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개명 | 민원숙(閔元淑)[1] |
이명 | 민영숙(閔泳淑) |
본관 | 여흥 민씨[2] |
출생 | 1905년 9월 5일 |
충청남도 직산군 이동면 양대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 | |
사망 | 1988년 12월 25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86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민옥금은 1905년 9월 5일 충청남도 직산군 이동면 양대리(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에서 아버지 민재오(閔載午, 1853 ~ 1909. 8. 19)와 어머니 전주 이씨 이재순(1871 ~ 1960. 2. 22) 사이의 5남 3녀 중 차녀, 다섯째로 태어났다.[3]그녀는 고향 양대리에 소재한 사립광명여학교(私立光明女學校)에 재학하던 중 1919년 3월 10일에 교사 임영신의 지도 하에 학우인 한이순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를 준비했다. 이후 3월 20일 오전 10시경 동교 학생 80명을 규합하여 양대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고, 이어 입장면 장터로 행진해 장터에 모인 300여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그녀는 이 일로 천안군에 위치한 헌병대 유치장에 10일 간 구금되었다가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1919년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0년 2월 7일에 가출옥했다.
가출옥한 후 경기도 개성군으로 유학하여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감리교신학교에 진학하였다. 졸업 후 광화문교회에서 1년 간 봉사하다가 이천 양정여학교에서 7년 간 봉직하였고, 그 뒤 4년 간 경성부 동부 지역을 순회하며 중학생 교육 및 사회사업 등에 종사하였으며, 이어서 수원군 지역에서도 활동했다.
34세 되던 1938년 김해 김씨 김남식(金南植)과 혼인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나 1943년 남편을 잃었다. 8.15 광복 후 스승 임영신 등의 발기로 조선여자국민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여 상무간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평범히 지내다가 1988년 12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민옥금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녀의 유해는 사후 1988년 12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