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券/堂
1. 개요
1314년, 원나라의 수도였던 연경(대도, 지금의 베이징)에 세워진 학문기관이다.2. 상세
고려의 제26대 왕이었던 충선왕은 아버지인 충렬왕의 죽음 이후 1308년 자신과 가까운 원 황실에 의해 다시 고려의 왕이 되지만, 개경 생활이 즐겁지 않았던지 정치에 뜻을 서서히 잃어가게 된다. 그 결과 충선왕은 제안공 왕숙에게 정치를 맡기고 대도(연경)로 가게 된다. 충선왕은 대도에서 원나라 학자들과 교류 생활을 하는 동시에, 신하들이 고려와 대도를 오가게 하여 명을 내리는 방식으로 고려를 원격 통치했다.그러나 통신 매체가 발달한 시대도 아닌데다 애초에 장기간 나라에 왕이 없는 상황이 상식적인 상황은 아니라 당연히 고려 내부에서는 국왕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고, 결국 충선왕은 1313년 아들인 왕만에게 고려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된다.[1] 그리고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충선왕은 1314년 대도에 학술연구기관을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만권당이다. 만권당은 원나라 학자들과[2] 이제현 등 고려 학자들의 학문 교류의 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 시대에 유행한 조맹부체 등의 서체, 원나라의 학문과 문화 등이 고려로 전해지는 창구가 되었다.
그러나 1320년 충선왕을 아꼈던 원나라 인종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영종이 집권하자 충선왕은 반대파들의 모함에 토번 지역으로 귀양가게 되고[3], 3년 후 진종이 즉위하자 풀려났지만 1325년 사망한다. 만권당도 충선왕이 귀양을 가게 된 이후 사실상 흐지부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