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9 11:42:15

민주중보



1. 개요2. 역사
2.1. 탄생2.2. 필화(筆禍)와 수난사
3. 관련 자료

1. 개요

민주중보》는 미군정 시기 부산 지역 일간지로, 1945년 9월 1일부터 우리말 신문을 발행하여 동년 8월 31일에 창간된 광주 지역 일간지 《전남일보》와 함께 전국에서 가장 빠른 국문 신문이었다. 1962년 8월 1일 폐간했다.

2. 역사

2.1. 탄생

1905년 2월에 창간된 《조선일보》[1]가 그 모체이다. 1907년 10월 《부산일보》[2]로 사명을 변경한 뒤 부산 지역의 유력 일간지로 알려졌으며, 1940년에는 일제의 언론통폐합 방침에 따라 《조선시보》와 《남선일보》를 합병하면서 그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부산일보》는 대표가 일본인이었으나 일본인 사원들이 전부 제2차 세계 대전에 징집돼 감에 따라 조선인 사원들이 인쇄 부문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해방을 맞이한 사원들은 국문 신문의 발행을 계획, 우리말 활자까지 공수해 가면서 1945년 9월 1일부터 《부산일보》 국문판을 발행하였다. 동년 9월 17일 미군이 부산에 도착해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킴에 따라 《부산일보》 사옥은 한국인 사원들에게 접수되고, 자체적인 운영 위원회가 구성되어 신문 제호도 《민주중보》로 바꾸게 되었다.

2.2. 필화(筆禍)와 수난사

《민주중보》는 기존 《부산일보》의 기반과 국문 신문에 대한 지역민들의 관심에 힘입어 1946년에 들어서는 이미 발행부수 기준 부산 지역의 대표 신문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동년 9월 9일, 미군정 적산 관리 당국의 24시간 내 퇴거 명령으로 인해 새로 창간된 《부산일보》에 사옥과 자본을 내어 주고 에비스 약국 2층으로 이전했다. 군정 당국이 《민주중보》의 논조를 좌경적이라고 본 것이 원인이었다.

같은 해 10월 4일에는 대구 10.1 사건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정간 처분을 당했다. 비슷한 시기에 불상의 테러단이 사옥을 습격해 시설이 파괴되고 신문 발행이 일시 중단되었다. 결국 군정 하에서 경상남도 보건국장을 역임한 박기출을 사장으로 해 복간하였으나, 군정의 간섭은 계속됐다.

1948년 6월 5일, 과거 조선총독부의 재무국장, 학무국장, 조선은행 부총재 등을 지낸 일본인들이 부산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보도하였다. 하지만 보도로 인해 반일 감정이 들끓자 미군정 측이 명백한 허보(虛報), 즉 가짜 뉴스로 규정지어 담화를 발표하고 이를 구실로 《민주중보》는 또 다시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

동년 8월 17일, 독립운동가였던 최천택을 사장으로 세우고 제호를 《민주신보》로 바꾸며 복간하였다. 6.25 전쟁 기간에는 서울 지역의 주요 일간지들이 부산에 피난해 오며 전국 최대 신문 지위를 누렸으나, 1953년 대화재로 사옥을 이전하였다.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발표한 언론 세칙에 따라 1962년 8월 1일 마지막 석간을 발행하고 폐간했다.

3. 관련 자료


[1] 현대의 조선일보와는 다른 별개의 신문이다.[2] 이 역시 현대의 부산일보와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