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9:04:04

미르호세인 무사비

파일:이란 국장.svg
이란 이슬람 공화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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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4대 제5-6대
메흐디 바자르간 모하마드알리 라자이 모함마드자바드 바호나르 미르호세인 무사비
이란 이슬람 공화국 대통령
이란 숭고국 총리 · 이란 제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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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9f40><colcolor=#fff>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제5-6대 총리
미르호세인 무사비 하메네
میرحسین موسوی خامنه | Mir-Hossein Mousavi Khameneh
파일:미르호세인 무사비.jpg
출생 1942년 3월 2일 ([age(1942-03-02)]세)
이란 제국 하메네[1]
재임기간 이란 대통령 수석 고문[2]
1997년 10월 12일 ~ 2005년 8월 3일
외무부장관
1981년 7월 5일 ~ 1981년 12월 15일
제5-6대 총리[3]
1981년 10월 29일 ~ 1989년 8월 16일
서명
파일:미르호세인 무사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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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9f40><colcolor=#fff> 학력 테헤란국립대학교(건축학 / 석사)
배우자 자흐라 라마바드 (1969년 결혼)
자녀 3녀
종교 이슬람교 (시아파, 12이맘파)
소속 파벌
[[개혁파|
개혁파
]]
소속 정당 [[희망의 녹색 길|]]
약력 이란 대통령 수석 고문 (1997년2005년)
외무부장관 (1981년)
이란 제5-6대 총리 (1981년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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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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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의 건축가 출신 정치인으로, 제45대이자 마지막 총리를 지냈다.

2. 생애

하메네에서 타브리즈 출신의 아제리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훗날 최고지도자가 되는 알리 하메네이의 친척인데,[4] 후술하겠지만 둘의 관계는 매우 나쁘다.

고등학교 졸업 후 테헤란으로 이주해 테헤란 국립 대학교(현 샤히드 베헤슈티 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하지만 무사비는 건축가의 길을 걷는 대신, 좌익 성향의 이슬람 학생연합에 가담하는 등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 외에도 자유운동과도 밀접한 인연을 맺었고, 팔라비 왕조에 대항하는 길거리 시위를 주도했다가 구속되었다. 이 때 롤모델이 그 유명한 체 게바라였다고.

1979년 혁명 이후 모함마드 베헤슈티 등과 함께 이슬람공화당을 결성하는 등, 공화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역할이 무색하게, 1980년 대선에서 이슬람공화당에 비판적인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이슬람공화당 후보는 3위로 낙선한다. 다만 총선에서 원내 1당 자리를 차지한 탓에 자당 소속의 모함마드알리 라자이가 총리로 임명될 수는 있었다. 물론 둘의 사이가 좋을 리가 전혀 없었고, 라자이는 무사비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하지만, 바니사드르가 퇴짜를 내리면서 무산된다. 그 후 정계를 장악하고 있던 보수파들은 바니사드르를 탄핵하고, 라자이가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무사비는 이제서야 외무장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1981년 8월 30일 라자이와 모함마드자바드 바호나르 총리가 인민전사기구의 폭탄 테러로 암살되자, 무사비는 알리 하메네이 신임 대통령 밑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같은 당 소속이었음에도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무사비는 당 내 좌파로 분류된 반면, 하메네이는 당 내 우파로 분류되었다.[5] 경제, 정치, 외교 등 각종 이슈에서 수시로 충돌이 잦았고, 이 끝에 1987년 이슬람부흥당은 결국 해산된다. 이 둘의 대립은 훗날 개혁파원칙파로 비로소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나마 루홀라 호메이니 최고지도자 생전에는 그냥 싸우는 정도였지만,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고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직을 승계하면서, 무사비의 입지는 더욱 더 위태로워진다. 하메네이는 최고지도자에 오르자마자 총리직을 폐지했는데, 뻔하겠지만 무사비 꼴 보기 싫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다만 일단은 살아남았는데, 이유는 대통령에 당선된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가 둘의 갈등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

여하튼 개혁파 진영에서는 유력한 대권주자로 떠올랐고, 1997년 3선 연임 금지에 걸려 불출마한 라프산자니를 대신해 개혁파의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 되었으나, 불출마를 선언한다. 이 때 인지도가 비교적 낮았던 모함마드 하타미가 대타로 출마했고, 투표 결과 압승하면서 일단 한 숨을 돌리게 되었다. 2005년 하타미도 연임 제한에 걸리게 되자 무사비의 출마 설이 나돌았으나, 2004년 10월 12일 또 불출마를 선언한다.

그렇게 20년 간 정치권을 떠나 있던 2009년, 차기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일찍이 2005년 대선에서 하메네이의 신임을 받은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당선되면서 여러모로 본인의 입지가 위태로워진 상황이었고, 이를 극복하는 데 시급할 수밖에 없던 상황. 개혁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개표 결과 33.86%의 득표율로 아흐마디네자드에게 큰 표차로 패했다.

그 후 야권 지지세를 규합시켜 소위 "녹색 운동"을 이끌어 아흐마디네자드 정권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 역할을 했고, 희망의 녹색 길을 결성했으나, 2011년 가택 연금 조치를 받으면서 정치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 이유는 당시 아랍의 봄 열풍이 불고 있었고, 아랍과 가까운 이란도 이 영향을 받았는데, 무사비가 아랍의 봄을 지지하는 시위를 주도한 게 원인이었던 것. 2013년 개혁파 하산 루하니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가택 연금이 해제될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8년 임기 내내 불발되었고,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더더욱이나 2021년 대선에서 보수파 에브라힘 라이시가 당선되었으니,[6] 결국 연금 상태에서 여생을 마무리할 것 같았지만, 2024년 5월 20일 헬기 추락 사고로 라이시가 사망하자 가택 연금이 해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비록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 했으나, 대통령 못지 않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사실상 유일한 인물이며, 현재까지도 개혁파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끌고 있는 중이다.

3.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기간 비고
[[무장 무슬림 운동|
무장 무슬림 운동
]]
1977 ~ 1979
[[이슬람공화당|
이슬람공화당
]]
1979 ~ 1987
[[희망의 녹색 길|
희망의 녹색 길
]]
2009 ~ 현재


[1] 알리 하메네이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사실 이란인들 대다수가 고정된 성씨 없이 태어났거나 연고가 있는 지명을 성씨로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2] 모하마드 하타미 정부[3] 숭고국 시대(카자르 왕조)와 제국 시대(팔라비 왕조) 총리들까지 합하면 제45대.[4] 무사비의 할머니가 알리 하메네이의 이모이다. 즉, 하메네이는 불과 3살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무사비의 당숙이 된다.[5] 물론 말이 "좌파"지, 이념적으로는 명백한 우파였다. 단지 상대적인 개념이었을 뿐. 더 정확하게는 무사비가 온건파, 하메네이가 강경파인 것이다.[6] 아예 대놓고 반체제 인사들을 대거 숙청한 장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