑스 북서부 피카르디 지방의 세르니앙랑누아(Cerny-en-Laonnois)에서 갈리아족 출신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밀리우스(Aemilius)는 랑(Laon) 지역의 백작이었고 어머니는 킬리니아(Cilinia)[6]수아송교구 주교의 딸이었다.

유복한 가정 환경 덕분에 일찍이 랭스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레미기우스는 학식이 뛰어나고 성덕이 높은 것으로 주변 유력가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불과 21살인 459년에 랭스교구 주교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70년 이상 자신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며 당시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었던 프랑크족을 로마 교회의 정통파 기독교로 개종시키고자 힘을 썼다.

2.2. 클로비스 1세의 세례

496년 당시 프랑크 왕국을 다스리던 국왕 클로비스 1세는 레미기우스의 유능함을 알아보아 그를 메로베우스 왕조의 왕국 대법관으로도 임명했다. 왕 다음으로 최고 권력을 거머쥔 레미기우스는 이를 발판 삼아 프랑크족의 복음화에 더욱 더 노력을 기울였고, 국왕의 아내이자 독실한 로마 교회 신자였던 클로틸데도 그 모습에 감명을 받아 그를 도와주었다. 또한 그는 프랑크족이 로마 교회로 확실히 전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우두머리인 클로비스 1세의 개종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그의 의중에 동감을 한 왕비 클로틸데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남편에게 하느님을 인정하고 우상을 버리라고 권했다. 그러던 497년 클로비스 1세가 톨비악(Tolbiac) 지역에서 알레만니와의 전투 중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하고 전세가 갈수록 불리해지자 그는 하늘을 향해 “만약 당신이 나에게 이 적들에 대한 승리를 허락한다면, 나는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받겠다”라고 서약했다. 이후 그는 기적적으로 알레만니를 격파하는 데 성공해 이것이 정녕 아내가 믿는 신의 가호임을 믿게 되었다.
파일:클로비스1세의세례.jpg
클로비스 왕을 세례하는 레미기우스 (Remi baptisant Clovis)
생질의 장인 作, 영국 국립미술관
왕궁으로 돌아온 클로비스 1세는 레미기우스에게 세례를 부탁했고, 이에 레미기우스는 498년 12월 25일 성탄절에 국왕을 포함한 3,000명의 프랑크족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 이들을 개종시켰다. 참고로 9세기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클로비스 1세의 세례식 때 흰 비둘기 모습을 한 천사가 레미기우스에게 하늘에서 가져온 성유병을 가져다주었고, 이를 건네받은 레미기우스는 국왕의 이마에 그 성유를 발라 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클로비스 1세는 구약 시대의 왕들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왕이라는 전설이 생겼고, 이를 기점으로 프랑스에서는 국왕 즉위식 때 이 거룩한 기름을 바르는 도유식이 거행되었다.

2.3. 로마 교회를 위한 공헌과 죽음

클로비스 1세의 세례성사 이후 레미기우스는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로마 교회 전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탁월한 행정가이자 선교사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던 레미기우스는 로마 교회와 교리의 수호자로서 아리우스파를 적극적으로 몰아냈고, 어느 아리우스파 주교를 회개시키기도 했다. 그는 또한 당시 교황 심마코의 허가와 클로비스 1세의 도움을 받아 투르네(Tournai), 캉브레(Cambrai), 테루안(Thérouanne), 아라스(Arras), 랑(Laon) 지역에 교구를 설립했다. 499년 그는 테루안교구의 초대 주교를 임명했으며 랑교구는 자신의 조카의 남편이었던 군반트(Gunband)에게 맡겼다.
파일:레미기우스묘지.jpg
레미기우스의 석관
레미기우스는 533년 1월 13일 100년에 가까운 긴 삶을 마치고 랭스에서 편안히 선종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그의 지위에 걸맞은 장례식을 치렀고 레미기우스의 유해와 유품은 랭스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882년 바이킹이 프랑크 왕국 일대를 침략하자 그의 유해와 유품은 잠시 에페르네(Épernay) 지역의 생피에르도르베 수도원(Abbaye Saint-Pierre d'Orbais)으로 옮겨졌고, 이후 1099년 랭스 대성당 근교에 있는 생레미 수도원(Abbaye Saint-Remi)으로 한 차례 더 옮겨져 현재까지 남아 있다.

3. 기타

  • 1793년 10월 7일에 레미기우스의 유해와 유품이 안치되어 있는 묘지가 프랑스 혁명 주동자들에 의해 한 번 훼손된 적이 있었는데, 묘지의 상징성이 프랑스 왕조와 깊게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4. 관련 문서



[한국가톨릭] [2] 가톨릭 축일.[3] 프랑스 가톨릭 축일.[4] 가톨릭 랭스대교구, 성공회 축일.[5] 정교회 축일.[6] 훗날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축일은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