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 문화유산 | 1999년 고대 메르프 역사 문화 공원 Gadymy Merw | 2005년 쿠냐우르겐치 Köneürgenç | 2007년 니사의 파르티아 성채 Nusaýyň Parfiýa galalary |
고대 성채인 대 키즈카라 (붉은 성채). 무려 15m 가 넘는 높이를 자랑한다. 서쪽에 소 키즈카라도 있다
랜드마크이자 세계유산인 아흐마드 산자르의 영묘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고대 메르프 역사 문화 공원 | |
영어 | State Historical and Cultural Park “Ancient Merv” | ||
러시아어 |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историко-культурный парк Древний Мерв | ||
프랑스어 | Parc national historique et culturel de l’« Ancienne Merv » | ||
국가·위치 | 투르크메니스탄 마르 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99년 | ||
등재기준 | (ii)[1], (iii)[2] | ||
지정번호 | 886 |
유적 지도. 좌측의 타원 형태가 이슬람 시기 시가지이다.
1. 개요
مروМеrv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니샤푸르, 발흐, 헤라트와 함께 호라산 (페르시아권 동부) 지방의 주요 도시로 기능하였던 도시. 현재에는 투르크메니스탄의 도시 마리 동쪽 25km 지점에 광대한 실크로드 유적으로 남아있다.
메르프는 호라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여, 이란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튀르크 유목민 세력이 노리던 도시였고, 동시에 트란스옥시아나로 진출하려는 이란 세력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메르브 출신 인사에는 알-마루지 (المروزي)란 라캅이 붙었다. 남동쪽 250km 거리에 있는 현 아프가니스탄 북서부 발라 무르가브에 있는 마루드 (مروروذ) 혹은 메르브 루드 (مرو الروذ)와 구별해야 한다.
2. 고대
기원전 6세기 경에 세워진 옛 메르브 성벽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의 속주인 마르기아나 사트라프가 설치되었다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점령하여 알렉산드리아로 개편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 시절에는 Ἀντιόχεια τῆς Μαργιανῆς (마르기아나의 안티오크)로 불렸다. 이후 파르티아가 쿠샨 제국과 메르브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었으며, 파르티아에서는 카르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로마군들을 도망가지 말고 죽을 때까지 싸우라는 의미로 이곳에 주둔시켰다 한다.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이 지역에서는 불교가 번영했었다. 고대 말에는 사산 제국과 에프탈족이 이 지역을 두고 싸웠으며, 마니교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번성했다 한다.
3. 호라산의 중심
7세기 경에 궁전으로 세워진 2개의 키즈카라
초기 사하바 출신 장군과 초기 우마이야 왕조령 호라산 총독의 영묘
651년, 니하완드 전투 이후 패주하던 사산 제국의 마지막 군주 야즈데게르드 3세가 메르브 남쪽에서 살해되었다. 성의 이란 지도부가 아랍 군대에 항복하여 정통 칼리파 (라쉬둔 왕조) 우마르의 사절단이 입성하여 이슬람 세력권에 포함되었다. 이후 메르브는 호라산의 주도가 되었다. 671년 우마이야 왕조의 동방 부왕 지야드 빈 아비히는 알리 가문에 온정적인 쿠파와 바스라 주민 5만명을 메르브 오아시스로 이주시켰다.
따라서 한동안 메르브 일대는 아라비아 반도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 밖에서 가장 무슬림이 많은 곳이었다. 3차 피트나 당시인 747년, 메르브는 압바시야 혁명군이 처음 점령한 대도시였다. 압바스 왕조 건립 후 9세기 초엽에는 4차 피트나와 그 직후 알 마문이 10여년간 실질적인 수도로 삼기도 하였다. 다만 그가 계속 호라산에 머무는 것과 시아파에 온정적인 것에 대한 왕가의 반란이 터지자, 그제서야 바그다드로 환도하였다.
4. 중세 번영기 : 셀주크 제국
중세 성벽 (솔탄 갈라) 유적
1118년의 셀주크 제국 동서 분열 이후에는 아흐마드 산자르의 동부 셀주크의 수도가 되어 다시 번영하였다. 이때에 메르브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성벽 바로 밖에는 대형 벽돌 얼음 저장소가 생긴 덕분에 20만여 명에 달하는 메르브 시민들은 여름에 얼음을 넣은 시원한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산자르의 통치 하에 정치가 안정되며 오마르 하이얌이 메르브 천문대에서 연구하는 등 많은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지리가 알 이드리시는 메르브가 목화를 가공하여 질좋은 비단을 생산하는 부유한 도시라 기록하였다. 1150년 기준 도의 인구는 20만으로 추산되다. 그러나 메르브는 1153년 오우즈 튀르크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며 도시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심각하게 파괴되며 쇠퇴하게 되었다. 얼마후 산자르가 탈환했지만 곧 사망하였고, 생전에 만든 거대한 영묘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그의 영묘는 반세기 후 몽골군에게 훼손되었다.
5. 쇠퇴
12세기 후반 구르 왕조에 이어 호라즘 왕조가 일대를 장악하였고, 13세기 초엽 메르브는 바그다드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능가하는 50만 인구를 지닌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몽골-호라즘 전쟁 중인 1221년, 몽골군에게 함락되어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이후 몽골군에게 학살당한 페르시아인들의 자리를 투르크멘인들이 메우게 된다. 13세기 이후로 메르브 근교의 농업은 쇠퇴해버리고 유목이 주가 되었다.15세기 중반 티무르 제국의 아부 사이드 칸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으며, 기존 유적의 남쪽에 사각 형태의 성벽이 둘러진 도시가 세워졌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부하라 칸국과 사파비 왕조가 호라산의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와중에 다시 한 번 폐허가 되었다. 결국 히바 칸국이 이 지역을 장악했으며, 메르브는 시아 이란계 도시가 아닌 수니 튀르크 도시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