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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우로시 5세 |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 |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 | }}}}}}}}}}}} |
<colbgcolor=#FF8C00><colcolor=#fff>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국왕 {{{#fff {{{+1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 }}} {{{#fff Вукашин Мрњавчевић}}} | |
출생 | 1320년 |
세르비아 왕국 리브노 또는 블라가이 | |
사망 | 1371년 9월 26일 (향년 50 ~ 51세) |
세르비아 제국 체르노멘 마리차 | |
재위 |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국왕 |
1365년 ~ 1371년 | |
아버지 | 미르냐바 |
형제 | 우글레샤 므르냐브체비치, 옐레나 |
배우자 | 옐레나(또는 알예나/에브로심) |
자녀 |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 안드리야시, 이바니스, 드미타르, 올리베라 |
가문 | 므르냐브체비치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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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제국 제2대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국왕. 스테판 우로시 5세 치세 말기 세르비아 귀족들 중 최강의 권세를 누렸지만, 마리차강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패사했다.2. 생애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라구사 공화국 역사가 마르보 오르빈은 부카신의 아버지는 보스니아 리브노 출신의 가난한 영주 미르냐바였다고 기술했다. 미르냐바는 리브노에서 네레트바강의 지류인 부나 강변의 블라가이로 이주했고,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에 의해 궁정으로 초대되었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150년을 다룬 10권의 <역사서>로 유명한 그리스 역사가 라오니코스 칼코콘딜레스는 부카신과 우글레샤 형제는 술 관원으로서 두샨을 섬겼다고 밝혔다. 우글레사는 1346년 트레비네에서 두샨의 대리인으로서 통치한 것으로 공식 기록에 처음 등장했고, 부카신은 1350년 프릴레프에서 주판(Župan, 통치자)를 맡았다. 또한 여동생 옐레나는 두샨을 대신하여 오흐리드를 통치했던 세바스토크라토르 브란코 믈라데노비치의 아들 니콜라 라돈자와 결혼했다.1355년 두샨이 사망한 후, 외아들인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세 황제로 등극했다. 그의 치세 동안, 중앙 정부의 권위는 점진적으로 약화하였다. 두샨의 이복동생인 시메온 우로시는 1360년 이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테살리아에서 스테판 우로시 5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고 스스로 차르를 자처했으며, 여러 대귀족은 겉으로는 스테판 우로시 5세에게 충성했지만 실제로는 제한 없는 자치를 누렸다. 제국 서부 지역의 통치자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는 아예 스테판 우로시 5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라구사 공화국과 전쟁을 벌였다. 라구사 공화국은 1362년 5월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로시 5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여기에는 부카신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는 그가 이 시기에 세르비아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음을 암시하지만, 그가 이 시기에 어떻게 강력한 권력을 확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363년 9월, 세르비아 궁정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가 급사했다. 그 후 세르비아 궁정에서 권력의 공백이 발생한 틈을 타, 부카신은 자식들을 여러 귀족 가문의 일원과 맺어주면서 권세를 강화했다. 1365년 딸 올리베라를 제타 공작 주라지 1세 발시치와 결혼시켰고, 장남 마르코를 마케도니아의 베라, 보덴, 코스투라의 통치자 라도슬라프 흘라펜의 딸 옐레나와 결혼시켰다. 또한 동생 우글레샤는 그리스 북동부의 도시 드라마를 중심으로 강력한 위세를 떨치던 보지나의 딸 옐레나와 결혼했다. 이렇듯 므르냐브체비치 가문은 여러 대귀족과 결혼 동맹을 맺음으로써 명성과 권력을 강화했다.
우로시 5세는 갈수록 강대한 위세를 드러내는 그에게 의지했다. 처음에는 부카신에게 데스포티스 칭호를 내렸으며, 1365년 8월 또는 9월에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으로 지명함으로써, 황위 계승자로 삼았다. 부카신은 우로시 5세와 우로시의 어머니인 엘레나의 축복을 받으며 세르비아 총대주교 사바 4세에 의해 왕관을 썼다. 동생 우글레샤 므르냐체비치도 데스포티스에 선임되었다. 다른 귀족들은 일단 받아들였지만, 내심 므르냐브체비치 가문이 지난 150여 년간 세르비아를 통치했던 네마니치 왕조를 대체하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황실 조폐국은 우로시 5세와 부카신의 초상이 같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했으며, 1366년 가을 라구사에 사절단을 공동으로 보냈다. 또한 파사카에 있는 성 니콜라스 수도원에 우로시 5세와 부카신의 공동 초상화가 보관되었다. 이후 부카신은 헌장에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으로 서명했다. 마르보 오르빈에 따르면, 그는 노비 브르도와 프리슈티나까지 북쪽으로 세력읋 확장했다고 한다. 또한 부카신은 스코페와 프리즈렌을 보유했으며, 결혼 동맹을 맺은 제타 공국과 라도슬라프 흘라펜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우로시 5세와 부카신의 공동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마르보 오르빈에 따르면 1369년 라스 주판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광산이 풍부한 코소보로 확장하려는 부카신에게 반감을 품고 연합군을 결성한 뒤 우로시 5세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 맞서 싸웠다. 므르냐체비치 가문과 연합군의 결정적인 충돌은 코소보에서 벌어졌다. 라자르는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 이미 철수했고,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는 막대한 피해를 보고 퇴각했다. 우로시 5세는 여러 궁정 영주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후 우로시 5세는 정계에서 사실상 사라졌고, 부카신은 독립된 통치자로 군림했다. 라구사 공화국은 우로시 5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이름으로 공물을 바쳤지만, 1370년 4월 우로시 5세를 배제하고 부카신에게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을 확인받았다.
이후 니콜라 알토마노비치가 헝가리 왕국의 지원에 힘입어 세력을 재건하자, 부카신은 발사치, 라구사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그를 도모하려 했다. 1371년 6월, 부카신은 아들 마르코와 함께 슈코더르로 진군해, 니콜라의 영토에 속한 니식치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던 중 동생 우글레샤가 오스만 제국군이 1370년 말부터 마리차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자기 영지를 연이어 습격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연합 작전을 취소하고 동생을 돕고자 이동했다. 그러나 1371년 9월 26일, 부카신과 우글레샤 형제는 마리차강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후 아들 마르코가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이 되었지만, 대다수의 세르비아 귀족은 그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앞다퉈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의 가신이 되었다. 여기에 세르비아 황제 우로시 5세도 1371년 12월 2일에 사망하면서, 네마니치 왕조의 세르비아 제국 또는 세르비아 왕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3. 가족
- 옐레나(또는 알예나/에브로심): 남편 사후 수도원에 들어가 엘리자베타라는 이름으로 개명했고, 1388년 이후 사망했다.
-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1335 ~ 1395): 세르비아와 그리스인의 왕(1371 ~ 1395). 민간 전승에서는 튀르크의 침략에 맞서 싸운 용감한 전사 마르코 크랄리예비치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안드리야시(? ~ 1399년 이전): 서부 마케도니아의 지역 영주, 1394년부터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를 섬겼다.
- 이바니스(? ~ 1385): 제타 공국으로 망명 후 오스만 제국에 맞섰지만, 1385년 알바니아 베라트 인근 사우르 들판에서 제타 공작 발사 2세 발시치와 함께 전사했다.
- 드미타르(? ~ 1407년 이후):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의 외교관으로서 활약했다.
- 올리베라(? ~ ?): 제타 공작 주라지 1세 발시치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