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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우로시 5세 |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 |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 | }}}}}}}}}}}} |
<colbgcolor=#FF8C00><colcolor=#fff>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국왕 {{{#fff {{{+1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 }}} {{{#fff Марко Мрњавчевић}}} | |
출생 | 1335년 |
세르비아 왕국 리브노 또는 블라가이 | |
사망 | 1395년 5월 25일 (향년 59 ~ 60세) |
왈라키아 공국 하류 다뉴브 저지대 로비네 | |
재위 |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국왕 |
1371년 ~ 1395년 | |
아버지 |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 |
어머니 | 옐레나(또는 알예나/에브로심) |
형제 | 안드리야시, 이바니스, 드미타르, 올리베라 |
배우자 | 옐레나 |
가문 | 므르냐브체비치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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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제국 제3대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국왕. 세르비아 대귀족들의 인정을 전해 받지 못하고 마케도니아 서부의 작은 영토를 통치하면서 오스만 술탄국의 가신이 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군이 왈라키아 통치자 미르체아 1세와 전쟁을 치를 때 가담했다가 왈라키아군에게 전사했다.2. 생애
1335년경 리브노 또는 블라가이에서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와 옐레나(또는 알예나/에브로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안드리야시, 이바니스, 드미타르, 올리베라가 있었다. 아버지가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과 스테판 우로시 5세 부자의 총애를 받으며 세르비아 궁정에서 출세하면서, 그의 위상도 자연히 상승했다. 13651년 7월 말, 우로시 5세는 라구사 공화국과 세르비아 간의 평화 협상을 위해 사절단을 보냈는데, 사절단 대표로 마르코를 지명했다. 평화 협약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마르코는 라구사에 억류된 세르비아 상인들을 석방하도록 주선했으며, 자기 가족이 라구사에 보관했던 은을 인출하는 것도 허락받았다.1365년 8월 또는 9일, 아버지 부카신이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국왕에 선임되고 우로시 5세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 후 마르코는 아버지의 비호를 받으며 상속 재산이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부카신은 마르코에게 좋은 인맥을 같은 여인과 맺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스플리트, 오미슈, 토르기르, 닌 등지의 공작인 주라지 2세 수비치의 딸과 마르코를 짝지어주려고 했다. 수비치 가문은 그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1370년 4월 교황 우르바노 5세는 마르코가 교회의 분열을 조장한 정교회 신자인 점을 들며 불허했다. 이에 부카신은 방향을 바꿔 마케도니아의 베라, 보덴, 코스투라의 통치자 라도슬라프 흘라펜의 딸 옐레나를 아들과 결혼시켰다.
1370년 말 또는 1371년 초에 반포한 헌장에서 "젊은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는 세르비아 왕이 아들들에게 상속자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내리는 것이었다. 우로시 5세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마르코는 그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 왕좌에 오를 수 있었고, 세르비아에서 므르냐브체비치 왕조를 정식으로 건국할 수 있었다. 다른 귀족들은 일단 받아들였지만, 내심 므르냐브체비치 가문이 지난 150여 년간 세르비아를 통치했던 네마니치 왕조를 대체하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1371년 봄, 마르코는 세르비아 제국 서부 지역의 거물인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에 대한 아버지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이 작전에는 누이 올리베라의 남편인 제타 공작 주라지 1세 발시치도 참여했다. 그해 7월, 부카신과 마르코는 닉시치로 진군해 니콜라와 대결하려 했다. 그러던 중 부카신의 동생 우글레샤가 오스만 제국군이 1370년 말부터 마리차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자기 영지를 연이어 습격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자, 부카신은 연합 작전을 취소하고 아들을 궁정에 남겨둔 뒤 동생을 돕고자 이동했다. 그러나 1371년 9월 26일, 부카신과 우글레샤 형제는 마리차강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마르코는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이 되었다. 2달 후인 1371년 12월 2일, 우로시 5세가 사망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귀족들은 그를 주권자로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마르코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영토 다수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1372년 주라지 1세 발시치가 프리즈렌과 펙을 점령했고,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프리스티나를 점령했다. 1377년 부크 브란코비치가 스코페를 정복했고, 알바니아 출신의 영주 안드리야 그로파가 오흐리드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마르코가 지배를 유지한 유일한 지역은 프릴레프를 비롯한 마케도니아 서부의 작은 영토뿐이었고, 그나마도 남동생 안드리야시와 공유해야 했다. 결국 그는 생존을 위해 아버지와 숙부를 죽인 오스만 술탄국의 가신이 되어야 했다.
라구사 공화국 역사가 마르보 오르빈에 따르면, 마르코의 아내 엘레나는 남편에게 불충실했으며, 종종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를 속였다. 그러던 중 제타 공작 발사 2세 발시치가 옐레나에게 그녀가 머물던 코스투르 시를 자기에게 넘겨주고 자기와 결혼하자고 제안했다. 옐레나는 이에 동의해 성문을 개방하고 발사 2세에게 도시에 대한 권력을 줬다. 발사 2세는 새 아내와 함께 제타로 갔지만, 그녀의 방탕한 생활을 참지 못하고 감옥에 가뒀다가 나중에 추방했다. 이후 마르코는 옐레나와 살기를 거부하고 그레고르라는 남자의 아내 토도라와 함께 살았다. 엘레나는 아마도 베리아에 있는 아버지 라도슬라프 흘라펜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르코는 라도슬라프 흘라펜의 압력에 굴복해 옐레나와 화해하고 토도라를 라도슬라프에게 넘겼다고 한다.
마르코는 다른 세르비아 귀족들처럼 자신만의 돈을 주조했다. 그의 은하는 무게가 1.11g이었고, 3가지 유형이 있었다. 그중 2개에는 앞면에 VIHA/BABLGOV/ТРНИКР/ALMA/RKO(“그리스도의 하나님 안에서 마르코 왕을 축복하소서”)라는 5줄의 텍스트가 포함되었다. 첫 번째 유형의 동전 뒷면은 왕자에 앉은 예수를 묘사했고 두 번째 유형의 뒷면에는 만돌라(Mandorla: 후광, 광채)에 앉은 예수가 그려졌다. 3번째 유형의 뒷면에는 만돌라 안에 있는 예수가 그려졌으며, 앞면에는 4줄의 텍스트 BLGO / VERNI / KRAL / MARCO("축복받은 마르코 왕")가 있었다.
마르코는 오스만 술탄국의 가신으로서 오스만 제국군의 군사 작전에 보조군을 파견하고 공물을 바칠 의무를 수행했다. 1394년 발칸 반도의 일부 가신이 오스만 술탄국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마르코 본인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마르코의 남동생 안드리야시와 드미타르는 헝가리로 이주한 뒤 지기스문트 왕의 휘하에 들어가 오스만 술탄국에 맞섰다. 이때 두 형제는 라구사 공화국을 방문해 고인이 된 아버지가 남긴 은의 3분의 2를 가져갔고, 3분의 1은 마르코 몫으로 남겼다.
1395년 봄,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는 국경을 침범한 왈라키아 공국 통치자 미르체아 1세를 응징하기 위해 왈라키아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마르코는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스테판 라자레비치, 벨부즈 데스포티스 콘스탄틴 드라가쉬와 함께 바예지트 1세의 군대에 가담했다. 그러나 1395년 5월 17일 하류 다뉴브 저지대에 위치한 로비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패했을 때 콘스탄틴과 함께 전사했다. 그 후 오스만 술탄국은 마르코와 콘스탄틴의 영지를 합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