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21:20:15

루이즈 쥘리 드 마이넬

프랑스 메트레상티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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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1B384><colcolor=#000000> 마이 백작부인
루이즈 쥘리 드 마이넬
Louise Julie de Mailly-Nesle, Comtesse de Mailly
파일:Louise_Julie_de_Nesle,_Comtesse_de_Mailly_by_Alexis_Grimou.jpg
이름 루이즈 쥘리 드 마이넬
(Louise Julie de Mailly-Nesle)[1]
출생 1710년 3월 16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751년 3월 30일 (향년 41세)
프랑스 왕국 파리
배우자 마이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 드 마이
(1726년 결혼 / 1743년 사망)
아버지 오라녜 공 루이 드 마이
어머니 아르망드 펠리스 드 라 포르트 마자랭
형제 폴린 펠리시테, 디안 아델라이드, 오르탕스 펠리시테, 마리 안

1. 개요2. 생애3. 자매들
3.1. 폴린 펠리시테3.2. 디안 아델라이드3.3. 오르탕스 펠리시테3.4. 마리 안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의 애첩이자 마이 백작부인.

루이 15세의 첫 공식 정부였지만 이름은 그리 유명하지 않다. 대신 다른 의미로 유명한데, 그녀와 그녀의 세 자매가 차례로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었다. [2]

2. 생애

루이즈 쥘리는 유서깊은 마이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넬 후작으로 루이 14세 때 오라녜 공에 봉해졌다. 어머니인 아르망드 펠리스는 잉글랜드찰스 2세의 정부였던 오르탕스 만치니의 외손녀로, 프랑스의 재상 쥘 마자랭의 먼 친척이었다. 아르망드 펠리스는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시녀로 일했다.

1726년에 친척인 마이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와 결혼했다. 하지만 부부는 애정이 없었고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했다. 1729년에 어머니 아르망드가 세상을 떠나자 루이즈 쥘리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왕비 마리의 시녀로 들어갔다. 루이즈 쥘리는 플뢰리 추기경을 뒷배로 루이 15세를 소개받게 되었다. 플뢰리 추기경이 그녀를 민 이유는 당시 그가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것을 경계하는 동시에 불안 증세가 있는 루이 15세의 눈을 돌릴 필요가 있었는데, 때마침 예쁘장한 왕비의 시녀가 적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1733년에 루이즈 쥘리는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정부가 된 것은 1738년이 되어서였다.

당시 궁중 사람들은 대놓고 쥘리가 왕의 정부가 될 만한 미색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루이즈 쥘리는 화제거리가 되는 걸 질색해 뒤에서 조용히 왕을 모시고 싶어했다. 성실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그녀는 왕의 정부가 되었다고 뽐내거나 재물을 요구하지 않고 시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다. 또한 왕의 정부치고는 이례적으로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순하고 얌전한 성격은 왕궁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1738년에 루이즈 쥘리는 궁정에 들어오고 싶어하던 동생 폴린 펠리시테를 궁에 들였다. 이는 큰 실수였는데, 폴린은 궁에 들어오자마자 작정하고 왕을 유혹했다. 루이즈 쥘리는 여전히 공식 정부였지만 왕의 애정을 동생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얼마 안 가 폴린은 루이 15세의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루이즈 쥘리는 왕의 총애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후 그녀는 차례차례로 동생들이 루이 15세와 놀아나는 것을 봐야 했다. 1742년에는 결국 막내동생 마리 안에게 자리를 빼앗겨 수녀원에 들어갔으며, 1751년에 빈곤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3. 자매들

3.1. 폴린 펠리시테

파일:Pauline_Félicité_de_Mailly-Nesle.jpg

Pauline Félicité de Mailly-Nesle, Marquise de Vintimille (1712 ~ 1741)

마이 집안의 차녀이자 뱅티미유 후작부인.

1738년에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였던 언니 루이즈 쥘리의 초청으로 궁에 들어왔다. 그리고 궁에 들어오자마자 언니의 자리를 노렸다. 폴린에게 관심이 생긴 루이 15세는 미혼이었던 그녀를 정부로 들이기 위해 뱅티미유 후작 장 바티스트 펠릭스 휴베르 드 뱅티미유와 결혼시켰다.[3] 폴린은 키가 크고 목소리가 걸걸하며 그리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 재치가 있었다고 한다. 폴린은 거만했으며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어 한 몫 톡톡히 챙기겠다는 야망이 가득했다. 그 덕분에 왕의 공식 정부임에도 받은 게 별로 없는 언니 루이즈 쥘리와는 달리 왕으로부터 슈아지르루아 성을 비롯해 온갖 선물을 받아 챙겼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폴린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이러한 폴린의 행보는 오래가지 못했다. 1741년 9월 2일에 폴린은 루이 15세의 아들을 낳다가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옮겨지던 과정에서, 성난 폭도들이 왕의 창녀라며 공격하는 바람에 훼손되는 수모를 겪었다. 폴린이 낳은 아들은 루이 15세를 똑 닮아 사람들은 '작은 루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루이 15세는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뱅티미유 후작의 아들로 공인되었다.[4]

루이 15세는 폴린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한동안은.

3.2. 디안 아델라이드

파일:Diane_Adélaïde_de_Mailly-Nesle.jpg

Diane Adélaïde de Mailly-Nesle, Duchesse de Lauraguais (1713 ~ 1769)

마이 집안의 3녀이자 로라게 공작부인.

로라게 공작 루이 드 브랑카와 결혼했다. 자매들 중 미모가 제일 떨어지고 머리가 나빴다고 한다. 루이 15세의 정부였지만 공식적인 관계는 아니었으며, 다른 자매들에 비해 별 관심을 받지 못했다. 기록이라고 해봤자 왕궁에 들어가서 왕이 다른 자매들과 즐길 때 함께 했다는 식으로 덤이라는 느낌이다. 막내이자 마찬가지로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리 안은 왕의 애정을 두고 다른 자매들을 경계하곤 했는데, 디안은 신경도 안 써 같이 왕을 만나기도 했다. 화제가 되는가 하다가 바로 막내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겼지만 마리 안이 사망하고 다시 루이 15세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이 관심은 몇 달도 안 가서 퐁파두르 부인에게로 옮겨갔다.

3.3. 오르탕스 펠리시테

파일:Hortense_Félicité_de_Mailly_Jean-Marc_Nattier.jpg

Hortense Félicité de Mailly-Nesle, Marquise de Flavacourt (1715 ~ 1799)

마이 집안의 4녀이자 플라바쿠르 후작부인.

플라바쿠르 후작 프랑수아마리 드 푸이유즈와 결혼했다. 자매들 중 유일하게 루이 15세의 정부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매들이 다 왕의 애인 노릇을 하다보니 끊임없이 왕의 애인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루이 15세의 관심을 못 받았다기보다는 자신이 정부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마리 안은 오르탕스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녀를 매우 경계했다. 본인이 정조를 중요시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남편과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또한 남편이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면 그녀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는 말도 있다.

3.4. 마리 안

파일:Marie-Anne_de_Mailly-Nesle.jpg

Marie Anne de Mailly-Nesle, Duchesse de Châteauroux (1717 ~ 1744)

마이 집안의 5녀이자 막내로 샤토루 공작부인이었다.

자매들 중 가장 미인이었으며, 언니들보다 더 많이 루이 15세의 사랑을 받았다. 16살 때 라 투르넬 후작 장 바티스트 루이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후 6년만인 1740년에 남편이 사망해 과부가 되었다. 그 다음해(1741년)에 언니 폴린이 출산 후 죽으면서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마리 안은 루이 15세의 친구이자 리슐리외 공작인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에 의해 왕의 새로운 정부로 푸쉬를 받았다. 리슐리외 공작은 마리 안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고 했다. 1742년 가면무도회에서 리슐리외 공작은 루이 15세에게 마리 안을 소개했다. 루이 15세는 바로 아름다운 마리 안에게 구애했다. 그러나 당시 마리 안은 애인이 있었으며 왕의 정부가 될 생각이 없었다. 루이 15세는 마리 안의 애인이 리슐리외 공작의 조카였던 에기용 공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전장에 보내버렸다. 그러나 에기용 공작은 루이 15세의 생각과는 달리 전공을 세우고 금의환향했다. 난감해하는 국왕을 본 리슐리외 공작은 조카를 멀리 보내버리고, 그가 마리 안을 배신한 것처럼 꾸몄다. 상처받은 마리 안은 리슐리외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리 안은 자신에게 홀딱 반한 루이 15세에게 맏언니 루이즈 쥘리의 자리였던 공식 정부의 자리와 왕비의 시녀직을 요구했다. 남편 루이 15세의 첫 정부였던 루이즈 쥘리를 싫어했던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도 이에 동의하면서 루이즈 쥘리는 궁에서 쫓겨났다. 새로운 정부가 된 마리 안은 언니와 달리 권력과 부를 추구했다. 그녀는 정부가 되고도 왕의 잠자리 요구를 종종 거부했으며 자신의 매력으로 왕에게서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루이 15세는 마리 안에게 샤토루 여공작 작위를 주고 연금을 지급했다.

마리 안은 정치적으로 루이 15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녀는 호전파인 리슐리외 공작의 뜻대로 루이 15세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도록 유도했다.[5] 전쟁 중에 왕이 군사를 이끌 때 동행하는 등 점점 입지가 높아졌지만 1744년에 급성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자리는 퐁파두르 부인에게로 이어졌다.


[1] 성이 마이네슬이나 마이리네슬 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으나 정확한 발음은 마이넬(또는 마이닐)이다.[2] 다섯 자매이나 넷째인 플라바쿠르 후작부인 오르탕스 펠리시테만이 루이 15세의 정부가 아니었다.[3] 법도상 국왕의 정부는 기혼자여야 했다. 다만 이후의 행적을 봐서는 폴린의 아들을 후작의 아들로 세탁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4] 정황상 루이 15세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했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애정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5] 리슐리외 공작은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훌륭히 막아내 프랑스군의 원수로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