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70년 11월 17일 |
경기도 지평현 상북면 상갈리 (현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증안마을 133번지) | |
사망 | 미상 |
사망지 미상 | |
본관 | 여흥 민씨 |
종교 | 시천교 → 천도교 |
상훈 |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70년 11월 17일 경기도 지평현 상북면 상갈리(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증안마을 133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시천교에 입교해 지평지회 회원으로 있었다. 1905년 을사의병 당시 의병장 원용팔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2] 1919년에는 천도교 양평교구 내에서 전교사로 활동하였다.[3]1919년 3.1 운동 이후 같은 천도교인이던 신재원·정경시가 3월 23일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 장날에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자고 권유하자 이에 김종학(金鍾學)과 함께 찬성하여 동참하게 되었다. 이후 양평군 청운면 여물리의 어느 다리 아래에서 여러 차례 만나면서 신재원이 미리 사 둔 무명으로 깃발을 3개 만들었고, 김종학은 각 깃발에 먹으로 '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를 썼다. 그리고 본인과 정경시, 김종학이 깃발을 각각 한 개씩 나눠 가졌다.
1919년 3월 23일 당일 오후 3시 40분에 김종학·정경시와 함께 깃발을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에 도착했고, 장터에 모인 군중 150여 명을 지휘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4],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다.[5] 이에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6]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이후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 제7장에는 閔[2]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 제7장을 보면, 1905년 원용팔의 의병부대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 8명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되었다.[3] 1919년 5월 16일 증인 양재목(梁載穆) 신문조서를 보면 천도교 양평교구 전교사 7명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되었다.[4] 1919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5] 1919년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6] 1919년 6월 21일 고등법원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