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2986,#000000><colcolor=#fff,#dddddd> 제69-79대 미합중국 상원의원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 Robert M. La Follette Jr. | |
본명 | 로버트 마리온 라폴레트 주니어 Robert Marion La Follette Jr. |
출생 | 1895년 2월 6일 |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 | |
사망 | 1953년 2월 24일 (향년 58세) |
미국 워싱턴 D.C. | |
재임기간 | 연방상원의원(위스콘신 클래스 1) |
1925년 9월 30일 ~ 1947년 1월 3일 | |
선수 | 4 |
대수[1] | 68, 71, 74, 77 |
정당 | (1934년 이전까지) (1934년~1946년) (1946년 이후) |
가족 | 로버트 M. 라폴레트 (아버지) 필립 라폴레트 (남동생) |
학력 | 위스콘신 대학교 (중퇴, 명예 법학박사) |
배우자 | 레이첼 윌슨 영[2] |
자녀 | 조지프 오든 라폴레트 (장남) 브론슨 커팅 라폴레트 (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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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로버트 M. 라폴레트의 아들로, 미국 연방상원의원 직을 역임했으나 1946년 위스콘신 연방상원의원 경선에서 조지프 매카시에게 석패한 뒤 1953년 총으로 자살하였다.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위스콘신 주 매디슨에서 로버트 M. 라폴레트와 벨 케이스 라폴레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로버트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법조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후 아버지의 모교인 위스콘신 대학교 법학과에 다녔지만, 1917년 연쇄상구균에 심하게 걸리는 바람에 결국 대학을 중퇴했으며 똑같은 이유 때문에 1차대전에 참전한 미국이 징병제를 실시하는 와중에도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다.[3]연쇄상구균이 완치된 뒤엔 연방상원의원 3선 임기를 지내고 있던 아버지의 수행비서로 1919년부터 일하면서 정치를 배웠으며,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선 진보당 후보로 출마한 아버지의 선거유세를 도왔다. 이후, 1925년 폐렴으로 사망한 라폴레트의 의원직을 이어받았다.[4]
2.2. 상원의원
위스콘신 연방상원의원이 된 이후, 라폴레트 주니어의 최대 관심사는 노동운동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노조 및 인권운동에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그 덕분에 공화당 진보파 사이에서 빠르게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1928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 것은 물론 3선에도 성공했으며, 특히 3번째 임기를 시작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집권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는 서로 다른 정당 소속인데도 죽이 매우 잘 맞아 금주법을 폐지하고 뉴딜 정책을 실시하는 등 FDR 행정부가 정책을 수행하는 데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다.1931년부터 주지사 임기를 시작한 동생 필립 라폴레트 또한 그의 위스콘신 개혁을 도왔다. 비록 필립은 주지사직을 2번으로 나눠 수행하긴 했지만 중간에 주지사직을 역임한 앨버트 G. 슈메데만 또한 성향이 비슷한 뉴딜 민주당원이었기 때문에 위스콘신의 정책 기조는 일관성을 띠었고, 이는 자유주의 공화당 소속인 줄리어스 P. 헤일이 주지사로 취임하는 1939년 이전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국구 단위로 활동하기보단 위스콘신의 진보주의자들을 더욱 결집시키기 위해 1934년 위스콘신 진보당을 창당했으며, 1936년에는 아버지의 진보당을 해산하고 위스콘신 지역당원들을 자신의 당으로 합류시키기도 했다.
필립이 주지사로 활동하는 동안, 라폴레트 주니어는 동생에게 위스콘신의 내정을 맡겨놓고 본인은 주로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설립된 원내 인권 전문 위원회인 '라폴레트 시민자유 위원회(La Follette Civil Liberties Committee)'에서 활동했으며, 제너럴 모터스를 비롯한 여러 기업들이 자사 노조에 침투시킨 프락치들로 노조원들을 분열시키려 획책한 사실을 조사하고 전국노동관계법에 기반해 노동자 근로여건을 향상시키는 데 몰두했다.
한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라폴레트 주니어는 원내에서 대표적인 강경 고립주의자로 꼽혔으며, 이는 FDR 집권 이후 민주당이 발의한 모든 법에 찬성표를 던지다가 1938년 해군법에 처음으로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표출되었다. 하지만 2차대전 발발 이후에도 꾸준히 고립주의 성향을 보인 그와 달리, 동생 필립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빠르게 고립주의를 포기한 뒤 육군에 자원입대,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로 근무했고 심지어는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맥아더의 공화당 후보 지명을 지지하는 모습까지 보였기에 서로간에 의견 차이로 인한 불화를 겪게 되었다.
2.3. 5선 실패와 자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사망하고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위스콘신에서 상원의원직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 라폴레트 주니어는 위스콘신 진보당을 해산하고 당원들과 함께 공화당 지역당에 동반 입당했다. 말년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인권 문제 때문에 반소 성향을 띠던 그는 1946년 위스콘신 연방상원의원 경선에서 반공주의적 진보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선거유세를 실시했으며 실제로 가장 유력한 경선후보로 꼽혔지만, 막판 맹추격을 해온 조지프 매카시에게 단 5천 표 차이로 패배를 겪었다.1946년 경선은 라폴레트 주니어와 매카시 양측이 서로를 용공주의자라고 비난하는 흑색선전이 판치는 완전한 진흙탕 싸움이었으며, 이전까지 압도적 득표율을 보태주던 진보당 지지자의 상당수가 진보당-공화당 합당에 실망해 지지를 포기했다는 사실이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충격을 받은 라폴레트 주니어는 1952년에 있을 다음 상원의원 선거를 포기하고 트루먼 행정부의 해외원조고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선 과정 및 결과 때문에 우울증을 앓게 된 라폴레트 주니어는 급기야 주요 노조들에서 소련의 프락치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자신 주위에도 소련의 스파이들이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을 앓게 되었으며, 이후 매카시가 자신을 상대로 여러 부정부패 의혹을 제기하며 표적 수사를 추진하기에 이르자 극심한 신경쇠약 끝에 총기자살을 선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은 뒤인 1953년 9월 9일 매카시의 상임조사위원회에서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이 정체를 숨기고 라폴레트 밑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그의 피해망상 중 일부가 사실이었음이 드러났다.
3. 여담
- 아버지인 로버트 M. 라폴레트가 '싸우는 밥(Fighting Bob)'으로 불렸던 것에서 따온 '젊은 밥(Young Bob)'이라는 별명이 존재했다.
- 연방대법관 필릭스 프랭크퍼터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딴 시민자유위원회를 이끌게 된 것도 원래는 의정 활동이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려 했지만 프랭크퍼터가 다른 적임자가 없다며 끈질기게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이외에도 정말 의외이지만 초강경 보수주의자로 일명 '미스터 공화당'이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던 로버트 A. 태프트와도 절친이었다. 상원의원직을 역임하면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강경 고립주의 성향의 소유자였던 태프트와 급격히 친해졌으며, 이 때문에 1946년 위스콘신 상원의원직을 놓고 벌어진 공화당 경선에서 보수파에 속하는 태프트와 맥아더가 진보파의 거두인 라폴레트 주니어를 지지한 반면 자유파 소속으로 미네소타의 개혁을 이끈 해럴드 스타센이 반공주의를 이유로 매카시를 지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 열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던 다른 가족들과 달리 유약하고 겁이 많으며 소심한 성격이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가 죽고 위스콘신 상원의원직을 물려받을 사람을 결정할 당시 부드러운 언행을 중재자의 자질로서 높게 평가받아 낙점될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아버지와 같은 카리스마가 없다며 실망한 많은 지지자가 동생인 필립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 반영주의자였다. 영국이 각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배를 행하는 모습을 매우 좋지 않게 보았으며, 이 때문에 2차대전 발발 이후 미국이 무기대여법을 통해 영국을 지원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2차대전 이후엔 인기가 더 떨어졌다.
- 본인은 공화당원 계열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민주당과 훨씬 가까웠으며, 아들인 브론슨 커팅 라폴레트는 아예 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 아내인 레이첼 윌슨 영과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인 사이였으며, 그가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멜 때에도 곁을 지켰고 먼 캘리포니아로 요양을 떠날 때에도 연심을 유지했지만 정치만큼은 하지 말라며 계속해서 뜯어말렸다고 한다. 연애를 10년 넘게 할 정도로 금슬이 좋았는데도 결혼은 1930년에야 뒤늦게 한 것도 이러한 의견차가 작용했다는 모양이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25 |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5] | 위스콘신 | | 237,719 (67.51%) | 당선 (1위) | 초선 |
192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635,376 (85.57%) | 재선 | |||
193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 440,513(47.78%) | 3선 | ||
194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605,609 (45.26%) | 4선 |
[1] 출처[2] 1930년 결혼.[3] 단순히 징집 기피를 위한 것은 아닌 게,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부터 이미 여러 병치레를 하고 있어 1915년에 치료를 받았으나 실패했고, 1917년에 이르면 목에는 연쇄상구균이 심하게 감염되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신장 합병증, 심장의 부담으로 몸 전체에 혈액이 잘 돌지 않으며 심하게 부어오르는 등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라폴레트 주니어와 그의 어머니인 벨 케이스는 다른 가족들과 떨어져 강제로 캘리포니아의 라 호야(La Jolla)에서 수 년간 요양생활을 해야 했다.[4] 원래는 어머니이자 저명한 인권운동가인 벨 케이스 라폴레트에게 의원직 제의가 먼저 갔지만 그녀가 사양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만약 벨 케이스 라폴레트가 의원직을 승계했다면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연방상원의원이 되었을 것이다.[5] 임기가 2년인 하원 의원과 달리 상원 의원은 임기가 6년인지라 1922년 4선에 당선한 아버지 로버트 M. 라폴레트 임기는 1928년까지였다. 그러나 1925년 갑자기 사망하자, 남은 임기기간을 두고 보궐선거로 무소속 공화당(Independent Republican)의 Edward Dithmar와 경합 및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