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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
<colbgcolor=#ececec,#fff><colcolor=#0d1635> 출생 | 1933년 5월 1일 ([age(1933-05-01)]세) | ||
프랑스 바욘 | |||
재임기간 | 제7대 국제통화기금 총재 | ||
1987년 1월 16일 ~ 2000년 2월 1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ececec,#fff><colcolor=#0d1635> 배우자 | 브리지트 다시 | |
자녀 | 장녀 크리스틴 캉드쉬 | ||
학력 | 국립행정학교 행정학 석사 파리정치대학 파리 대학교 경제학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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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 제7대 국제통화기금 총재. 한국에선 1997년 외환 위기 당시의 총재로 유명하다.2. 상세
파리 대학교에서 경제학 전공, 프랑스 국립행정학교 행정학 석사, 1960년대에 프랑스 재무부 국장과 유럽경제공동체 금융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82년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가 되었다. 1987년 국제통화기금 총재에 취임한 후 1992년, 1997년에 연임하고 2000년에 사임하였다. IMF 최장기 재임 총재이기도 했다.외환위기 당시 IMF 총재로써 IMF 협상에 나서 고금리, 긴축 정책을 한국 등지에 적용하였다. IMF의 초강력 처방에 대해 많은 비판과 경고가 제기되었으나 IMF한테는 우이독경이었고 그의 태도는 마이동풍이었다. 작은 나라들도 IMF 구제금융을 많이 받았지만 브라질, 러시아, 폴란드,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우크라이나, 아르헨티나 같이 인구로나 영향력으로나 꽤 큰 나라도 구제금융을 받았던 만큼 욕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는 위치이기도 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마치 항복문서를 받는 듯 팔짱 낀 사진이 찍혀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극비 방한하였으며 임창열 당시 부총리와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했다.
3. 비판
태국, 대한민국 등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구제금융의 대가로 혹독한 경제 긴축과 구조조정을 요구하여 학계와 미국 의회의 비난을 받았다. 그간 구제금융의 혹독한 대가에 진절머리가 난 동유럽 국가에서 구공산당이 재집권하고 일부 국가는 반미 성향을 드러내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르헨티나는 구제금융 이후 외채가 불어나고 평균 임금은 지속적으로 삭감되면서 2001년에 디폴트까지 가는 등 경제가 오히려 악화되었고, 말레이시아는 IMF의 조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경제 위기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욕을 많이 먹었다.[1]당시 한국인들 사이에선 깡그리 드슈[2], 식민지총독, 사채꾼, 한국판 GHQ 최고사령관[3], 저승사자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본인도 욕을 많이 먹으면서 깨달은 점이 있는지 10년 가량 지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때쯤에는 "당시 무리한 경제 처방을 강요한 측면이 있었다."라며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실제로 한국은 기업의 부실 경영과 관리자인 정부의 책임이 컸고 구조조정과 경제 개혁은 반드시 필요했으나, 시간적 여유를 두고 상담 및 복약 처방으로 극복할 수 있는 우울증 환자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고 사지결박을 시키고 엽기적인 전두엽 절제술 처방을 받도록 몰아세운 꼴이라서 더욱 비판을 받았다. 특히 태국에서는 한 관료가 "잘못한 사람한테는 계도를 해야지, 왜 죽도록 매를 때리는가?"라고 비판했을 정도로 반감이 심했다.
캉드쉬 체제 IMF의 가혹한 조치들이 한국에 미친 여파들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이후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를 만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작심하고 앞에서 캉드쉬의 이름을 직접 발언하며 IMF가 과거 한국에 대해 잘못된 정책을 강요해 큰 고통을 안겨준 사실을 상기시키고 치열한 반성 없이는 회원국의 신뢰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4. 대중매체에서
- 왈순아지매에선 깡그리 드슈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 한국의 IMF 외환위기 당시 KBS 뉴스의 앵커가 '캉드쉬 총재가 한국을 방문해서는 볼 것 다 보고, 할 말 다 하고 돌아갔다'고 멘트했다.
[1] 말레이시아는 IMF의 조치를 거부하고 내수 시장을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단 이는 말레이시아가 한국과 달리 내수 시장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2] 심지어 이 별명은 후술하다시피 10대 일간지 중 하나인 중앙일보에 연재되던 시사만평에서도 사용되었다.[3] 절대 농담이 아니라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약 3년 간 대한민국 경제 분야는 물론 정부의 재정 기획까지 간섭이 심했던 터라 경제 관련 언론 매체에서 빠짐없이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일본을 점령한 GHQ의 더글러스 맥아더의 한국판 재림이라고 풍자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