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벤틀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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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12대 |
첼시 FC 역대 주장 | ||||
존 해리스 (?~?) | → | 로이 벤틀리 (1953~1956) | → | 켄 암스트롱 (1956~1957) |
잉글랜드의 前 축구 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로이 벤틀리 Roy Bentley | |
본명 | 로이 토머스 프랭크 벤틀리 Roy Thomas Frank Bentley | |
출생 | 1924년 5월 17일 | |
잉글랜드 브리스톨 샤이어햄튼 | ||
사망 | 2018년 4월 20일 (향년 93세)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선수 (공격수, 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브리스톨 시티 FC (1939~1946)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46~1948) 첼시 FC (1948~1956) 풀럼 FC (1956~1960)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1960~1962) |
감독 | 레딩 FC (1963~1969) 스완지 시티 AFC (1969~1972) | |
국가대표 | 12경기 9골 (잉글랜드 / 1949~1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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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1948년부터 1956년까지 첼시에서만 8년을 뛰었으며 주장 완장을 달고 첼시의 첫 리그 우승을 견인한 레전드이다.
2. 생애[1]
2.1. 선수 경력
2.1.1. 클럽
2.1.1.1. 초창기
벤틀리는 브리스톨 시티 FC 소속 유스 선수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그의 선수 커리어도 일시정지되었다. 벤틀리는 2차 대전 말기에 영국 해군에서 복무했고 전쟁이 끝나면서 1946년에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뉴캐슬에서 벤틀리가 머무른 시간은 2년도 안되었지만 그는 재키 밀번 등과 팀의 핵심 포워드로 활약했다. 1946-47 FA컵에서 뉴캐슬은 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찰턴에 0-4로 패해 결승 진출은 하지 못했다.
2.1.1.2. 첼시 FC
벤틀리는 1948년 1월, 11,000파운드의 이적료로 뉴캐슬에서 첼시에 합류했다. 이 이적에는 벤틀리의 건강 문제도 영향이 있었는데 벤틀리는 가끔 폐질환으로 고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벤틀리는 의사로부터 뉴캐슬어폰타인보다는 남부쪽에서 거주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고 폐질환 치료를 위해 첼시 이적을 선택했다.벤틀리는 첼시 이적으로 1947년에 팀을 떠났던 토미 로튼을 대체하게 되었지만 극초반기에는 팀 전술에 적응이 잘 안되어서 로튼에 비해 활약이 저조하다는 폄하를 받기도 했다. 그는 이적 첫 시즌에 15경기에 출전해서 3골을 넣었다.
다음 시즌인 1948-49 시즌부터 로이 벤틀리는 센터 포워드보다 조금 더 깊게 내려가서 뛰며 상대 수비수들을 긴장하게 했고 정기적으로 골 찬스를 만들어냈다. 그는 이 시즌에 23골을 넣었고 잉글랜드 대표팀에도 발탁되었다.
1949-50 FA컵 8강전에서 벤틀리는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2대0으로 꺾는 데에 공헌했다. 그러나 첼시는 4강전에서 재경기끝에 아스날에 0대1로 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1951-52 FA컵 준결승에서 첼시는 다시 아스날을 만났고 이번에도 재경기까지 치렀지만 아스날에 0대3으로 또 졌다. 1952년, 첼시의 새 감독으로 아스날의 레전드였던 테드 드레이크가 부임했고 1953년부터 벤틀리는 클럽의 주장이 되었다.
벤틀리는 첼시가 처음으로 1부 리그 챔피언이 된 1954-55 시즌에 주장과 골을 넣는 선수로 양쪽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리그 선두 경쟁을 하고 있던 울버햄튼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4-3으로 승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그리고 첼시가 벤틀리의 친정팀 뉴캐슬을 4-3으로 물리쳤을 때는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
그러나 첼시는 다음 시즌에 리그 타이틀을 지켜내기는커녕 16위로 순위가 미끄러졌다. 이에 드레이크 감독이 노화된 스쿼드를 개편하려 시작하자 1956-57 시즌 초반에 4경기를 더 뛰고 첼시를 떠났다.
2.1.1.3. 이후
벤틀리는 1956년 9월, 이웃 팀 풀럼과 계약했고 풀럼에서 포지션을 수비수로 변경했다. 1957-58 FA컵에서 풀럼은 4강까지 올라갔지만 여기서도 재경기끝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3-5로 패했다.벤틀리는 1960년, 풀럼을 떠나 QPR의 선수가 되었고 남은 선수 경력을 그곳에서 보냈다.
2.1.2. 국가대표
벤틀리는 1949년 5월 13일, 스웨덴을 상대로 삼사자 군단에 데뷔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스웨덴 원정에서 1대3으로 패했다.벤틀리는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3]에서 잉글랜드의 마지막 경기였던 1950년 4월 15일의 스코틀랜드전에 출전했다. 진출팀은 이미 확정된 조 1위 결정전에서 잉글랜드는 후반 19분에 터진 벤틀리의 대표팀 마수걸이 골이자 선제 결승골로 조 1위를 확정짓고 브라질에 가게 되었다.[4]
벤틀리는 1950년 월드컵에서 칠레전과 미국전, 2경기에 출전했지만 득점을 올리지 못했고 잉글랜드는 미국에 패하고 스페인에게도 패해 결선 리그에 진출 실패하는 대망신을 겪게 되었다.
벤틀리는 1954년 월드컵 출전 명단에 들지 못했지만 1954년 11월,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대표팀 경력 유일한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
벤틀리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의 6년간 12경기 출전, 9득점의 기록을 남겼다.
2.2. 감독
벤틀리는 레딩과 스완지의 감독직을 맡기도 했다. 벤틀리는 두 팀에서 감독으로 494전 202승, 통산 승률 40.9%를 올렸다.2.3. 이후
벤틀리는 1980년대 후반에 에식스주 치그웰에서 살다가 2014년, 버크셔주 레딩으로 이사했다.2018년 4월 20일 한국시간 새벽 1시경 벤틀리의 부고가 올라왔다. 향년 93세. 4월 4일에 세상을 떠난 레이 윌킨스에 이어 첼시의 굵직한 레전드가 타계했고 첼시 선수들은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를 뛰며 그들의 레전드를 추모했다.
벤틀리는 잉글랜드 대표팀이 처음 출전한 월드컵 멤버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벤틀리는 1950년대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딥라잉 포워드 또는 폴스 나인의 역할을 했다. 이는 동시대에 유명했던 센터 포워드 히데그쿠티 난도르와 유사한 플레이 스타일이었으며 벤틀리는 헤더와 슈팅 파워에서 강점을 보였다.벤틀리는 첼시의 역사를 통틀어 프리미어 리그를 포함한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을 이뤄낸 세 명의 주장 중 한 명이다.[5] 벤틀리는 367경기 150득점으로 첼시 역사에서 득점랭킹 5위에 머무르고 있으며, 클럽에서의 8시즌내내 팀 내 최고 득점자였다. 그래서 그가 사망한 지금도 첼시 구단과 팬들에게 레전드 대우를 받고 있으며 생전에 스탬퍼드 브리지에 방문하면 매우 큰 환영을 받았다.
4. 사생활[6]
바이올렛 업튼과 1946년에 결혼해 두 명의 딸을 두었다.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 잉글랜드 퍼스트 디비전 우승 1회: 1954-55(첼시 FC)
[1] 출처: 위키백과, 트랜스퍼마크트, 11v11[2] 울버햄튼은 이 시즌 2위에 올랐다.[3] 당시 FIFA는 잉글랜드를 포함한 영국팀들을 월드컵에 참가시키기 위해 홈 네이션 4개국끼리만 예선을 치른 후, 그 중 상위 2개국을 월드컵에 진출시켜준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4] 스코틀랜드는 조 1위가 아니면 월드컵에 안 가겠다며 쓸데 없는 고집을 부렸고 진출이 가능했음에도 정말로 브라질에 가지 않았다.[5] 벤틀리 이후 존 테리, 게리 케이힐이 주장으로서 우승했다.[6] 출처: 텔레그라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