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의 문제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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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 | 구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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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판 - (03)
전면개정판 - (12)
업그레이드판 - (18)
1. 소개
- 스위스에는 4개의 언어로 스위스 로망드어가 있다.(구판에서는 레토로망스어라 함.) - 로만슈어를 잘못 말한 듯 하다. 스위스 로망드어는 스위스 프랑스어, 레토로망스어는 따로 존재한다.
- 스위스인들은 자신들의 모어 이외의 언어는 전혀 할 줄 모른다.
- 대부분의 스위스인들은 4개의 공용어 중 2개국어 이상을 할 줄 안다. 나중엔 주마다 공용어가 따로 있다고 수정.[1](12)
- 국호 이야기 부분에서 홀란트를 홀란드라고 쓴다. 공용어들이 전부 라틴어를 조상으로 둔다는데 실제론 독일어는 게르만계다.
- 역시 초반에 GDP를 설명하면서 미국의 1인당 GDP가 1만 달러라고 소개하는데 연재 당시인 1980년대 초~중반의 기준으로는 얼추 맞긴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1987년에는 이미 미국의 1인당 GDP가 2만 달러에 육박한 상태였다. 김영사판에는 3만 달러로 나오고 개정판에선 삭제.(03,12)
- 스위스 국적을 얻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우며, 귀화가 허가되더라도 거액의 돈을 기부금으로 바쳐야 한다.
- 스위스에서 세금을 내면서 10년 간 거주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고, 영주권을 받고 나서 12년 간 거주하면 국적 신청이 가능해 총 22년이 필요하므로 상당히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미국과 캐나다 및 유럽 선진 17개국의 시민권자의 경우 5년만 거주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어 난이도는 훨씬 낮아진다. 또 기부금은 없다. 게다가 카타르처럼 국적 신청을 위해 25년 거주가 필요한 경우도 있으므로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고 단정짓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2] 거기다가 이 부분에서는 대한민국 국적을 따기가 무척 쉬운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그건 정말 소득 수준이 크게 떨어지던 예전 이야기다. 현재 대한민국이 정부 차원에서 저출산, 미결혼 등으로 인한 국가 인구 감소 위기에 21세기 글로벌 지구촌 사회 추세 영향을 받아들여 다문화 사회 이주민 장려 및 혜택 등의 정책을 시행해서 자국민이 보기에 쉽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며, 그 다문화 정책이라는 것도 사실은 결혼이민자 지원제도에 가깝다. 대한민국의 일반귀화 요건은 기본적으로 5년 거주인데 이는 일본, 프랑스와 같은 수준이다. 즉 결혼이민을 제외한 방법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따기는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결혼을 통한 이민의 경우 위장결혼이 아닌 것만 증명되면 매우 쉽게 허가해 주는 편이다. 또한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이민·난민에 멕시코·일본과 함께 가장 인색한 나라로 꼽히기도 했다. 물론 고급 인력이야 특별 귀화 등의 제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만, 지구상에 있는 어느 국가든 자기네 국가에 도움이 되는 타국의 고급 인력들에 대해서 좋은 조건까지 제시하면서 귀화시키려고 기를 쓰는건 다 마찬가지다.
-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낮은 국가는 잘 사는 국가다.
- 스위스 특유의 낮은 투표율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요임금의 격양가에 대한 일화에 빗댔다. 사실 선진국의 젊은 층에서 투표율이 낮은 등 정치적 무관심이 많은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중우정치나 독재로 흘러갈 위험이 있으며 문자 그대로 결론 짓기에는 애매한 부분도 많다. 무엇보다도 독재체제 하에서의 지도자가 국민들에게 우민화 정책을 펴는 이유도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정치에 대해 잘 모르도록 하기 위함이니 정치적 무관심 = 잘 사는 나라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3] 오히려 선진국 국민들이 의식 수준이 높아 비판적, 논쟁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등 잘 사는 국가 국민이 정치에 더 관심이 높아보이는 부분도 있다. 애초에 민주주의라는 게 국민들이 관심과 의지를 가지고 정치에 참여한다는 개념인데 시대적으로 보나, 지리적으로 보나 그러한 민주정치가 잘 행해지는 나라들 대부분은 선진국, 부국이고 반대로 사회가 불안정하거나 국민들의 삶의 질이 낮은 개발도상국, 독재국가들에서 민주주의가 잘 지켜지지 않거나 심지어 거의 발달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더더욱 신빙성이 낮은 개념이다. 국민들이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라기보다는 잘 사는 나라의 국민들에게 그만큼의 여유가 있는 경우도 많다는 개념에 더 가까우며 상술되었듯이 그런 나라일수록 오히려 국민들의 상당수가 깨어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연구, 토론, 혹은 참여까지 하거나 그 잘 산다는 조건이 손상되면 언제든지 저항하거나 정권을 갈아엎을 수도 있으니 딱 그렇게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 스위스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묘사하며 스위스 국민이 자기나라 대통령도 모른다고 나오는데 스위스 대통령은 7명으로 구성된 연방 평의회에서 1년씩 돌아가며 맡으며 딱히 중요한 자리도 아니라 스위스 국민이 자기나라 대통령을 몰라도 이상한건 아니다.
2. 역사
2.1. 중세
- 작중 스위스 동맹의 형성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문제는 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어떤 가문이며, 어떤 영토를 얼마나 확보했는지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기에 독자들로서는 헷갈릴 소지가 있다. 특히 왕조가 곧 국가인 동아시아의 특성 상 프랑스나 독일 같은 국가도 아니고, 일개 가문에게 통치를 받는다는 사실이 더욱 의아하게 느껴질 소지가 많음에도, 이에 대한 설명이 매우 부족하다. 굳이 따지자면 스위스 편에서는 오스트리아와의 갈등 관계를 부각시키며 합스부르크 역시 오스트리아인 것처럼 서술하는 경향이 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오스트리아 단독이라기보다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는 모든 국가,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을 그 대상으로 언급하는 게 적절했을 것이다.또 그 합스부르크가 원래 스위스 출신 가문이었다가 황제 먹고 나서 탈스위스한 가문이라는 것도 언급이 없다.[4]
- 스위스 동맹은 1273년에 결성되었다.
- 실제로는 1291년이다. 개정판에서는 제대로 수정됐다.(12)
- 최초의 스위스 동맹은 우리, 슈비츠, 옵발덴, 니드발덴 등 4개 주가 모여 결성되었다.
- 당시에는 옵발덴 주와 니드발덴 주가 운터발덴이란 이름의 1개 주였으므로 최초의 스위스 동맹은 3개 주가 모여 결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 부르고뉴 왕국의 카를왕은 스위스 동맹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충격으로 인해 울화통 터져서 사망했다.
- 우선 부르고뉴가 현 프랑스 영토에 속해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름을 독일식 발음인 '카를'로 표기하는 것 부터가 어색하다. 프랑스식 발음인 '샤를'로 표기해야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부르고뉴는 공작이 통치하는 국가, 즉 공국(公國)이지 왕국(王國)이 아니며 당시 통치자였던 용담공 샤를의 직위도 왕이 아니라 공작이다. 이 부분은 당시 먼나라 이웃나라의 독자들이 저연령층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공국과 왕국의 개념을 상세하게 설명하긴 어려운 탓에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용담공 샤를이 부르고뉴 전쟁에서 스위스 동맹에 패해서 화병으로 죽었다고 설명한 부분은 도무지 납득이 어려운데, 실제로는 부르고뉴 전쟁 최후의 전투인 낭시 전투에서 스위스 동맹군과 맞서 싸우다 스위스 용병의 할버드에 맞아 전사했기 때문이다.이길줄 알았던 싸움을 대판 발렸으니 울화통 터졌어도 이상할게 없긴하다[5] 또한 낭시 전투 역시 스위스 동맹과의 전투라기보다는, 로렌 공국에게 한 번 탈환했다가 다시 빼앗긴 낭시를 되찾기 위한 전투이므로 로렌 공국과의 전투에 스위스 동맹이 가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012년 개정판에서 용담공 카를을 샤를로, 부르고뉴 왕국을 공국으로, 그가 화병이 아닌 전장에서 죽은 것으로 설명하는 등 대부분의 오류가 수정되었다.(12)
- 스위스 동맹이 부르고뉴보다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이유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적대감 때문인데, 부르고뉴가 합스부르크의 핏줄을 가진 탓이었다.
- 우선 본편에서 스위스가 단 한 번 남의 나라, 즉 이탈리아를 공격했다가 프랑스군에 참패해서 이때 교훈을 얻고 영세 중립국이 되었다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 전투는 1515년에 벌어졌던 마리냐노 전투를 얘기하는 것으로, 스위스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오히려 이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위스 동맹이 마리냐노 전투 당시 대참패한 후 그대로 프랑스의 속국이 될까봐 불안해한데다, 마침 합스부르크와의 대립과 이탈리아 정복을 위해 평소 스위스 용병 전력에 눈독을 들이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연이은 공격 대신 용병 전속 계약을 요청해 타결되었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스위스 용병 항목 참조. 게다가 상술한 용담공 샤를이 전사한 낭시 전투는 1477년에 있었고 마리냐노 전투는 그보다 거의 40년 뒤에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위스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것에 부르고뉴의 용담공 샤를이 분개하여 스위스와 적대 관계가 된 것처럼 묘사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게다가 당시 부르고뉴 공작의 혈통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프랑스와 같은 발루아 가문이다. 백년 전쟁 중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가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어 일생을 마친 선량왕 장이 본래 부르고뉴 공작 가문이었던 부르고뉴 가를 대신하여 발루아 가문으로서는 최초로 이 공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장의 막내아들인 용감공 필립이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의 자리를 상속하였고, 이 필립의 증손자가 바로 용담공 샤를이다. 그러므로 스위스 동맹이 단순히 부르고뉴가 합스부르크 혈통이라는 이유로 적대하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선호했다는 설명은 인과관계가 전혀 다른 잘못된 설명이다.[6]
2.2. 근세
- 종교 전쟁을 설명하는 부분에 나오는 프랑스의 예(위그노 전쟁)로 나오는 '성 바르톨로뮤 대축일의 대학살' 때 어린 당시 국왕이 '앙리 4세'였고, 이 사건 이후로 위그노(개신교도)들은 박멸당했다.
- 당시 어린 국왕은 샤를 9세다. 앙리 4세는 샤를 9세보다 3세 어린 손아래 매부로 위그노 전쟁을 종식한 인물이다. 덧붙여 앙리 4세는 위그노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위그노에 관대하여 '낭트 칙령'을 공포, 위그노들에 대한 탄압을 중단해 유능한 상공시민층이 대부분인 위그노들을 국내에 체류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가톨릭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위그노들이 국외로 탈출한 건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한 이후에 일어났다. 간단히 말해 위그노 전쟁의 시작과 끝을 반대로 말했다. 독일 편에서도 나온 오류.(03) 그나마 나중에는 샤를 9세라고 개정되었다.
- 가톨릭/개신교 전쟁에서 가톨릭이 개신교도들을 몰아냈고 이러한 이유로 현재 프랑스는 국교가 가톨릭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의 주도인물과 이후 경과, 결론이 매우 잘못 설명됐다. 실제로는 카트린 드 메디치가 아닌 기즈 공작 앙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사실 누가 주도했는가에 대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프랑스 현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리고 당시의 어린 왕은 앙리 4세가 아닌 샤를 9세였다. 오히려 앙리 4세는 이 전쟁을 평화롭게 끝낸, 즉 선량왕이다.
이하 내용은 먼나라 이웃나라에 기재가 되어있지 않은 내용이다. 당시 프랑스 내 칼뱅주의 개신교도 집단인 위그노는 이후 바로 힘없이 쫓겨난 게 아니라 얼마 안 가 정부 타도를 외치며 무장봉기를 하고 매우 치열하게 싸웠다.[7] 샤를 9세는 이 일에 충격을 받아 지병이었던 결핵이 악화되어 23세로 요절했고, 왕위는 샤를 9세의 동생인 앙리 3세에게 넘어갔으나 그조차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결국 샤를 9세와 앙리 3세의 여동생이었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남편, 즉 샤를 9세와 앙리 3세의 손아래 매부인 앙리 드 부르봉이 뒤를 이어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앙리 4세이다.
그러나 가톨릭과 위그노 중 어느 한 쪽도 압도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황에서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으로 화해했다가, 이후 루이 14세 때 다시 박해가 가해졌고 결정적으로 바로 태양왕 시기에 낭트 칙령이 폐기되자 위그노들 대다수가 자진해서 프랑스를 떠났다.[8]
즉,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나온 것처럼 위그노들은 15~16세기에 프랑스에서 쫓겨난 게 절대로 아니다. 어쨌거나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난 사건은 프랑스의 산업화를 책임질 인재들이 국외로 대거 유출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고, 그 때문에 가톨릭은 가톨릭대로 조인트를 까인다. 정확히 말하면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부터 19세기 말 제 3공화정 헌법(시기상으로는 1881~1884 정도)에 의해 교육, 지방에 대한 권한 등을 중앙 정부에게 내주는 것으로 과거의 영광을 상실한다. 위의 과정을 겪은 현재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라이시테로 대표되는 적극적 세속주의 국가다. 그냥 국교가 없는 걸 넘어서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종교색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가령 학교에서 벽에 십자가를 걸거나 부르카를 착용하는 행위 등 종교적 논란 및 갈등을 불러올 소지가 있는 모든 행동을 법으로 금지해 버렸다. 500여년이 넘게 지났어도 저 때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최근에 문제가 되었던 부르카의 경우 다른 종교 측에서 이를 가지고 논란을 조장할 소지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이슬람의 복장인 부르카 착용 금지에 대해 의외로 유대교의 랍비, 가톨릭의 신부, 개신교의 목사들이 꽤 반대하는 편이다.동병상련인가?물론 국교가 없는 것일 뿐이지 종교를 못 믿게 하는 건 아니니 아무래도 가톨릭의 비중이 높은 건 맞지만... 마치 한국의 국교가 유교라고 하는 것과 같은 오류. 다행히도 21세기판에는 앙리 4세가 샤를 9세로 변경, 프랑스의 국교가 가톨릭이라는 내용이 없어지고 국민의 90%가 가톨릭교도라고 했으며[9] 개정판의 프랑스 편에서 낭트 칙령과 라이시테 제도가 추가되었다.(03,12)
2.3. 근대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공격을 받자 스위스인들이 "우린 옛날부터 민주정이었는데?"라고 말한다.
- 스위스 주정청은 도시 귀족들 중심의 과두정에 가까웠으며 민주적인 정부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물론 이렇게 따지자면 당시 프랑스도 소수 부르주아가 대부분의 권력을 독점했으니 엄밀한 의미의 민주정은 아니긴 하다. 스위스에 혁명세력이 커지자 스위스 귀족들이 이들을 탄압했다는 내용은 언급되어 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수정되었다.(03)
- 나치 독일은 스위스를 침략하려 했지만 스위스는 나치를 협박해 독립을 지켰다.
- 작중 2번씩이나 언급되는 내용. 나치가 알프스 통로를 노리고 스위스를 침략하려 하자 스위스는 '너희가 처들어오면 통로를 무너뜨리겠다.'고 대응하고, 독일은 원래 목표인 알프스 통로를 못쓰게 되니 의미 없는 짓이고 중립국 공격했다고 괜히 욕만 먹을 테니 침략을 포기했다고 서술되었다. 그러나 앞서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며 이탈리아와 연결해서 나치 독일은 알프스 통로는 굳이 필요하진 않았고, 게다가 스위스는 나치 독일에 스위스 은행의 유대인 계좌 정보를 빼돌려서 조공으로 바치고, 나치 고위직들의 검은 돈 창구 역할도 맡았던 등 처음부터 나치에 협조적이었다. 애초에 폴란드에 이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까지 점령하고 프랑스 침공 후에는 동맹이었던 무솔리니의 삽질로 인해 동유럽까지 쳐들어갔던 나치가 스위스 정도 되는 전략적 요충지를 국제사회의 비난이 무서워서 포기할 리가 없다. 또 스위스 계좌는 연합국의 금수 조치로 수입이 불가능한 품목들을 스위스 계좌로 우회해서 각종 품목을 수입하는 용도로 나치에서 잘 이용해 먹었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에 마셜 플랜이 실행될 때도 이래저래 미운털이 박혀 스위스는 지원해주지 말아야 한다고 해서 마셜 플랜에서 제외됐다. 이후 개정판에서 이런 내용이 추가되었긴 했다.(98)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독일이 스위스를 점령하려 계획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탄넨바움 계획(Unternehmen Tannenbaum)으로 1940년 10월의 계획상으로는 독일군 11개 사단과 이탈리아군 15개 사단을 동원해 북쪽과 남쪽에서 협공한다는 계획이다. 히틀러가 이 계획을 실행하지는 않았는데 정확한 원인은 불명이지만, 손실에 비해 얻을 것이 너무 적다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다. 폴란드 침공이 있은 1939년 9월 스위스는 43만의 전투병과 21만의 지원병을 전선에 배치했는데 어차피 협조적인 스위스를 상대로 가뜩이나 험난한 산지에 이 병력과 싸워 이긴다 해도 독일이 얻을 게 너무 없었다[10]. 그리고 실제로 스위스가 전쟁이 일어날 경우 알프스 통로들을 파괴하고 올라오지 못하게 해 버릴 생각도 있었고, 스위스를 점령한다면 결국 얻을 건 알프스 통로뿐인만큼 독일도 그 정도는 고려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스위스가 전쟁 전반에 나치 독일에 협조적이었던것도 사실이나, 만약 독일이 정말로 공격했다면 스위스가 전면적으로 저항할 계획이었던 것도 사실이다.[11] 그저 나치 독일에 잘보이려 꼬리친 덕분에 중립을 유지한 것만은 아니다.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대비하면 못 막을 것이 없다'라는 식의 서술이, 실제로 나치의 침략에 온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실패했던 노르웨이, 폴란드 등 다른 유럽국가들의 노력을 폄훼하고, 냉혹한 역사적 현실을 경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12] 참고로 근대에 들어서서 양면전선을 형성하고도 이긴 나라는 딱 하나뿐이다.[13]
- 스위스 예비군들은 실탄이 든 총을 자기 집에 보관해도 되는데 아직까지 총기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 물론 사고도 일어났고, 범죄도 일어났다. # 또한 스위스의 총기범죄율도 그렇게 낮다고 볼 수 없다. 2006년 기사에서 스위스의 총기범죄율은 서유럽 국가 중 3위라고 한다. #심지어 이것에 대한 집단지성의 오류를 증명한 실험도 있다. 또한 미국과 같이 총기와 실탄의 보유가 비교적 자유로운 국가라면 모를까 스위스 역시 그렇지는 않다. 상술 되었듯이 총기 사고의 위험도 있고 해서 예비군이 총기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실탄은 고사하고 탄창은 물론 노리쇠뭉치마저도 갖고 있지 못 하게 해서 훈련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격발이 불가능하도록 조치 되어있다. 2012년 개정판에서 첨부된 스위스 예비군 사진만 봐도 좀만 자세히 보면 총기를 메고 있기는 한데 탄창은 물론 노리쇠뭉치도 없어서 총 가운데가 텅 비어있는 사진이 있다. 사진까지 첨부했음에도 고쳐지지 않은 부분이다.[14]
- 과거 식민지 국가들은 독립한 후에도 종주국들이 대내외적으로 영향력을 주고 있어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15]
- 이를 종속이론이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옛날만큼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론이다. 사실 스위스편 내에서도 과거 식민지배 국가들의 대내외적 영향력이 아닌 피지배당했던 나라의 부정부패 때문에 더 악화되는 걸로 묘사된다.[16] 다만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나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등에서 분리독립한 옛 프랑스 예하의 아프리카 식민지들 같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인데, 프랑스가 이들 지역의 생산 구조 등을 식민지 독립 이후에도 별도의 조약 등으로 장악한 뒤 변화하거나 이를 통해 크게 이익을 보지 못하게 묶어 두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종속이론은 프랑스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먼저 나타난 것이고 '미국 같은 강대국이 우리가 발전을 못하게 이런저런 방법으로 방해하고 착취한다'는 것이 주요 요지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물론 다른 서방 국가들은 이를 좋게 보지 않지만 프랑스와 이런 문제로 정면 대결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는지 현재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요즘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넓혀 가는 중국 역시 프랑스의 구 식민지 지역 개입은 가급적 피하는 편이다. 이런 내용은 80년대 초판에 있었던 내용의 흔적이다. 80년대 유행하던 종속이론을 무분별하게 넣고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것이다.
- 대다수 식민지배 받았던 국가들은 자의적으로 독립을 획득한 것이 아니다.
- 일단 자의적만으로 독립을 하지 못한 국가들도 있는건 사실이다. 한국만 해도 독립운동은 많았지만 결국 독립시켜준 것은 소련과 미국이었다. 하지만 그림에서는 마치 독립운동이라든가 하는 건 아예 없이 그냥 강대국끼리 낼름 독립시켜준 것처럼 나오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다. 동남아시아만 봐도 프랑스는 알제리와 베트남을 독립시켜주지 않으려고 알제리 전쟁과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독립시켜주지 않으려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앞의 사례보다는 평화적으로 독립한 미얀마나 캄보디아도 나름대로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이 있었고 결국 전쟁은 없었지만 자기네들을 지배하던 국가와 담판을 벌여 독립을 따냈으니 적어도 그림에서처럼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독립을 한 것은 아니다.[17] 한국의 독립도 국내 역사 교과서에서는 국내외의 독립운동이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독립의 근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애초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식민지 유지할 힘이 팍삭 죽어 있었다.[18] 앞서 나온 사례들도 결국 이긴건 식민지였고 특히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경우 수카르노가 미국과 유엔에 압박을 넣고 이에 미국이 "인도네시아 독립 안 시켜주면 마셜 플랜 없다!" 라고 못을 박자 네덜란드가 독립시켜준 것에서 보듯 서구 열강은 식민제국을 유지할 돈이 없었다. 예시로 영국같은 경우에는 프랑스, 네덜란드보다는 평화롭게 독립시켜준 편이다. 무엇보다도 1차 대전은 명백히 식민지 쟁탈전이지만 2차 대전은 덜했고 다른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측면이 더 크다. 식민지에 대한 설명도 잘못 되었다. 마치 식민지가 돈이 되는 것처럼 서술했는데 실제로는 식민지 확장은 그다지 돈 되는 사업은 아니었고 돈을 벌기보다는 세력을 떨치고 영향력을 확보하며 힘을 과시하는 등 정치적 측면에서의 효력이 더 컸다. 물론 책에서 서술한대로 원료를 헐값에 사들이고 싼 값에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장점이지만 식민지가 그렇게 하여 만든 생산물을 비싸게 사줄 정도의 경제력이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첫번째로 애초에 그정도의 경제력이 있다면 식민지가 되지도 않는다.[19] 시장이 되는 것은 오히려 식민지보다는 교역국이다. 두번째로 설령 식민지가 된 후 경제가 그렇게 성장한다면 식민지에게 경쟁력이 생기고 그건 곧 독립이나 자치권 요구로 이어진다. 현재에도 힘 좀 생기면 아예 떨어져나가 독립하자고 분리주의가 들고 일어나는 나라가 부지기수인데 그 때라고 달랐을까?[20] 세번째로 구조상 불가능하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처럼 아예 백인들이 건너가 주류가 된데다가 경제발전까지 성공한 나라라면 모를까(물론 이 경우에는 두번째의 문제가 발생) 둘 중 하나라도 되지 못하면 결국 전체적인 경제는 발전 못 한다. 그럼 또 경제력이 약해서 구매력이 약하다. 애초에 원주민이 주류가 된 나라 치고 선진국이 된 나라도 드물다는 걸 생각해 보면 원주민 주류인 식민지가 본국 경제에 보탬이 될 정도로 경제력이 클 수가 없다.[21] 그 외에는 식민주의/영향 참조
[1] 스위스인 75퍼센트가 독일어를 쓴다고 했는데 65퍼센트를 잘못쓴 듯하다.[2] 카타르보다 취업 비자 취득이 더 까다로우므로 어떻게 보면 더 어렵다고 볼 수도 있긴 하다.[3] 자원빨로 먹고 사는 나라가 아닌 이상 독재국가 중 선진국은 진짜 드물다.[4] 단 개정판의 네덜란드편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래가 서술되어 있긴 하다.[5] 물론 스위스와의 전쟁은 쉬운 일이 아니다. 카를이 '스위스 산적떼' 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문제는 그 스위스 산적떼가 당대 최고의 용병중 하나인 스위스 용병이라는 점이다(...) 특히나 지리적인 이유로 먹고 살 길이 매우 협소하고 그나마 안정적으로 유치한 산업 중 하나가 용병이라서 용병의 본분을 다 하는(실력+신용) 그런 용병이었다.[6] 다만 용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전사한 뒤 샤를의 유일한 자식이자 외동딸인 마리가 영지의 보전을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한 이후부터 부르고뉴에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끼치게 되고, 마리가 죽은 뒤 남편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벌인 끝에 부르고뉴 공작령을 분할하게 되며 이는 훗날 합스부르크가 다시 부르고뉴 공위를 주장하는 계기가 된다.[7] 이들 위그노들은 프랑스 입장에서는 참 골칫거리였는데 마냥 무력으로 때려잡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놔두자니 분리독립까지 요구하는 등 이래저래 문젯거리였다. 결국 루이 13세때 리슐리외가 한번 위그노들을 때려잡긴 해서 기를 죽이는데 성공했다.[8] 그나마 남아있는 이들은 형식적으로나마 가톨릭으로 개종해 남을 수 있었는데 이들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다시 개종한다.[9] 그런데 프랑스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요즘은 신자 수가 많이 줄었다. 이는 프랑스 뿐만이 아닌 서구의 대다수 기독교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벌어지는 문제로 가톨릭, 개신교 가릴 것 없이 실질적 기독교도의 수는 많이 줄고 있다.[10] 상식적으로 협조적인 나라 건드려서 뭐가 좋을까? 에초에 스위스는 알프스 산맥에다가 벙커를 무지막지하게 파놓은 데다 병사들의 훈련도와 숙련도도 독일군 이상인 정예 병력이었다. 물론 이 모든 걸 거른다 쳐도 스위스가 알프스의 터널을 협박대로 다 터트린다면 결국은 아까운 병력들만 무의미하게 갈아넣은 꼴이 된다. 게다가 미국처럼 돈, 병력, 물자가 썩어나던 나라라면 모를까, 애초에 그 미국을 위시한 서유럽 연합군과 소련이랑 양면전선 치르는 터라 병력 한 명, 총 한 자루도 아까운 판에 두 자릿수의 사단을 전쟁해봤자 얻을 것도 없는 곳에 밀어넣는다는 건 아무리 군사학에 무지한 사람이 봐도 뻘짓이다. 아니 애초에 그 병력 돈 썩어나는 미국도 협조적인 나라에 전쟁 거는 뻘짓은 안했다. 몇몇 멍청이들 빼고는[11] 사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인데다가 특히나 나치 독일은 외교적 신뢰도가 바닥이었다. 이러니 발뻗고 안심하는게 바보.[12] 노르웨이의 경우 아예 군사력 자체부터가 독일보다 월등히 뒤떨어져 어쩔 수 없었고 폴란드는 그래도 제법 버텼지만 전쟁이 길어지려는 찰나에 쳐들어온 소련 때문에 얻어맞아 한 마디로 양면전선이 형성되어 망했다. 웬만한 경우 양면전선에는 뭘 해도 안 되는 만큼 이건 어쩔 수 없는 사례다.[13] 그나마도 상대 국가가 먼저 양면전선을 펼쳐 싸우고 있었다는 이점이 있었다.[14] 사실 이원복 교수가 밀리터리 분야에 관심이 딱히 없는 사람이라 무기 관련 고증이 상당히 허술한 편이다. 당장 같은 스위스 편에 레오파르트 2 탱크를 레오파드87이라고 적어놓거나(단 스위스군 제식명이 Pz87이긴 하다), 영국의 석궁 오류부터 시작해서 드레이크의 대포, 넵튠 스피어 작전 등 밀리터리 분야 고증이 영 어설픈 것이 한두개가 아니다.[15] 이 부분은 초판본엔 독일 편에 수록되어 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위스편으로 옮겨졌다.[16] 독일편에서는 이런 내용이 강조되어 나온다.[17] 물론 좀 예외인 경우가 있기는 한데 바로 싱가포르이다. 이쪽은 별로 독립할 생각이 없었는데 새로 독립한 국가에서 강제로 나가게 하다시피해서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독립한 사례이다.[18] 서구 열강들 대부분이 유럽에 있는데 그 유럽이 세계대전으로 쑥대밭이 되었다.[19] 예시로 중국을 들 수 있다. 이쪽은 워낙 먹을 이권이 크니까 혼자 다 먹기에는 다른 경쟁자 눈치가 보여 못했다. 덕택에 중국은 영토, 이권, 재물 등을 거하게 뜯겨도 주권만은 안 뺏겼다.[20] 식민지들로 구성된 제국이 아닌 북미의 전통 있는 나라들도 퀘벡이나 캘리포니아와 같은 알짜배기주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전례가 있으며 현재에도 완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21] 본국 사람의 경우에야 당연히 본국 사람이니 그나마 대우가 낫겠지만 원주민은 잘해봐야 2등시민 수준의 취급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