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기영(朴基永) |
생몰 | 1882년 9월 22일 ~ 1953년 12월 11일 |
출생지 | 황해도 봉산군 사인면 만화리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기영은 1882년 9월 22일 황해도 봉산군 사인면 만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예수교회 조사(助事)로 활동하다가 서종면 단장리의 청년 이기풍(李基豊), 진학철(陳學哲) 등과 연락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고, 1919년 3월 12일 아침 9시에 많은 장꾼들이 사리원으로 향하는 틈을 타 미리 준비해온 태극기를 배포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많은 장군들이 호응하였지만, 일제 헌병대의 출동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그 후 박기영은 이기풍, 진학철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0년 2월 13일 평양복심에서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8개월을 언도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하여 상고했지만 3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고, 이후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엔 고향에 지내다가 6.25 전쟁 때 서울로 내려왔으며,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12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기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